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변화 (2)
라이너스는 드워프에게서 기술을 가르침받았다.
시작은 10살 때부터.
예절을 배우지 못했기에 경박했으나, 제작과 관련된 것만큼은 한없이 진지했다.
스승과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온갖 재료들을 보고 다뤄 왔으며, 그 손끝에서 수많은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굳은살이 만연한 투박한 손.
평생을 담금질해 만든, 일종의 자부심이다.
그렇기에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스태프 제작 의뢰라 해 봤자 얼마나 대단한 걸 요구하겠나.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귀족 수준이 최선이겠지.’
목숨값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필요한 건 기술.
물질적인 손해는 전무하다.
스태프 하나 만들어 주면서 후작가에 협조하다 보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입막음당할 걱정은 딱히 하지 않았다.
옛날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에스퍼렌사 후작가는 왕국에서 가장 평판이 높은 귀족이었다고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이곳에 있어야겠지. 자칫 바깥을 싸돌아다니다가 궁정 마법사에게 잡힌다면 진짜로 끝장일 테니.
뭐, 어쨌든.
간단한 빚 갚기다.
……방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쿠당탕.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상당히 큰 소리였지만 라이너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탁상 위에 놓인, 베르덴이 꺼낸 두 재료에 고정되어 있었다.
뇌리에 각인될 정도의 광채.
라이너스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대, 대체 이걸 어디서…….”
원소의 숨결.
고위 속성을 포함한, 모든 원소를 아우르는 무지갯빛의 불꽃.
뜨겁고, 차갑고, 딱딱하며, 무겁고, 따끔하는 등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도 전신의 감각이 저려 온다.
그리고 마력 크리스탈.
아주 극소수의 확률로 자연히 형성되는 특별한 마석.
반투명한 내부는 마치 은하수가 바다에 담겨 일렁이는 듯하며, 스스로 발광하는 푸른빛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가짜가 아니다. 진품이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하나만 해도 경악스러운 물건인데, 둘 다라니.
이만한 재료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세계를 뒤져 봐도 양손에 꼽는다.
라이너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설마 마탑에서 나왔나?”
마탑이라.
‘감이 좋군.’
베르덴이 답했다.
“필요한 질문인가?”
“그건 아니지. 어차피 말해 봤자 속이면 그만이니까. 내가 뭐 뒷조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안 되지.”
10개의 마탑.
그중에서도 네 손가락에 드는 고위 마탑들. 그리고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는, 거대한 국가들이 그 후보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절대 개인이 소유하고 있을 만한 건 아니란 거야. 만약 그랬다면 이미 빼앗겼을 테니까.”
맞는 말이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두 재료를 손에 넣을 수는 없다.
세계의 기준은 힘.
상위 마탑 하나만 나서도 죽음은 확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마탑에서 확보한 걸 역으로 빼앗았다.
마탑주의 마법진을 파훼하고, 공간 이동을 통해 대륙을 이동했다. 그럼에도 범인이 베르덴임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출처가 사라진 귀물(貴物).
누가 뭐래도 온전히 베르덴의 것이다.
“납득이 가는 추측이군.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
“그럼 진짜 이걸 혼자 손에 넣었다고? 출처는?”
“굳이 답해 줄 필요는 못 느끼겠는데.”
베르덴이 단호히 거절했다.
거칠게 턱을 문지른 라이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지. 그래서 이걸로 어떤 스태프를 만들고 싶은데?”
“먼저 ‘오브(Orb)’를 만들고 싶다.”
오브(Orb).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을 조합한, 스태프의 재료. 이러한 조합법을 아는 건 장인 내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라이너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이런 미친……! 설마 그 조합법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하…… 이거 아무리 봐도 마탑에서 나온 거 같은데.”
“가능하겠지?”
“뭐, 나쯤 되면 조합에 실패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스승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기술이기도 하니까.”
스승이라면 드워프를 말하는 건가.
라이너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 팔이 없음에도 전혀 허세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브를 준비했을 정도면 다른 재료도 어느 정도 준비했을 것 같은데. 혹시 있으면 전부 꺼내 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베르덴이 곧장 재료들을 나열했다.
소울 트리의 줄기.
후작에게서 받은 고등 룬 세트.
그리고 방주에게서 받은 스태프, 오큘러스까지.
“……이건 또 뭐여.”
그 가치와 용도를 알아본 라이너스가 눈을 깜빡였다.
* * *
“…….”
라이너스가 말없이 재료들을 살폈다.
소울 트리의 줄기를 깨물어 보기도 하고, 룬 세트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기도 했으며 오큘러스를 이리저리 더듬거나 손가락으로 두들기기도 했다.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베르덴이 차분히 기다리고 있자, 이내 라이너스가 재료들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견적이 얼추 나오긴 하네. 일단 말하겠는데, 이 재료들을 모조리 쓰는 건 불가능해.”
“어째서지?”
“내가 가진 룬 기술이 부족해. 솔직히 말해 스태프에 있는 고등 룬하고 여기 있는 룬 세트를 동시에 새기는 게 가능한 인간은 아마 없을 거야. 명백히 드워프의 영역이지. 이건 다시 집어넣어.”
라이너스가 단언하며 룬 세트를 가리켰다.
룬 세트는 본래 베르덴의 예상에 없던 재료다.
물론 쓰지 못하는 건 아쉽긴 하나 막무가내로 우길 생각은 없었다. 전문가는 어디까지나 라이너스다.
“그럼 나머지는 가능한 건가?”
“처음 보는 재료가 있긴 하지만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해.”
라이너스가 간단히 로드 맵을 제시했다.
오브는 스태프를 이루는 근간.
소울 트리의 줄기는 금속 이상의 내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체적인 수복 기능에다가, 미스릴보다 높은 마력 수용성과 전도율을 갖추기까지. 스태프의 성능을 강화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마지막으로 오큘러스.
그에 새겨진 고등 룬, 충격은 따로 추출한 뒤 다시 새길 것이다. 최상위 금속이 일부 섞인 합금 뼈대는 녹여서 재사용할 것이고.
핵심만 짚은 설명이다.
베르덴은 되묻는 것 없이 쉽게 이해했다.
물론 스태프를 만들려면 이 재료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이너스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문제는 두 가지야. 하나는 오브의 힘을 견딜 수 있는 뼈대가 필요하다는 것. 합금을 사용할 생각인데, 적어도 최상위 금속이 1할 6푼 정도는 함유되어야 할 거야. 그 이하면 오래 못 가고 박살 날 테니까. 이 스태프를 녹이면…… 음, 넉넉히 1할 정도는 따로 확보해 둬야겠지.”
“다른 하나는?”
“나머지는 당연히 환경이지. 재료가 있어도 최상위 금속을 담금질할 수 있는 대장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니. 외팔이인 내가 쓸 전용 장비도 마련해야 하고.”
라이너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 두 개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전적으로 의뢰인이 책임질 것들이지. 아마 마련하기가 상당히 어려울걸?”
확실히 그렇다.
최상위 금속는 매우 값비싼 데다가, 돈이 있어도 입수하기 어렵다.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대장간을 확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곧 준비하지.”
“……곧?”
의미심장한 말에 라이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르덴이 앞에 놓인 물로 목을 축였다.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느낌은 좋다.
직감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최고급 재료. 그에 걸맞은 대장간.’
한 국가의 최고위 귀족이라면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 에스퍼렌사 후작가라면.
* * *
이틀 뒤, 에스퍼렌사 후작의 집무실.
얼음이 가득한 음료를 앞에 둔 두 사람이 서로 대면하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후작이 베르덴이 준 재료 목록들을 주욱 훑었다.
“그러니까 스태프를 하나 만들 생각인데, 대장간과 여기 써 있는 재료들을 지원해 달라는 건가? 실험실 건에 대한 보수로써?”
“그렇습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종이를 탁상에 내려놨다.
“안 돼.”
여지없는 거절이었다.
“네 역할이 매우 컸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보수를 줄 용의도 있지. 하지만 네가 요구한 건 허용 범위를 분명히 벗어났다.”
베르덴이 바라는 설비와 재료는 갖춰져 있다.
그러나 그 가치는 보수로 줄 만한 게 아니다. 후작의 거절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뭐, 당연한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베르덴 본인이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이미 예상한 바다.
그럼에도 여길 찾아온 건 설득할 방법이 있다는 뜻.
베르덴이 공간가방을 개방했다.
“그럼 이거라면 어떻습니까.”
탁.
고대에 사용하던 동전이 앞에 놓였다. 베르덴이 암상인 클란드와 함께 1왕자의 성에 잠입하기 전, 선불로 받은 의뢰의 보수였다.
당시의 후작은 이렇게 말했다.
───후작가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걸 보여라. 그럼 줄 것이다. 그게 돈이든 무엇이든.
“그 힘이란 것에 제가 요구한 것 또한 포함되는 겁니까?”
“…….”
후작이 동전을 바라봤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설마 이걸 여기에 쓸 줄이야.’
본래 생각한 쓰임새는 이게 아니었다.
베르덴은 뛰어난 마법사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평민. 후에 곤란한 일이 생겨, 후작가의 권위가 필요할 때 쓰라고 준 용도였다.
그걸 스태프 제작에 쓰겠다고 내놓다니.
그것도 다름 아닌 최상위 금속을 얻기 위해서. 이건 후작 혼자 결정할 게 아니라, 가신들과 함께 회의를 거쳐야 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이미 돈이든 무엇이든 줄 거라고 확언을 했으니까. 후작은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는 위인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후작이 동전을 집어 들었다.
“……받아들이지.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가신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각하.”
베르덴이 고개를 숙였다.
승낙할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오늘따라 얄미운 태도에 에스퍼렌사 후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보수 건은 이걸로 마치지. 다음으로는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부탁.
보수가 없는 의뢰.
그게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카란스의 처우에 대한 겁니까?”
“그렇다. 가능하면 엘프의 고향인 대수림으로 보내고 싶지만 여의치가 않다. 거리가 멀어 데려다줄 수도 없는 데다가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상당히 불쾌한 듯 보이고.”
후작이 음료로 목을 적셨다.
“나로서는 꽤나 곤란할 지경이다. 저 엘프가 날뛰면 여러모로 피해가 클 테니까. 하나 그렇다고 해서 구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근데 에드몬에게 듣자 하니, 너를 형제로 여기고 있다고 하던데.”
“제가 통제하길 바리시는 겁니까.”
“정확히 말해 ‘책임자’를 맡아 줬으면 좋겠군.”
잠시 고민했다.
카란스의 관리라.
생각해 보면 베르덴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건 내가 양보해야겠군.’
베르덴은 후작에게 큰 호의를 받았다.
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가치로 환산하기 어렵다.
“알겠습니다. 다만 먼저 카란스의 생각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엘프에 대한 건 너에게 맡기지.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서로의 용건은 끝났다.
베르덴이 집무실을 나가자, 후작이 고대 동전을 들었다.
황금빛이 눈동자에 비쳤다.
“비싸게 먹혔군.”
후작가의 곳간이 털렸다.
그래도 엘프는 해결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이내 후작은 잡념을 지웠다.
이미 끝난 일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은 없다.
바로 내일이, 그녀를 만날 시간이니.
준비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각오 또한.
* * *
에스리티아 왕성.
넑고 긴 복도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휠체어에 앉은 여인.
바깥에서 들어온 햇빛에 반사된 백금발의 머리칼은 눈이 부시게 찬란했다. 잡티 하나 없는 외모는 고귀함의 상징 그 자체.
왕성에서도 가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툭.
바퀴가 걸려 여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본래라면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야 했다. 여인은 그럴 만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어머, 미안해라.”
하지만 하녀는 무시한 채 앞을 향해 걸었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 싶으면 대놓고 휠체어를 난폭하게 이끌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고귀한 여인을 보며 비웃음을 드러냈다.
처형당해도 할 말 없는 모욕.
그럼에도 하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듣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테니까. 이지를 상실한 지 오래인 여인은 보잘것없는 하녀에게도 무시받을 정도로 무력했다.
마치 인형처럼.
왕가의 탑.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감옥과 같은 공간.
하녀는 그런 곳에 여인을 밀어 넣었다.
휙 하고 밀어 버린 휠체어가 굴러 방 한가운데 멈췄다. 물건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하녀는 희열을 느꼈다.
왕가를 우습게 여기는 건 멈출 수 없는 쾌락이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하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키득키득. 조소가 가득한 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빛을 잃은 여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방에 만연한 어둠을 지나자 빛이 나타났다.
광활한 어둠 속에 놓인 정원.
이곳은 여인이 지배하는 꿈속이다.
정원의 중심에 한 사내가 있었다.
그가 여인을 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벤 드 에스퍼렌사 후작이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 1왕녀님을 뵙습니다.”
백금의 눈동자.
무감정한 시선이 후작을 굽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