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수도로 (1)
광활하고 험악한 산지가 주변에 가득하다.
그 차갑고 드높은 꼭대기에는, 아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득해지는 듯한 영원(永遠)의 절벽이 고요히 포효하고 있다.
마치 전설에 나올 법한 장소다.
그러한 곳에서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각 집단의 정점이 대치했다. 이 두 명의 초월자가 서로 마주하는 건 수십 년 만의 일.
하나 살가운 인사는 불필요하다.
로벨린에게서 관심을 거둔 다히트가 비상했다.
정확히 발로크가 있는 고도에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는 순간, 인지를 넘어선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마탑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설마 여기 나타날 줄이야. 보헤미른 마탑주가 그렇게도 가벼운 자리였나?”
“열세에 놓여, 직접 나선 네놈보다는 무겁다. 기껏 생각한 게 지부장을 미끼로 삼아, 내 마탑의 전력을 깎는 거라니. 같은 초월자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군.”
“하, 다른 마탑들의 힘을 빌려 놓고 위세는. 그리고 미끼로 삼은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로벨린은 장래가 기대되는 화염 마법사.
마탑에 있어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다.
하지만 다히트의 죽음은 그 이상이다.
초월자 간의 전투는 단 한 수로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다.
로벨린과 그 척살대는 보기 좋은 미끼다.
그것으로 다히트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아주 적절한 희생이겠지. 물론 도중에 발각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긴 했으나, 이것이 발로크의 판단이었다.
당연히 로벨린은 듣지 못한 이야기다.
다히트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예상외로 신수가 훤하구나. 동력원이 폭주하면서 ‘비공식’ 실험을 하던 마법사들과 함께 보물고까지 일부 날아갔다고 하던데. 듣자 하니 다섯 번째 컬렉션이 통째로 소멸했다지, 아마?”
마탑주의 다섯 번째 컬렉션, 두 번째 회로.
착용자의 한계 위계를 극복하게 해 주는 인공 아티팩트. 최대 6위계까지라는 제한이 있긴 하나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심지어 보헤미른 마탑의 상징들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사건의 원흉이 제3자인 것처럼 말하는군. 왜, 이제 와서 잘못을 빌기라도 하고 싶었나?”
“나는 범인이 아니라고 이미 전달한 바 있다.”
“네놈이 보낸 첩자에 대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발뺌을 하는가?”
“첩자를 써서 마탑의 동력원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내 손으로 다른 마탑들까지 없애고도 남았을 거다. 그러니 첩자는 근거가 될 수 없지. 내가 생각하기에 가능성이 높은 건 이거다.”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동력원의 붕괴는 어디까지나 너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 하나 그 피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으니, 내 블랙 아워를 범인으로 지목해 책임을 회피한 것이라고. 어떤가, 내 가설이?”
“소설을 쓰는 것도 정도껏이지. 그 블랙 아워도 갈 때까지 간 모양이야.”
……과연 거짓일까.
어쩌면 두 사람 다 진실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초월자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깊고 어두운 내막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무의미하다.
다히트와 발로크는 적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또한 그러했다. 이제 와서 진실을 규명하는 일 따위는 하등 소용이 없는, 옛적부터 틀어져 버린 톱니바퀴다.
뭐가 됐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일.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기대되는군. 제 스승들마저 몰살한 ‘찬탈자’는 죽을 때 어떤 유언을 남길지.”
“유언이라. 마법진이 없으면 제대로 된 마법조차 시전하지 못하는 ‘반푼이’보다야 낫지 않겠나.”
찬탈자 그리고 반푼이.
둘의 일생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단어들이다.
가볍게 웃고, 표정을 지웠다.
그와 동시에 초월자의 마력이 충돌했다.
쿠구구구……!
단순한 마력의 방출만으로 영원의 절벽이 뒤흔들린다. 숨이 턱 막힐 듯한 위압감이 공간을 잠식했다.
휩쓸리면 죽는다.
죽음을 직감한 로벨린이 소리쳤다.
“모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라!”
“네, 네!”
명령을 받은 척살대가 당장 절벽으로 내달렸다.
블랙 아워의 지부장 또한 마찬가지. 지금은 둘이 마법전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로벨린이 하늘을 바라봤다.
대기가 일그러진 하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두 초월자가 보인다. 강하게 손을 말아 쥐자, 손톱이 파고든 상처에 핏방울이 맺혔다.
‘……베르덴.’
그의 목숨을 빼앗은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재능을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로벨린은 감히 초월자의 곁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지금은 부족할지언정 훗날 저들의 발끝에라도 닿고 말 것이다.
로벨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믿어야만 했다.
복수심이라는 불꽃마저 없다면 그녀는 완전히 사그라들고 말 테니.
…….
죽은 친구이자 가족에 대한 속죄일까.
아니면 알량한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한 자기 합리화일까.
모르겠다.
둘을 구분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런 속마음을 터놓을 사람도 없다.
이미 베르덴은 죽었으니까. 그 현실만이 그저 유일했다.
입술을 짓씹은 로벨린이 비행을 시전하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직후, 발로크 베시아스가 스태프를 높이 들었다.
각종 컬렉션과 함께 개방된 마도. 거대한 세 개의 마법진이 떠오르며 어두운 하늘을 밝혔다.
발로크가 말했다.
“싱겁게 끝나지 않도록, 어디 한번 힘껏 발버둥 쳐 봐라, 웨스로웰.”
“내가 할 말이다, 베시아스.”
화르르륵.
다히트의 몸이 검은 불꽃으로 뒤덮였다.
마도를 온전히 드러낸 두 존재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침묵이 깨진 건 그야말로 일순간이었다.
위계의 끝, 극위(極位).
그 극단을 넘어서는 것은 마법의 초월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전유물.
단 하나만으로도 도시를 지울 수 있는 마법이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위(超位) 마법.
<트리슈라Trishula>
<무암無暗>
────!
추락하는 빛의 기둥.
승천하는 칠흑의 화염.
서로가 충돌하며 발생한 파괴의 여파가 일대를 집어삼켰다.
* * *
[초월자 간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지도에서 사라진 영원의 절벽]
[보헤미른 마탑과 블랙 아워, 분쟁의 원인은?]
“…….”
베르덴이 말없이 제국 신문을 정독했다.
활자 하나 놓치는 일 없이 모든 내용을 기억에 담았고 또 상황을 이해했다. 신문을 고이 접어 내려놓은 그가 생각에 잠겼다.
‘로벨린…….’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땐 조금 놀랐다.
설마 마탑주의 네 번째 제자가 되었을 줄이야. 베르덴과 마찬가지로, 마법에 대한 학구열이 높았지만 권력에 있어서는 초탈한 편이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생긴 건가.’
어쨌든 살았다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마탑의 동력원이 붕괴된 사실이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건 의외인데.’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
베르덴이 말하는 대상은 일반 대중들이다.
파괴 불능의 완전한 마력 구성체인 동력원이 폭주했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그 여파가 엄청나다는 건 자명하긴 하나…… 그렇다 해도 정보 통제의 강도가 상당하다.
‘마탑들과 국가들이 힘을 합친 결과인가.’
발생할 혼란에 대비하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숨기는 것도 여기까지다.
초월자 둘이 격돌하며 엄처난 화제성을 갖기 시작했으니 곧 밝혀질 터. 시간을 늦추는 게 고작일 뿐인 예견된 사실이다.
베르덴이 주목한 건 하나 더 있었다.
‘초월자 간의 마법전은 승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
블랙 아워의 지도자, 다히트 웨스로웰.
결론적으로 말해 무승부다.
신문 끝자락에 적혀 있길, 각 진영에서 블랙 아워와 마탑의 지원군이 오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고.
베르덴은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다 양보할 수는 없다.’
발로크 베시아스는 복수의 대상이다.
그의 목숨과 일생을 짓밟는 건 오롯이 베르덴의 몫이다.
그리고 다히트 웨스로웰도 비슷하다.
‘하르칸 다제스트.’
블랙 아워를 창설한 최초의 구성원.
베르덴에게 성신 마법을 전해 준 그가 죽어 가면서 부탁했다.
부디 세상을 위해서 블랙 아워를 막아 달라고.
그에 대한 대가는 이미 받았다.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되기는 하나, 베르덴은 하르칸과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미래라.’
하르칸의 약속.
로벨린과의 재회.
베르덴 자신의 복수.
다가오는 미래.
언젠가 이루어질 현실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요원한 일이다.
마도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해 방황하고 있으니.
하지만 어떻게든 극복할 거다.
마도를 깨닫기 위해서 복수심을 버려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역천으로 다시 한번 운명을 비틀어서라도 마도와 복수, 둘 다 이루고야 말 테니까.
베르덴은 가슴 한편에 확신을 품었다.
마침내 초월자가 되어 베르덴이라는 본명을 세상에 드러낼 순간이 그리 머지않을 것이라고.
‘……그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멈추지 않고 나아갈 뿐이다.
그래, 그게 전부다.
* * *
후웅. 후우웅.
베르덴이 임시로 구한 스태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원소 마법의 위력을 강화하는 성능을 가진, 내구성 중점의 무기. 오큘러스에 비해 가볍기는 하나 적응하는 건 금방이었다.
발을 디디며 체중을 싣는다.
중요한 건 스태프에 집중된 마력과 마법. 찌르든 때리든 상대에게 닿는다면 유의미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방어용으로도 마찬가지.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매끄러워진다.
생소한 무게감은 어느새 익숙해져 감각에 뿌리를 내렸다.
‘이 정도면 됐군.’
연습은 여기까지.
베르덴이 숨을 내쉬자, 카란스가 물었다.
“준비 됐습니까, 형제여?”
“그래.”
베르덴이 자세를 잡았다.
그에 맞춰 카란스가 두 개의 단검을 들었고, 숲의 정령이 옆에서 명멸했다.
이곳은 아세른 근처에 있는 슬론 숲.
인적이 드문 숲 한가운데, <지형조작>으로 넓은 공터를 만들고 그 주변 일대에 은폐 마법진까지 둘렀다.
베르덴이 시간을 들여 구현한 것이니, 실수로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발각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
지금의 무대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대련.
‘카란스의 전투 방식은 마검사와 다를 바 없다.’
정령을 이용한, 일명 정령 마법을 자유로이 다루는 데다가 근접 전투 능력은 날렵하고 치명적이다. 마법을 견뎌 내고 궁정 마법사의 심장을 일격에 관통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베르덴의 방식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을 터.
다시 말해 훌륭한 연습 상대라는 뜻이다.
‘가디언 엘프만 한 인력을 내버려 두는 건 아깝지.’
강자와의 원 없는 싸움. 이런 기회는 결코 흔치 않다.
만약 베르덴의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자신이 가진 전투 기술과 움직임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둘 것임이 틀림없다.
그걸 두고 의뢰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이나 은행에서 빌린 25억 엘크 대출금이 있긴 하지만, 칼리아 덕분에 이자는 아직 붙지 않으니, 급하게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돈은 수단일 뿐.’
카란스와의 대련은 그보다도 목표에 가까운 수단이다.
우선순위는 자명하다.
베르덴이 부여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며 말했다.
“카란스, 만약 대련에서 네가 이긴다면 최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마.”
“최고급 레스토랑이라면…….”
“비싸고 맛 좋은 음식이 가득한 곳이지.”
카란스는 식성이 좋다.
하나 잡식이 아닌, 미식이라고 할 만큼 고급스러운 음식을 선호한다. 그런 특성쯤이야 꿰뚫어 본 지 이미 오래다.
베르덴이 던진 미끼.
직후 낚싯줄이 뒤흔들렸다.
“진심으로 가겠습니다, 형제여.”
카란스의 기세가 일변했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 손에 쥐고 있는 단검에서 예기가 흘렀다.
‘동기는 충분히 부여했으니.’
이제 시작할 차례다.
베르덴과 카란스.
동시에 지면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적을 마주한 듯, 봐주지 않고.
두 개의 단검이 교차하며 궤적을 그렸고, 하나의 스태프가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졌다.
────쩌어엉!
마법진의 중심에서 터져 나온 금속음.
그렇게 마법사와 엘프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그러는 한편, 에스티리아 왕국 마법성에서 누구도 예기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