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소식
아세른으로 가는 복귀 길은 평소보다 느긋했다.
에스퍼렌사 후작의 의뢰를 완료한 터라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도 없고, 이번에는 베르덴 혼자만이 아니라 동행이 있었으니까.
육포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강행군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낮의 열기가 식고,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 베르덴과 카란스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야영지를 세웠다.
마법진이 일대를 가렸고, 그 중심에서는 모닥불이 타올랐다.
지글지글.
훈제 고기가 뜨겁게 데워졌다.
‘꽤 향기가 좋군.’
후작가에서 받은 최고급 품질이니 당연하겠지.
식기를 손에 쥔 카란스가 침을 삼키며 뚫어지게 쳐다봤다. 베르덴이 가볍게 마력을 일으키자 미세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에드몬의 마도를 모방한 속성 변질.
허공에서 생겨난 여러 개의 바람 칼날이 고기를 관통했다. 그릇에 얹어 보기 좋게 플레이팅한 다음 염동력으로 카란스에게 전달했다.
“먹어도 된다.”
“잘 먹겠습니다, 형제여!”
카란스가 곧장 고기를 입에 털어 넣었다.
식성 좋은 건 엘프 종족의 특성일까 아니면 카란스가 예외적인 걸까. 베르덴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식기를 들었다.
그렇게 뒤늦은 저녁 식사가 끝났다.
후식으로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내일 낮이면 아세른에 도착할 거다. 내가 했던 충고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지?”
와삭와삭.
카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형제여. 첫째, 인간과의 마찰은 최대한 피할 것. 둘째, 말을 할 때 인간이란 단어는 쓰지 않을 것. 셋째는────”
“내 허락 없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
지금 카란스의 외모는 평소와 다르다.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는 둥그렇게 바뀌는 등 전체적인 외모가 인간같이 변화했다. 수려한 외모는 여전해도 카란스와 동일 인물이라는 건 생각되지 않을 만큼.
기만의 얼굴.
베르덴이 준 가면 덕분이었다.
카란스가 가슴을 두들겼다.
“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형제에게 폐를 끼칠 일은 없으니까요.”
확신에 가득 찬 자신감이다.
과연 어떨까.
고민하던 베르덴이 물었다.
“그럼 상황을 하나 가정해 볼까. 만약 인간이 노려보면서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할 거지?”
“노려보면서…….”
카란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살기를 드러내며 송곳니를 번뜩였다.
“먼저 그 눈을 뽑은 다음에────”
“다시.”
수위가 높다.
“음, 그럼 어떻게 해야…… 설마 제가 피해야 하는 겁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적당히 손봐 주는 정도로 끝내라. 아세른의 치안이 좋지 않은 것과 별개로, 너에게 견줄 만한 실력자는 없으니까. 기만의 얼굴을 유지하고서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테지.”
“만약 위험한 인간이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땐 마력을 숨기지 마라. 대신 상대는 반드시 죽이고.”
엘프의 존재는 숨겨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란스를 감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이는 것 또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 사회에 익숙하게 만들 수밖에.’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혐오하기는 해도 살의로까지 번지지는 않으니. 그리고 궁정 마법사를 제 손으로 죽이면서 어느 정도 분노가 해소된 모양.
카란스를 관찰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너는 도시의 삶에 익숙해지는 데 전념해라. 여기저기 식당을 다니는 것도 좋겠지. 돈이야 충분히 있으니까.”
후작에게서 엘프 지원금을 받았다.
에드몬이 맛난 밥이라도 사 주라며 따로 챙겨 준 것도 있고. 전부 합치면 그리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카란스의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 제가 따로 할 일은 없는 겁니까?”
카란스는 본인보다 형제를 중시한다.
타인에게 빌붙어 살아간다는 생각이 없다. 카란스는 식충이 되어, 베르덴의 짐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엘프다운 걱정에 베르덴이 답했다.
“아니,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카란스만 한 강자는 결코 흔하지 않다.
그런 인재를 방치하는 건 너무도 아까운 일. 가디언 엘프의 강함은 베르덴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와삭.
베르덴이 과일을 베어 물었다.
* * *
“오, 여기가 도시…….”
카란스가 거리를 거닐며 아세른을 둘러봤다.
인간이 바글바글한 걸 보고 질색하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도시의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큰 모양.
베르덴이 주의하긴 했으나, 카란스는 생각 이상으로 도시에 잘 녹아들고 있었다.
그때, 페르네의 주점에 도착했다.
“여기가 형제의 동료가 있는 곳이군요.”
동료라.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베르덴이 안으로 들어섰고 카란스가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낀 페르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애셔 님! 마침 좋은 소식이…… 어?”
반짝.
카란스의 로브에서 익숙한 반짝임이 날아왔다.
시야에 비친 푸른빛.
지난 몇 달간 함께 지냈던 정령, 블루였다.
“블루!”
정령의 부재에 허전함을 느꼈던 페르네였다.
블루를 끌어안은 그녀는 뜻밖의 재회에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카란스가 베르덴에게 속삭였다.
“정령이 따르는 인간이라니…… 제가 봐 왔던 인간 중에 가장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역시 형제께서 가까이 두신 이유가 있군요.”
엘프 기준으로는 정령과 친하면 좋은 인간인 건가.
뭐, 어쨌든.
“잠깐 페르네와 대화 좀 하지.”
“저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카란스가 주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슬쩍 낯선 사내를 살핀 페르네가 블루와 함께 베르덴에게 다가섰다.
“다시는 블루를 못 볼 줄 알았는데…… 그 의뢰 건은 잘 해결된 모양이네요. 그보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처음 보는데.”
“이따 소개해 주지. 그런데 좋은 소식이란 게 뭐지?”
“아, 그거요. 여기서 말하긴 뭐하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페르네를 따라 주점 안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
그녀가 서류를 하나 건넸다.
“애셔 님이 하신 의뢰, 외수에 대한 소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어요. 7년 전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춘 장소는 다름 아닌 로아프라. 그것도 그해 암흑가 경매장이 개최됐던 시점으로 확인되고 있어요.”
“…….”
“저는…… 빈테르트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뛰어난 장인이란 거 하나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고요. 그렇다면 죽지는 않고 어딘가에 감금되어 매직 아이템을 양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죠.”
페르네가 서류를 들췄다.
자신의 예상에 근거가 되는 자료들이 시야에 비쳤다. 조목조목 짚어 가며 설명하는 페르네는 정보상으로서의 귀감이었다.
그런데.
“이미 찾았는데.”
“……네?”
페르네의 동공이 흔들렸다.
* * *
“열심히 했는데…….”
자초지종을 들은 페르네가 울상을 지었다.
이내 탁상 위에 축 늘어진 그녀가 흐느끼듯 목소리를 냈다. 측은함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가 있나.
상황이 그렇게 된 걸.
“그리고 궁정 마법사를 죽였다고요? 그것도 제4석차 브릭 메드워를? 3왕자하고 1왕자에 이어서 에스티리아 왕의 직속 마법사까지…… 나중에 반란이라도 일으키시는 건 아니죠?”
“…….”
페르네가 연신 중얼거렸다.
베르덴이 해 왔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아예 이해 못 할 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기우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왕국에 온 용건 중 남은 건 마도왕의 무덤뿐.’
방주가 준 고대의 시련.
그걸 완수하면 더 이상 왕국에 볼일은 없다. 반란이 일어날 일은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설마 몇 개월 사이에 왕국이 송두리째 뒤집히지는 않을 테니까.
“……음?”
그때, 한쪽에 놓인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형태의 신문이다.
그런데 이 근방에서 발간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염동력으로 끌어당기자 신문의 제호(題號)가 눈에 들어왔다.
[아르나크 제국]
그 이름에 베르덴의 눈이 약간 커졌다.
“……서대륙 신문이 왜 여기에 있지?”
“제가 이래 봬도 유능한 정보상이잖아요. 가능한 해외에 있는 정보도 수집하려고 노력하죠.”
페르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신문은 고작 3주 전에 제국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여기 왕국까지 흘러들어 온 걸 보면, 장거리 공간 이동을 통해 전해졌다는 뜻이죠.”
신문을 퍼뜨리는 데 공간 이동이라.
그것인즉슨 세계가 반응할 만한 소식이 담겨 있다는 의미.
“좀 전에 읽어 봤는데…… 와, 아마 애셔 님이라고 해도 깜짝 놀라실걸요? 진심으로 제가 장담할게요.”
“무슨 내용인데 그러지?”
“그러니까…….”
페르네가 나지막이 말했다.
“두 초월자가 서로 맞붙었다는데요?”
뭐?
베르덴이 곧장 제국 신문을 폈다.
앞장을 넘기자마자, 양면에 걸친 세 개의 문장이 시야에 비쳤다.
[보헤미른 마탑주, 만능(萬能)의 발로크 베시아스]
[블랙 아워의 지도자, 암월(暗月) 다히트 웨스로웰]
[두 명의 초월자, 영원의 절벽에서 격돌]
* * *
하늘에서 수십 개의 마법이 떨어졌다.
범위 자체를 아우르는 마법 폭격. 울창했던 숲은 초토화되고, 사방으로 확산되며 재를 흩뿌리는 불꽃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허억, 허억……!”
전신이 그을린 한 남자가 쫓겼다.
마법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 감당이 불가능했다. 이윽고 화염 광선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마치 피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붉은 화염이다.
여타 화염 마법과는 결이 다른 위력. 충격을 완전히 상쇄하지 못한 남자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끄으윽…….”
남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밑이 보이지 않는, 영원의 절벽이 보였다. 비행을 썼다간 바람 마법에 의해 곧장 목숨을 잃게 될 터.
퇴로가 없다.
그런 남자의 앞에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그중 필두에 선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보며 남자가 작게 웃었다.
“드, 듣던 것보다 대단하구나. 4위계 따위가 어째서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갔는지 의아했는데…… 역시 특이 형질이라는 건가.”
“왜 블랙 아워가 보헤미른 마탑을 습격한 거지?”
여인의 손에서 불길이 일었다.
격정적인 살기를 느낀 남자, 블랙 아워의 지부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왜. 말하지 않으면 날 태워 죽이려고 그러나? 하핫, 만나는 적들마다 모조리 불태워 죽인다는 게 사실이었군. 그래서 화형(火刑)의 로벨린이라고 불린다지?”
“왜 블랙 아워가 보헤미른 마탑을 습격한 거지?”
두 번째 물음이다.
여인, 로벨린이 이끄는 마탑의 척살대가 침을 삼켰다.
마탑주의 네 번째 제자, 로벨린.
그녀는 세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기회를 무시한 자는 남김없이 태워 버린다. 마치 처형을 하듯 고통스럽게.
생각만으로도 당시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부장이 말했다.
“왜 습격했냐라…… 우리가 안 그랬다고 하면 믿겠나?”
더 이상 기회는 없다.
로벨린의 손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그 열기에 지부장의 피부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 정도의 고통. 하지만 지부장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미끼를 제대로 물었어.”
“뭐?”
────!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업습했다.
로벨린을 포함한 모두가 본능적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저, 저 사람은……!”
마법사 하나가 목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짙은 회색의 머리칼과 눈동자, 짧은 턱수염.
흑색으로 일관된 로브와 금속 스태프. 그리고 마탑주에 필적하는 이 존재감까지. 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다히트 웨스로웰…….”
“말이 짧군.”
다히트가 다가왔다.
감히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가 손만 까딱해도 전원 몰살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다히트가 로벨린을 살폈다.
“흐음, 네가 베시아스의 네 번째 제자인가. 듣던 것 이상으로 감정적인 마력이지만 그렇기에 강력하다는 건가……. 특이 형질은 언제나 흥미롭군.”
“…….”
로벨린의 턱 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럼에도 적개심이 가득한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다. 압박감을 이겨 낸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왜 마탑을……!”
필사적이었으나 문장을 전부 잇지는 못했다.
초월자 앞에 선, 지금의 로벨린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감히 내 앞에서 적의라. 베시아스 그놈이 썩 괜찮은 재목을 제자로 삼았군. 그러니 가능하면 여기서 새싹을 잘라야겠지. 언젠가 성가시게 될지도 모르니.”
다히트의 손끝에 검은 화염이 맺혔다.
로벨린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 자체를 멸하는 마도의 불꽃. 금방이라도 로벨린을 소멸시킬 것처럼 다가왔다.
그때, 다히트가 우뚝 멈춰 섰다.
“……이런. 미끼에 잡힌 건 나였나.”
……무슨 소리지?
의문을 느낀 찰나의 순간, 다히트가 팔을 쳐들었다.
<멸화>
공중으로 뻗어 나간 검은 불꽃.
이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하늘의 일부를 집어삼켰다. 근처에 자욱하던 구름이 소멸되자 인간의 그림자가 시야에 드리웠다
“마탑주가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건 추하지 않나, 베시아스?”
“흥. 나이를 먹더니 눈치는 빨라졌군, 웨스로웰.”
발로크 베시아스.
마탑의 지배자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