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변화 (3)
인형(人形) 왕녀,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
현 에스티리아 왕가의 유일한 왕녀로, 어릴 적 폭발 사고로 인해 이지를 상실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에게 남은 건 일정 이상의 외부 충격에 의한, 극도의 자기 방어기제뿐이라고.
왕국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실리스는 그런 사실과 달랐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세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왕가의 어떤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특유의 존재감.
본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결코 인형 따위가 아니었다.
“일어서세요, 에스퍼렌사 후작.”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후작이 곧장 기립했다.
직후 실리스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
정돈된 잔디밭 위에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생겨났다. 실리스가 먼저 자리를 잡자, 후작이 그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백금색 눈동자가 앞으로 기울었다.
“최근 남부에서 발생한 언데드 사태가 마침내 종식되었다고 들었어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귀족들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하.”
“덕분에 중립 귀족의 입지가 높아졌어요. 반대로 왕위 계승 후보들은 책임을 밑으로 떠넘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예측하지 못한 변수였지만, 저희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군요.”
1왕자와 2왕자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왕국 남부에 쌓아 둔 기반이 대거 무너졌으니. 심지어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본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몰래 재산을 들고 도망치는 데 전념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퍼렌사 후작에게는 맛좋은 먹잇감이다.
이걸 정치로 끌어들이면 왕권을 크게 깎아내릴 수 있을 터. 설령 책임을 전부 묻지는 못해도, 두 왕자의 파벌은 상당히 불안정해질 것이다.
세력을 위해 보란 듯이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잘라 냈으니.
게다가 3왕자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표면적인 지지 세력인 조합이 무너지고, 암중에서 도와주던 주검의 영광이 왕국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회생이 불가능한 큰 타격.
시시각각 세력이 흩어지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다. 듣자 하니 3왕자는 자택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는다고.
계획은 순조롭다.
실리스가 원하는 혼란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소식이 하나 들어왔어요. 언데드 사태 그리고 교구 학살 건으로, 루아스교에서 7인의 대주교 중 하나인 조제프 대주교를 파견한다고 왕가에 서신을 보냈죠.”
“대주교…….”
후작이 목소리를 흘렸다.
혹시나 했지만, 진짜로 대주교를 보낼 줄이야. 그만큼 루아스교에서 이번 사안에 대해 중히 여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때가 되면 왕가에서, 가장 높은 공로를 세운 후작을 호출할 거예요. 그리고 학살을 일으킨 흑마법사를 토벌한 칼리아와…… 그 애셔란 마법사까지.”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그녀의 용건은 끝이었다.
다음으로 후작의 차례.
실리스가 물었다.
“그런데, 에스퍼렌사 후작. 연락책을 통하지 않고, 굳이 제 꿈속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죠?”
후작이 침을 삼켰다.
고개를 숙인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직접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 * *
1왕자가 개최하는 비밀 사교장에 잠입해, 숨겨진 비밀 실험실을 찾았다.
그리고 왕가, 궁정 마법사, 빈테르트가 관여한 모종의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가디언 엘프를 확보하기까지.
에스퍼렌사 후작은 그 사실을 상세히 설명했다.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애셔…… 제가 상정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유능한 마법사인 것 같군요. 단순히 마법만이 아니라, 옛 왕성의 보안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줄은.”
“특출난 사내임은 분명합니다.”
조합부터 시작해 현재.
잿빛 머리의 마법사는 실리스의 계획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 그 또한 상정하지 못한, 그녀에게 유리한 변수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훗날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그레이의 마법사.
언젠가 반대편에 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일면식조차 없는 마법사를 믿을 이유는 실리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섣불리 배제할 생각은 없다.
지금처럼만 움직인다면 나쁘지 않을 테니까. 에스페런사 후작가에게 맡기며, 이대로 방치하는 게 최선일 터다.
판단을 내린 실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레오닐의 실험실은 찾았나요?”
“네, 찾았습니다.”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 구출.
제4석차 브릭 메드워를 포함한 궁정 마법사 3명 사망 등 왕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궁정 마법사가 거주하는, 왕국 마법성.
실리스라고 해도 고위 마법사들이 대거 거주하는 장소는 쉽게 엿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쯤 그들의 상황이 심각할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실험의 목적도 알아내셨나요?”
“정확히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만…….”
후작이 입을 닫았다.
작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굳힌 그가, 마침내 ‘심장 박동이 들려오는 푸른 수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정체에 대한 추측까지도.
“…….”
경청하고 있던 실리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파문이 이는 눈동자, 잘게 떨리는 손끝. 무감정했던 그녀의 얼굴이 경악과 불신으로 일그러졌다.
후작이 다급하게 말했다.
“하, 하지만 아직 확정된 건…….”
“그만.”
꿈의 정원이 침묵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곳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소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실리스의 목소리만이 감돌았다.
“후작, 당신이 예상한 게 맞겠죠. 아예 터무니없었다면 당신은 그런 추측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
“신임 재상과 마법사들이 실종되거나 죽으면서 전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설마 이때까지 남아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내 ‘어머니’의────”
순간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어금니를 깨물어 겨우 억눌렀지만, 이때까지 참아 왔던 왕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물려받은 ‘특별한 핏줄’이 뜨겁게 들끓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실리스가 마력을 번뜩였다.
꿈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실리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최측근.
한때 그녀처럼 왕국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희생양.
“로리안, 아델, 플로나.”
“부르셨습니까, 전하.”
“‘대관식’을 앞당기겠습니다.”
……!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목소리가 풀리자마자 곧장 소리쳤다.
“저, 전하! 그렇게 되면 죄 없는 많은 사람이……!”
“그래서요?”
실리스가 후작 앞에 다가섰다.
“당신이 그랬었죠. 이 왕국에도 희망이란 게 있으니, 부디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저는 그 말을 듣고, 보다 평화롭게 왕국을 바꿀 방법을 모색했어요. 그를 위해서 20년이 넘도록 인형으로 살아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이거야.”
새하얀 손이 후작의 목을 쥐었다.
단련되지 않은 여자의 힘이다. 그렇기에 한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누가 죄가 없다고? 당신? 아니면 나? 아니, 여기에 무고한 자는 없어. 이 왕국이 그대로 존재하는 한.”
“전하…….”
“그딴 식으로 날 막을 셈이라면 모른 채로 지내, 예전처럼.”
예전처럼.
마지막 말이 후작의 심중을 꿰뚫었다.
실리스와 시선을 마주하던 후작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힘을 푼 실리스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꿈속에 있는 모든 이를 향해 속삭였다.
“올해가 가기 전까지 왕위 계승 분쟁을 끝내겠습니다.”
의견이 아닌 명령.
어느 누구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천천히 네 사람의 얼굴을 살핀 실리스가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쩌저적.
정원에 금이 갔다.
이어 산산이 부서지며 어둠이 덮쳐 왔고, 그 직후 멀어졌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실리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창으로 막혀 있는 창문을 통해, 드넓은 도시가 보였다.
화창한 햇살.
풍요로운 왕국의 수도는 활기로 가득 찼다. 개미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의 평화가 누구의 피와 살 그리고 ‘심장’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 채.
그러니 다시 빼앗아도 상관없으리라.
원래 없어야 했던 거니까.
“그렇죠, 어머니?”
두근, 두근, 두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 *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대장간.
왕가의 핏줄을 제외하면, 왕국 제일의 귀족답게 일반 대장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재료들은 장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라이너스가 최상위 금속, 데인스 강 주괴를 손에 쥐었다.
“이야, 전부 진짜잖아? 허, 이걸 전부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 대체 후작을 어떻게 꼬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후작에게 딸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혹시 데릴사위?”
“…….”
“아니야? 음, 그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데.”
에스퍼렌사 후작은 베르덴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단 며칠 만에 가신들을 설득한 그는, 요청한 재료들을 전부 지원해 준 데다가 스태프가 완성되기까지 대장간을 빌려주기로 했다.
말 그대로 후작가의 재산을 턴 거나 다름없다.
아무리 보수의 일환이라고 해도 과하다. 그 탓에 베르덴을 바라보는 후작가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정당한 보수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마탑에서부터 고대하던 지금 이 시간.
새로운 스태프를 제작함으로써,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때다.
“아, 재료들은 여기 내려놔. 가져다 쓰기 편하게.”
라이너스가 가리킨 탁상 위에 재료들을 나열했다.
원소의 숨결.
마력 크리스탈.
소울 트리의 뿌리.
베르덴이 사용하던 스태프, 오큘러스까지.
“제작은 얼마나 걸리지?”
“넉넉잡아 3~4주? 내가 컨디션이 좋으면 그 전에 끝날 수도 있고. 룬 기술에다가 최상위 금속 단조, 이거 쉬운 일이 아니니까 보채지는 말라고.”
늦으면 한 달인가.
‘오큘러스가 없으면 허전하긴 할 테지만…… 어쩔 수 없지.’
그때까지는 임시 스태프를 구하는 수밖에.
뭐,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럼 맡기지.”
“그래그래. 목숨값은 할 테니 가서 편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라이너스는 대충 대답하며 강철 주괴를 집어 들었다.
먼저 잃어버린 팔을 대체할, 특수한 전용 도구를 만들 생각인 모양. 그의 뒷모습에서 장인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베르덴은 곧장 대장간을 나갔다.
공간가방이 텅 빈 것 같아 허전함이 느껴졌다. 이윽고 멀리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가 그를 배웅했다.
* * *
“……왕가에서의 호출입니까?”
“그래, 다름 아닌 대주교가 직접 온다고 하더군. 사건 해결에 깊게 관여되어 있는 너와 칼리아는 물론이고, 나 또한 수도로 가게 될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글로스처럼 신체 결손을 당한 교구의 성기사도 있다. 그들 또한 후작가의 비행정을 타고 수도로 향하게 될 것이다.
“날짜는 언제쯤입니까?”
“아직 미정이다. 뭐, 그리 촉박하지는 않을 테니, 연락이 오면 네 정보상에게도 전해 주도록 하지.”
대주교라.
루아스교의 최고위 성직자가 아닌가.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번거롭긴 하지만…… 나쁘진 않군.’
베르덴은 루아스교를 도왔다.
교구를 학살한 이를 처단했고, 성직자의 희생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대주교가 단순히 상황을 살피러 온 것은 아닐 터.
루아스교에서 직접적인 포상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대주교와 독대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흑마도사 비올라에게서 빼앗은 마법 물품, 황금 뼈.
사령의 기운 자체로 봉인된 그것은 대주교급 신성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풀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올 줄이야.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을 드러낸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 보도록.”
후작이 가볍게 턱짓했다.
이전과 달리 뭔가 복잡한 얼굴이었다. 스태프 제작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유가 뭔지 알 방법은 없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허허, 아주 고생 많았네, 애셔. 그럼 나중에 보세나.”
그렇게 작별을 고한 베르덴이 저택을 나섰다.
붉은 신념 소속 기사의 안내를 따라가자, 성문에 로브를 두른 엘프가 있었다. 그의 로브 안쪽에서 블루와 숲의 정령이 명멸했다.
“형제여, 여깁니다!”
카란스가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방 안에 갇혀 있는 답답한 생활이 끝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베르덴으로선 혼자 움직이는 게 더 편하긴 하지만…….
‘뭐, 괜찮겠지.’
카란스가 말을 잘 듣긴 하니.
그리고 아세른으로 돌아가면 그가 할 역할도 있다. 5위계 궁정 마법사와도 맞붙을 수 있는 가디언 엘프는 결코 짐이 될 수 없었다.
베르덴과 카란스.
그리고 두 마리의 정령이, 페르네가 있는 도시 아세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