211화 수도로 (2)
왕국의 수호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사람들은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가리킬 것이다. 부패와 향락이 만연한 왕국에서는 빛이 더욱 밝게 보이는 법이니.
그런 후작가가 가진 위세는 왕국의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에스퍼렌사 후작 본인의 무력에 대적할 자 또한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정도(正道).
힘과 정의는 곧 에스퍼렌사의 가훈이다.
하지만 왕국의 최강자를 논한다면, 시선은 왕성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왕국 마법성의 궁정 마법사단.
그중 1석차에 해당하는 자는 특이 형질 보유자로서, 5위계 마도사인 에드몬에 버금가는 실력자. 그러한 마법사 집단을 이끄는 것이 바로 레오닐이라는 존재다.
6위계 마도사는 존재 자체로 전쟁과 반역의 억제력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전쟁의 판도가 뒤바뀔 수가 있으니까.
특히나 파괴에 특화된 원소 마법사라면, 원거리에서 강력한 마법을 날리는 것만으로도 전장은 곧 학살의 장으로 변모한다.
광염(狂炎) 레오닐 베르타나스.
왕국 역사상 유례없는 왕가의 전력이다.
그런 그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노기(怒氣)를 드러냈다.
“아직도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마력의 기파가 일순 맥동했다.
쩌저적.
금이 간 대리석 바닥과 벽면. 언제나 가지런히 꽂혀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잉크병과 유리창은 버티지 못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난장판이 되어 버린 레오닐의 집무실에서, 1석차 헤이넬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오나 각하, 저희로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투입했지만 도저히 흔적조차 찾을 수가…….”
멈칫.
헤이넬이 곧장 입을 닫았다.
살기 가득한 레오닐의 시선과 마력이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네놈 변명이라도 듣자고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걸로 보이나?”
최선을 다했다.
레오닐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열심히 했는데 부족했다, 노력했는데 모자랐다.
이런 말들은 결국 성과가 없는 걸 포장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니까.
성공은 성공이고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헤이넬이 무릎을 꿇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쓸모없는.”
으득.
어금니를 깨문 레오닐이 책상에 손을 얹었다.
핏줄이 돋은 손아귀에 정돈된 보고서가 구겨지고 찢어졌다. 한가득 흘러내린 검은색 잉크에 레오닐의 얼굴이 비쳤다.
‘대체 누구냐.’
해외에 있는 실험실을 폐기하려던 그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개입했다.
브릭이 보낸 공간 좌표.
그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함정이었다.
‘감히 나를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보내다니……!’
왕국의 2대 금지 중 하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수백이 넘는 괴물에게 습격당했다.
당연히 그런 저급한 존재들에게 상처 입는 일은 없었다. 전부 없애 버리고 탈출하는 건 간단한 일.
하나 체액이 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너무도 불쾌했지만 이성을 다잡았다.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하고는 곧장 브릭이 있는 실험실로 날아갔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모종의 폭발로 인해 실험실은 엉망이었고, 4석차 브릭 메드워를 포함한 궁정 마법사 셋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연히 아닌 실종이란 건 자명했다.
그제야 레오닐은 자신이 당했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황과 치욕.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1왕자의 성에서 일어났던 사고도, 분명 같은 놈들의 짓일 테지.’
도대체 누구일까.
왕가에 반하는 가장 큰 적이라고 하면……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떠오르긴 하나 물직적 증거도 없고 심증도 없다.
후작가 가신 중 가장 뛰어난 마도사인 에드몬에게는 1왕자의 성에 있는 마법진과 공간 좌표를 수정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후자는 레오닐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안갯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다.
목적은커녕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 명인지 집단인지조차 모른다.
그래도 명확한 건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레오닐과 왕가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놈들에겐 시기가 좋지 않았군.’
이미 실험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특이 형질’을 가진 인간 하나만 있으면 된다.
복잡한 설비가 필요하지 않은 작업. 게다가 마침 ‘암흑가의 왕, 그론드’에게서 특이 형질 보유자로 보이는 마법사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기까지 했으니.
에스티리아 왕에게 허가를 받으면 끝나는 일이다.
‘그러니 대주교 방문 건만 잘 넘기면 실험은 완성이다.’
결과가 코앞이다.
그래, 얼마든지 방해해 봐라.
뭐가 됐든 간에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묵은 체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쿠웅!
방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레, 레오닐 각하! 큰일입니다!”
궁정 마법사 2석차 라첼.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머리와 안경이 흐트러져 있었다.
레오닐이 미간을 좁혔다.
“라첼,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이지?”
“루아스교의 조제프 대주교에게서 연락이…….”
“연락? 갑자기 연락이라니.”
수도 방문에 대한 건은 이야기를 마친 지 오래.
대주교가 오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종의 사유로 방문이 불발되었다는 게 아니면 특별히 연락이 올 게 없었다. 레오닐은 내심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기대는 정반대로 배신을 당했다.
“이번 건 아예 다른 사안입니다……!”
라첼이 곧장 설명했다.
듣고 있던 레오닐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헤이넬 또한 마찬가지.
하나같이 경악스러운 반응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러니까 대주교에게서 참고인 출석 요청을 받은…….”
한차례 침을 삼킨 라첼이 크게 소리쳤다.
“다크 워튼의 마탑주가 왕국 수도에 직접 방문한다고 합니다!”
초월자가, 왕국에 온다.
* * *
전신 거울 앞에서 한 노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두운 자색의 로브. 차가운 금속이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특수 개체의 소재로 만든 털가죽 망토는 칠흑을 띠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백발은 세월을, 피부에 난 검버섯은 생명의 흐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방이 없어 골격이 드러난 얼굴도 그에 한몫했다.
하지만 결코 추하지 않았다.
오로지 경외감만이 느껴진다.
생명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노인은 그 죽음을 누구보다도 이해한 존재였으니.
“……스승님, 진정으로 가셔야겠습니까.”
멀찍이 서 있던 제자가 물었다.
노인은 거울을 통해 그를 바라봤다.
“루아스교 때문에 그러느냐.”
“아시지 않습니까, 루아스교와 흑마법사는 물과 기름이라는 걸. 그런 놈들의 요청 따위는 무시하셔야 했습니다. 아니면 하다못해 스승님이 아닌 다른 이가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과 기름이라…… 그래, 맞는 말이지. 그런데 하나 묻고 싶구나. 왜 내가 루아스교와 섞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흑마법사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래서 루아스교를 도우려고…….”
“틀렸다.”
거울 너머로 고개를 저었다.
“네? 그럼 어째서 대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이신 겁니까?”
“이유라…… 너는 영원의 절벽에 대한 소식을 들었느냐.”
“영원의 절벽이라면 설마…….”
“그래, 그 설마다.”
노인이 확언했다.
“세계는 지금 급변하고 있다.”
작년,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마탑의 동력원이 붕괴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초월자 간의 마법전.
동대륙 북쪽에서는 아인종과의 전쟁.
에스티리아 왕국에 교구 학살 및 언데드 사태를 일으킨 흑마법사 집단이 나타났다. 세세한 것까지 따진다면 더욱 많다.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노인은 확신했다.
몇 년 이내에 세계가 뒤흔들릴 정도의 사건이 터질 것이라고. 어쩌면 사건‘들’일지도.
그에 더해서.
“현재 왕국에서 막대한 죽음이 느껴지고 있다.”
“……전쟁이 벌어진단 말씀이십니까?”
“알 수 없다. 최소 수십만 명의 죽음이 보이나 내게도 희미한 것이…… 정확히 반반이구나. 걷잡을 수 없이 커지거나 혹은 아예 일어나지 않거나.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더냐.”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죽음과도 같은 무정한 시선에 생기가 담겼다.
“그리고 듣자 하니 워렌스를 도와준 마법사가 있다고 하던데, 왠지 모르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생기더구나.”
초월자의 직감.
그 자체가 하나의 근거다.
“그 마법사가 죽음의 원인인 겁니까?”
“만나 보지 않는 이상 알 수는 없지.
하지만.
“평범한 이는 아닐 것 같구나.”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제자가 다가와 스태프를 내밀었다.
고대에 살해당했던 용의 두개골로 이루어진 뼈대, 그 첨단에서는 새빨간 보석이 위압감을 드러냈다.
흑마법사의 마탑, 다크 워튼.
먼 옛날부터 그 주인에게 전해 내려오는 죽음의 상징.
스태프를 손에 쥔 노인이 명령했다.
“탑을 열어라.”
다크 워튼의 마탑주.
당대의 네크로맨서(Necromancer)가 왕국으로 향했다.
* * *
베르덴과 카란스의 대련은 치열했다.
아침과 점심에 걸쳐 몇 번이나 맞붙었고, 날이 갈수록 점차 그 강도를 높였다. 포션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필요한 지출이었다.
루아스교의 기적은 인간의 것이니까.
카란스는 이종족이라 치유를 받지 못하고, 베르덴도 뭔지 모를 이유로 인해 기적의 효과에서 제외되어 있다.
깊은 부상이 생길 때면 붕대를 둘둘 감고 휴식을 취하며 상처를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대련을 시작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결과.
“오늘은 제발 쉽시다, 형제여…….”
카란스가 드러누워 버렸다.
더 이상 음식을 미끼로 해도 소용이 없었다. 붕대를 둘둘 맨 그는 육체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지친 상태였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긴 했군.’
덕분에 필요한 전투 경험을 충족했다.
그건 카란스도 마찬가지겠지. 이제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 더 이상의 대련은 불필요했다. 아주 가끔씩이면 몰라도.
그때, 페르네가 다가왔다.
“애셔 님, 에스퍼렌사 후작가에서 연락이 왔어요.”
대주교 관련인가.
마침 좋은 타이밍이다.
“위치는?”
“‘비행정을 타고 수도로 향할 예정이니, 나흘 이내로 본가로 와라…….’라고 적혀 있네요. 에스퍼렌사 후작이 직접 보낸 서신이에요.”
나흘이면 여유 있게 출발해도 늦을 일은 없다.
“그럼 내가 없는 동안 카란스를 부탁하지. 사고를 칠 일은 없을 테니까 크게 신경 쓸 건 없을 거다.”
“염려 마세요. 이미 익숙해졌으니까요.”
페르네에게 카란스가 엘프라는 사실을 언질해 두었다.
카란스가 아세른에 장기 거주 할 수 있도록 위조 신분을 만든 것이 페르네였으니까. 유능한 정보상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그리고 유물 탐사단이 보내는 보고서는…….”
“틈틈이 확인한 다음,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을 달라는 거죠? 네, 그럴게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부디 마찰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더 이상 안 한다.
페르네의 사고방식은 베르덴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그녀의 심장은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성장한 건 베르덴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술잔을 기울였다.
* * *
하늘 위를 질주하던 베르덴이 후작 영지에 도착했다.
혼자 움직였기에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몇 달 전, 비행 금지령이 내려진 당시였다면 그 몇 배나 되는 시간을 소비했을 텐데.
‘세월이 빠르군.’
새삼 실감이 났다.
정문을 통해 후작가의 본가에 들어섰다.
넓은 정원에 놓인 길을 걷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후작가의 독녀, 칼리아.
여름의 화단을 구경하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시선이 베르덴에게 닿았다.
“늦지 않게 왔군, 애셔.”
“몸은 괜찮으십니까.”
“얼마 전까지 불편하긴 했지. 그래도 가볍게 재활을 했더니 말끔히 낫더군. 네 덕분이었다.”
두 사람이 정원을 거닐었다.
“우리는 후작가의 본선을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루아스교에서 요청한 대로 교구의 부상자들은 전부 실었지. 그리고 워렌스 또한.”
“워렌스는 상태는 여전합니까.”
“네가 마법진을 제거한 이후 그대로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루아스교에서 데리고 오라는 걸 보면, 정신을 치료해 주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마탑에게 인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다크 워튼 소속의 흑마법사이기도 하고, 그와 별개로 주검의 영광에 대하여 도움을 주기도 했으니 별일은 없을 거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니 상관할 이유는 없다만.”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대화를 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저택의 앞에 도달했다. 고급스러운 마차가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아버지는 이미 비행정에서 기다리고 계시기도 하니.”
벌써?
“혹시 제가 늦게 왔습니까?”
“오히려 하루 일찍 왔지. 그리고 나는 네가 이 시간쯤에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고.”
“만약 제시간에 왔다면…….”
“이미 내 옆에 네가 있는데 달리 생각할 게 있나? 의미 없는 가정이군.”
칼리아가 마차에 올라탔다.
어서 타라며 새하얀 손으로 손짓했다.
‘라이너스를 보고 갈까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나중으로 미루는 수밖에.
아니, 완성이 될 때까지 연락을 기다리는 편이 나으려나. 몰래 보고 가는 것 자체만으로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그래, 그게 좋겠군.’
인내심을 갖고 견디자.
수도에서 돌아오면 고대하던 스태프가 완성될 테니.
베르덴이 마차에 올라탔다.
이내 문이 닫히며 마부가 고삐를 내리쳤다.
향하는 길은 비행정.
그 목적지는 수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