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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06화 (206/366)
  • 206화 변화 (1)

    에스퍼렌사 후작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긴장과 혼란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은 한껏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뭔가를 인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전에 없는 격한 반응.

    그의 최측근인 에드몬조차 당황을 금치 못했다.

    “가, 각하? 갑자기 왜…….”

    “설마……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각하?”

    후작이 연신 중얼거렸다.

    주위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에드몬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에드몬이 마력을 방출하며 소리쳤다.

    “루벤 각하!”

    ……!

    풍압이 한차례 회의실을 휩쓸었다.

    거센 바람은 아니었으나 자극으로는 충분했다.

    쿠웅!

    붉은 신념의 기사 두 명이 난입해 회의실을 살폈다.

    에드몬의 마력을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중에 위험 요소는 하나뿐. 날이 시퍼런 검이 라이너스를 겨냥할 찰나, 정신을 차린 에스퍼렌사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난잡해진 분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에드몬이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아…….”

    “저, 제가 혹시 뭔가 잘못이라도…….”

    “아니…… 아니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진 것 같군. 추태를 보였다. 너희들은 나가 보도록.”

    “예, 각하.”

    예를 취한 기사들이 문을 닫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후작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었다.

    붉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는 다시 착석했다. 그런 후작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했다.

    고개가 앞으로 향했다.

    “잠시 이야기가 끊겼군. 다시 이어 가도록 하지.”

    “아, 넵.”

    “그 푸른 수정에 대해서…… 더 알고 있는 건 없나? 아주 자그만한 단서라도 좋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레오닐이 정제된 마력을 푸른 수정에 집약시키고 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 궁정 마법사를 데려와도 제 대답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겁니다.”

    궁정 마법사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다.

    레오닐과 왕가가 무슨 목적으로 실험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훗날 실험이 끝나 궁금증이 해결될 날을 기대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

    천칭의 반응은 진실.

    후작이 표정을 미약하게 찡그렸다.

    실험 과정은 자세히 알아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게 감춰져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군. 그런데 레오닐이 실험실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는 건, 그 실험이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겠지?”

    “그……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의미지?”

    “레오닐이 실험체로 삼은 건 엘프와 인간입니다. 엘프는 아티팩트로 마력 저항력을 파괴한 뒤, 집광기를 이용해 정제된 마력을 추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카란스의 기억을 본 베르덴에게 전해 들었으니.

    후작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인간은 다르게 사용되었다는 건가?”

    “특이 형질을 보유한 인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적어도 제가 만든 마법 물품에 이용된 적은 없습니다, 각하.”

    “다시 말해, 엘프와 인간의 실험이 따로 분리되었다는 거군. 어쩌면 푸른 수정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실험실의 폐기.

    그것이 반드시 실험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음 단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실험실이 불필요해 처분하려 했을 경우의 수는 배제할 수 없다. 이유는 자그마한 단서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서.

    ‘실제로 애셔가 실마리를 잡아 추적을 하기도 했으니…….’

    만약 몇 시간만 늦었다면 레오닐의 뜻대로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과한 추측은 아니었다.

    “그럼…….”

    ……후작이 질문을 이어 갔다.

    진실의 천칭이 가진 효과는 어디까지나 참, 거짓에 따른 처벌뿐.

    라이너스 본인이 정보라고 자각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보다 국소적으로 세세하게 기억을 끄집어냈다.

    ‘다만 이렇다 할 큰 성과는 없군.’

    몇 시간째 이어진 심문.

    후작은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흠, 지금으로선 달리 물을 게 떠오르지가 않는군.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너 역시 꽤나 지치기도 했을 테니.”

    “……배려 감사합니다.”

    “후에 궁금한 게 있다면 다시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다. 방을 배정해 줄 테니 일단은 여기서 지내도록.”

    후작이 축객령을 내렸다.

    깊게 허리를 숙인 라이너스가 밖을 나서자, 사용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를 뒤따랐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회의실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천칭의 여인상에서 명멸하던 빛이 어느새 꺼져 있었다.

    “허허, 설마 천칭이 한 번도 반응하지 않을 줄이야. 전부 진실만을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협조적이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실의 천칭을 아끼는 건데 말입니다. 그런데…….”

    에드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푸른 수정. 그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 * *

    “…….”

    후작이 침묵했다.

    깍지 낀 손.

    잠시간 아래를 바라보던 후작이 나지막이 말했다.

    “확실치 않아 뭐라 말하기가 어렵군.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대화를 하는 게 좋겠어. 좀 더 분명한 근거가 생기면 말해 주도록 하지.”

    숨기는 게 있다.

    에드몬에게 훤히 보였다.

    “알겠습니다, 각하.”

    하지만 되묻지 않았다.

    둘의 관계는 충성과 신뢰로 이루어져 있으니.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애셔와의 면담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엘프는…….”

    의뢰에 따른 보수.

    그리고 엘프의 처우 또한 해결해야 한다. 둘 다 오래 방치할 만한 건 아니었다.

    후작이 눈가를 문질렀다.

    “근시일로 미루지. 오늘은 피곤하니, 혼자 쉬고 싶군.”

    “예, 각하. 아, 그런데 애셔에게서 요청이 하나 있었습니다. 라이너스와 독대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외팔이 장인과 독대?

    ‘매직 아이템 제작이라도 요청하려는 건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는 후작가에서 있어서 귀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후작가의 본가라고 한들, 어느 정도의 자유는 보장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후작이 곧장 승인했다.

    “허락하지.”

    “애셔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 테니, 푹 쉬시길.”

    벌컥.

    에드몬이 밖으로 나섰다.

    회의실을 지키던 기사들 또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쉬고 싶다는 후작의 말을 따른 것이다.

    …….

    주변의 기척이 사라졌다.

    입을 다물고 있던 후작이 눈을 감았다.

    심장박동. 정제된 마력. 푸른색.

    푸른 수정이 가진 특성을 머릿속으로 나열했다.

    후작의 기억에는 전혀 잡히는 게 없다.

    그러나 다른 이의 것이라면 다르다.

    ‘그녀’의 기억에서 얻은 정보라면 짐작 가는 게 있다. 에드몬은 접하지 못하는 그 꿈속.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애써 불안을 지울 수 없다.

    최악의 추측이 현실로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 그런 마음 한편에서는 설마라는 안도감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미친 왕이라면 가능하다.’

    에스티리아 왕은 미쳤다.

    무능한 왕이 강력한 힘에 취해 그릇에 맞지 않는 영광을 담으려 한다. 그 광기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설령 사랑했던 ‘가족’이라고 해도.

    ‘말해야 한다.’

    사흘 뒤, 그녀와 꿈속에서 만날 시간이 찾아온다.

    그 안에서 후작이 얻은 정보를 전부 보고해야 한다. 푸른 수정의 정체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두렵다.’

    푸른 수정.

    그걸 듣고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왕가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다시 억누를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나에게 그런 자격 따윈 없지만.’

    후작이 자조했다.

    잘게 떨리는 손. 시계 초침 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부디 지금이 계속되길…….

    후작은 간절히 기도했다.

    * * *

    “후우, 역시 후작가라 그런지 음식의 질이 다르구만.”

    라이너스가 배를 두들기며 침대에 누웠다.

    포만감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의식을 놓으려 한다면 골아떨어질 자신이 있었다.

    턱이 뻐근한 것만 빼면.

    “젠장, 몇 시간 내내 설명만 했더니 아직도 입이 아프네. 이래서 사람은 말을 적게 하고 살아야 하는데, 빌어먹을 놈들에게 잡혀 가지고는…….”

    라이너스가 한손으로 턱관절을 문질렀다.

    본래 그는 성정이 난폭한 인간이다

    팔을 잃기 전에는 상대가 누구든 막 나가는 게 기본이었다.

    장인 특유의 자존심. 백금 등급 모험가라는 신분도 있었으니 귀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목숨에 초연한 것도 한몫했다.

    ‘오른팔이 없는 지금은 아니지만.’

    죽는 게 무섭다.

    왜냐하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걸 이루지 못하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존심을 버렸다.

    목숨을 위해서라면 선뜻 무릎을 꿇었다. 생전 해 본 적 없는 존대도 배워 귀족을 공손히 대했다. 그렇게 라이너스는 살아남았다.

    “참 좆같은 인생이야.”

    과거를 떠올리니 없어진 팔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환각통이었다.

    “에라이, 있어도 지랄, 없어도 지랄이네.”

    라이너스가 표정을 구겼다.

    우악스러운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어루만지자 고통이 가라앉았다. 그 탓일까.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며 눈꺼풀이 스스륵 감겼다.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발 누구야.’

    침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설마 실험에 대해서 다시 물어보려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누구시오?”

    거칠게 문을 열었다.

    피곤하다는 얼굴을 추켜들었다.

    ‘응?’

    그런데 그 앞에는 예상 못 한 인물이 있었다.

    베르덴.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대화 좀 하고 싶은데.”

    “대화? 지금은 졸린데…….”

    “잠깐이면 된다.”

    잠깐이라.

    라이너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용건부터 듣고 싶은데.”

    “제작을 의뢰하러 왔다.”

    * * *

    라이너스와 베르덴이 마주 앉았다.

    냉수를 벌컥 들이켠 외팔이 장인이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하핫, 제작 의뢰라니.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보는데. 그 이름이…… 애셔라고 했나?”

    “그래.”

    라이너스가 베르덴의 얼굴을 응시했다.

    “흠, 끽해야 30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궁정 마법사를 쳐 죽일 정도의 괴물이라는 건가. 나도 내 분야에서는 천재인데, 말로만 듣던 천재 마법사는 얼굴부터가 다르구만. 아주 마음에 들어.”

    베르덴은 생명의 은인이다.

    그것도 궁정 마법사를 압살하고 공간 이동조차 막아 낸 마법사. 심지어 고객이기도 하다.

    라이너스는 아주 호의가 넘쳤다.

    “그래서. 뭘 제작하고 싶은 거지?”

    “스태프다.”

    “스태프…… 하필 스태프라…….”

    라이너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뭐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반응이 좋지 않다. 느껴지는 바론 매우 부정적이다.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지?”

    “아,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말이야. 사실 스태프 만들어 주다가 이 오른팔을 잃어버리게 된 거거든.”

    “……사고인가?”

    “사고면 다행이지. 그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가 입막음하겠다고 아주 지랄 발광을…… 아, 이건 해 줄 얘기가 아니군. 크흠.”

    라이너스가 헛기침을 했다.

    “혹시 예언가에 대해 들어 봤나?”

    예언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있다. 공국에서 두 번이나 마주친, 천진난만한 어린 손녀와 카드로 점을 치던 늙은 노인.

    “사실 꽤 옛날에 내가 예언가라는 늙은이를 만났는데, 카드를 몇 개 뽑더니 마법사하고 잘못 엮이면 처참하게 살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때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꺼지라고 했거든?”

    그런데.

    “시발, 그게 저주였는지, 내가 마법사하고 엮이면 대부분 끝이 아주 개 같았어. 이 오른팔…… 도 잃고. 최근에는 궁정 마법사에게 잡혀서 짐승처럼 살기도 했지. 이러니 내가 마법사를 싫어하지 않을 수가 있나.”

    라이너스가 진심으로 몸서리쳤다.

    마법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분노와 짜증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의뢰 거절인 건가.’

    베르덴은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솔직히 말해 거절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그에 대한 회유책 또한.

    ‘그런데 마법사에 대한 순수한 증오라.’

    이건 예상 못 했다.

    저 마음을 돌리려면 다른 설득이 필요하다.

    베르덴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대책을 모색했다.

    그때, 라이너스가 웃었다.

    “이봐, 애셔. 근데 내가 마법사보다 더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

    “바로 누가 내 인생에 훈수 두며 참견하는 거야. 스승님 말도 안 들었는데, 뭣도 모르는 예언가 말은 듣겠냐고. 게다가 이 빌어먹을 인생, 더 망해 봤자 얼마나 망하겠어? 그리고 나는 원한은 10배로, 은혜는 그대로 갚는 게 신조다.”

    “그럼…….”

    “그래.”

    라이너스가 손을 내밀었다.

    “의뢰는 받아 주지. 목숨값이니 인건비도 받지 않겠어. 물론 제작에 필요한 재료는 전부 의뢰인 쪽에서 마련하기로. 어때?”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고맙군.”

    서로 악수를 나눴다.

    더할 나위 없는 승낙이었다.

    “그나저나 어떤 스태프를 원하지? 도면이나 재료 같은 거 있으면 좀 보고 싶은데.”

    재료는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베르덴이 공간 가방을 개방했다.

    잠시 안을 뒤적거리자 휘황찬란한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무지개 불꽃이 담긴 돌. 원소의 숨결.

    그리고 압도적인 푸른 광채를 띄는 마력 크리스털.

    마탑의 보물고에서 가져온 마지막 재료들.

    라이너스가 숨을 삼켰다.

    그의 두 눈이 감탄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런 시발,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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