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05화 (205/366)
  • 205화 복귀 (2)

    베르덴의 신경은 특히나 예민하다.

    상대를 믿되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것만큼이나. 뇌리에 강력하게 박힌 기억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더해서 룬의 반지로 강화된 감각.

    그 덕분에 베르덴의 경계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마력을 깨우치지 않은 자라고 해도, 상대가 가진 위험성을 어느 정도 가늠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아주 정확한 건 아니다.

    더군다나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에 한해서일 뿐이다. 하나 이후로 만났던 상대 중 베르덴의 예측 범위를 크게 벗어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건 마도사 에드몬 또한 마찬가지.

    ‘멜자르드.’

    베르덴의 시선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갈무리된 기세, 정제된 호흡.

    목소리와 태도는 기사의 것과 비슷하다.

    발끝에 미세하게 실린 체중은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로브 안쪽에 검이 숨겨져 있다면, 베르덴이 앉아 있는 식탁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베어 버릴 터.

    그렇게 생각될 만한 사내였다.

    ‘에드몬에 버금가는 기사라.’

    후작가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겠지.

    베르덴이 과일 음료를 머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몬이 멜자르드를 소개했다.

    “흠흠, 이 친구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최고 기사단, 붉은 십자가를 이끄는 멜자르드 기사단장일세. 왕가를 수호하는 근위기사단의 단장도 한 수 접는, 후작 각하께서 나만큼이나 신임하는 사내지. 나이도 젊은 편이고 말이야.”

    “그렇게 띄워 주셔도 제 휴가가 날아간 건 변하지 않습니다.”

    “허허, 나는 그저 사실만 말했을 뿐이네.”

    에드몬이 어깨를 들썩였다.

    능청스러운 태도에 멜자르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사고 뭐고, 나이 지긋한 노인이 웃으며 말하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에드몬 님께서 이렇게 독단적으로 움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옛날이면 몰라도, 최근 20년간은 조용히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후작가와 관련된 건 전부 각하의 명 아래에 이뤄지고 있으니, 딱히 내가 주관을 내세울 필요가 없으니……. 그보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들었나?”

    “자세히는 아니나 필요한 정보는 숙지하고 있습니다.”

    멜자르드의 고개를 돌렸다.

    남색 눈동자와 마주친 라이너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랍스터를 천천히 그릇 위에 올려 두었다.

    “……설마 며칠 사이에 성과를 얻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서 느긋하게 있지는 않았겠지.”

    “문제는 없는 겁니까?”

    “추적은 완전히 끊었네. 힘겹게 구해 낸 저 친구가 흔적을 남길 일도 없고. 그러니 너무 의심스럽게 쳐다보지는 말게. 아직 식사 중일세.”

    “알겠습니다.”

    수긍한 멜자르드가 시선을 거두었다.

    의심과 걱정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다. 어차피 에드몬의 눈을 속일 정도의 무언가가 있다면 멜자르드 또한 알아차리기 어려울 테니.

    대놓고 경계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멜자르드가 팔짱을 꼈다.

    로브 아래로 범상치 않은 무장이 드러났다.

    “자칫 레오닐과 적대할 수도 있다기에 특별히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제가 나설 일은 없는 것 같군요. 이거 참 다행이라 할지…….”

    “마주칠 뻔하긴 했네. 뭐, 결과적으로 궁정 마법사 세 명으로 끝났지만 말일세.”

    “세 명 말입니까?”

    “레오닐의 실험과 관련된 모든 걸 폐기하던 중이더군. 죄다 5위계 이상의 마법사였는데, 둘은 모르겠으나 그중 하나는 제4석차 브릭 메드워였네.”

    브릭 메드워.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과거 왕성에 방문했을 때 왕가의 호위를 맡았던 궁정 마법사임이 틀림없었다.

    “레오닐만큼은 아니지만 거물이군요. 한데…….”

    멜자르드가 에드몬의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멀쩡하시군요. 아무리 마도사가 아니라고 한들, 5위계 상위에 이른 자까지 있었는데 상처 하나 없으시다니. 갑자기 6위계에 다다르기라도 하신 겁니까?”

    “허허허!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알다시피 나는 이미 한계 위계에 도달했네. 내 재능으로는 결코 그 위를 넘볼 수 없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움직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에드몬이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본인 외에도 엘프와 마법사를 데리고 아크리엔으로 향하겠다고.

    엘프야 본 적도 없기에 봐도 모르겠지만, 그중 마법사의 이름은 최근 후작가 내부에서 흔히 들려오고 있었다.

    ‘애셔.’

    벽안과 마주쳤다.

    베르덴과 멜자르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나눴다. 간단하지만 분명했다.

    ‘부풀려진 소문은 아니라는 건가.’

    깊이를 알 수 없다.

    멜자르드가 본 베르덴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엘프는…….

    “형제여, 음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 걸 나눠 드리겠습니다.”

    “네가 먹어라.”

    “……! 감사합니다, 형제여.”

    카란스는 음식에 몰두했다.

    처음이야 경계했으나 적이 아님을 확인한 지금, 외부인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멜자르드는 그렇게 면면을 파악했다.

    그와 더해서 짧게나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기도 했으니, 더 이상 아크리엔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었다.

    “밀입국은 이미 손을 써 뒀습니다. 국경을 통과한 후 인근 숲에 준비해 둔 상단의 이동에 합류해 행적을 감추고, 도시에 들러 펠토르 백작가의 이름을, 그리고 라인즈에서는 후작가의 이름을 써서 각하의 자택으로 이동하게 될 예정입니다.”

    “허허, 그 정도면 궁정 마법사라고 해도 쫓지 못할 게 분명하군. 애초에 있지도 않은 단서를 찾을 수 있다면 말이야. 준비하느라 고생했네. 출발은 언젠가?”

    “오늘 밤이라도 가능합니다.”

    “밤이라…… 그래, 아예 눈치채기 전에 국경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안전하겠지.”

    “그럼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휴식은 가면서 취하면 된다.

    여관비가 아깝지만 선택지는 없다. 배도 채웠겠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앗! 엘프, 내 랍스터를!”

    “음? 뭐 잘못됐나?”

    “잠깐 내려놓은 건데 어떻게 그걸 홀라당 집어 갈 수 있지?! 그것도 직접 봤으면서!”

    “놓았다는 건 소유권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 역시 인간이란 탐욕스럽기 그지없군. 음식을 선뜻 나눠 주는 형제를 본받아라.”

    “아니, 양보고 자시고…….”

    카란스와 라이너스가 음식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그토록 먹어 놓고도 아직 배가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드몬이 허허 웃으며 턱을 긁었다.

    “끼니까지 거를 정도로 급하진 않으니, 식사는 마저 하는 게 좋겠군. 음식을 더 주문할 테니 자네도 앉게. 아직 밥을 먹지 못한 것 같은데.”

    “음, 그렇긴 한데…… 알겠습니다.”

    에드몬과 멜자르드가 자리를 잡았다.

    졸지에 베르덴만 일어나 있는 형국이었다.

    “아, 애셔. 옆에 있는 호출기 좀 눌러 주지 않겠나?”

    “……예.”

    호출기는 벽면에 있다.

    베르덴은 그대로 호출기를 누른 뒤 다시 착석했다.

    두 번째 식사가 이어졌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

    베르덴 일행은 멜자르드를 따라 아크리엔을 빠져나갔다. 그 방향은 일반적인 가도가 아닌, 여러 산맥 너머에 있는 국경.

    며칠간의 여로 끝에 1차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직 조용한 걸 보니, 레오닐이 실험실에 도착하지 못했나 보군.’

    하기야 빛이 들지 않는 동굴 한가운데로 이동했으니.

    아인종이나 이형종은 둘째 치고, 지형을 파악해 탈출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렇게 무사히 왕국에 밀입국했다.

    이어 미리 작업을 해 둔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여러 차례 흔적을 비틀어 끊어 냈다.

    도중에 귀찮은 일 한 번 없이 순조롭게 나아간 결과, 라인즈를 나선 베르덴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여기가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본가인가.’

    넓은 영토 위에 세워진 성과 정원.

    붉은 신념 기사단이 직접 수호하는 이곳은 매우 삼엄했다. 1왕자의 성과 비교하자면, 기능적인 면은 부족하나 무력적인 부분에서만큼은 그 윗줄이었다.

    에드몬이 말했다.

    “나는 이 친구를 데리고 먼저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네. 그러니 자네들은 정령들을 데리고 방에서 편히 휴식을 취하고 계시게. 나중에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겠네.”

    “인간 마법사, 감히 엘프를 가둘 셈이냐?”

    “카란스.”

    “……알겠습니다, 형제여.”

    카란스는 못마땅했지만 곧 수긍했다.

    목숨을 구해 주고 동족의 복수까지 하게 해 준, 더해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베르덴의 말은 법이나 다름없었다.

    에드몬이 속삭였다.

    “난동 부리지 않게 잘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다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후에 라이너스와 독대하게 해 주시면 됩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자네는 저 친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았지. 알겠네. 각하께 말씀드리고 후에 문제가 없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인 베르덴.

    그는 카란스와 두 정령을 데리고, 기사들의 안내 및 감시 아래 복도를 거닐었다. 그들의 모습을 일별한 에드몬이 라이너스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음, 궁정 마법사 말고 귀족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좀 긴장되는구려.”

    “허허, 적당한 긴장은 몸과 정신에 이로운 법이지. 물론 명심하게, 어떤 이유로는 거짓을 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일세.”

    “걱정 마시오, 내가 겪은 그대로 말씀을 드릴 테니. 나는 원한은 10배로, 은혜는 그대로 갚는 사람이오.”

    라이너스가 장담했다.

    에드몬이 부드럽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자 후작이 홀로 상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몬이 예를 갖췄고, 라이너스가 그 뒤를 따랐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각하.”

    “수고했다, 에드몬.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겠지. 일단 앉아라.”

    “예.”

    두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에드몬은 후작의 근처에, 그리고 라이너스는 정확히 정면에. 에스퍼렌사 가문, 그 특유의 붉은 눈동자가 옅게 빛났다.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 본인이 맞나?”

    “그렇습니다, 각하.”

    “나는 너에게 궁금한 게 많다. 어째서 7년 전 실종되었던 장인이 레오닐의 실험실에서 발견이 되었는지, 그리고 대체 실험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는지…… 전부.”

    에스퍼렌사 후작이 밑에서 천칭을 꺼냈다.

    중심에 박힌 하나의 여인상. 양쪽에 걸린 두 개의 접시는 정확히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후작가의 가보, 진실의 천칭.

    이 앞에서 거짓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을 원한다.”

    후작가의 말에 천칭이 반응했다.

    일종의 시동어.

    천칭에 박힌 여인상의 눈이, 라이너스를 보며 하얗게 명멸했다.

    * * *

    라이너스는 직감했다.

    저 천칭은 아티팩트에 버금가는 물건이라고. 그리고 정황을 보면 상대의 거짓을 간파하는 게 틀림없다.

    ‘말실수도 하면 안 되겠어.’

    다짐한 라이너스가 숨을 골랐다.

    이내 준비가 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7년 전, 암흑가 로아프라에 방문했습니다.”

    목적은 그 해 열릴 경매장에서 희귀 금속이 나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에 관심이 생긴 라이너스는 다행히 쉽게 초대장을 입수해 로아프라의 경매장에 입성했고, 경쟁 입찰을 통해 금속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납치를 당했다.

    너무도 급작스러워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그리고 깨어나 보니 레오닐의 실험실이었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아프라에서 납치라. 게다가 왕가와 연결된 걸 보면 빈테르트가 분명하군.’

    빈테르트도 실험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 정보 하나를 뇌리에 새긴 후작이 물었다.

    “너는 그 실험실에서 뭘 만들었지?”

    “저는 마력 집광기를 비롯한 각종 매직 아이템 제작을 맡았습니다. 도중에 거부했지만…… 열흘 가까이 물만 주고 굶기니 어쩔 수가…… 저에게는 살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애써 변명할 필요 없다. 내가 궁금한 건 사실뿐이다. 놈들은 그걸로 뭘 했지?”

    “그러니까…….”

    엘프와 인간의 마력회로를 이용해 마력을 정제했다.

    그렇게 죽어 나간 시체가 수십 구이며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그리고 이런저런 감옥에서의 일들까지.

    경청하고 있던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레오닐의 목적은?”

    “그게…… 모르겠습니다.”

    “뭐?”

    “저, 정말입니다. 실험실에 있던 궁정 마법사들도 모르고, 오로지 레오닐만이 알고 있습니다. 실험을 진행하는 것도 언제나 레오닐 혼자였습니다.”

    천칭의 여인상은 잠잠했다.

    거짓말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 그런데 심작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푸른 수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딱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본 거지만…… 아마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푸른 수정이라…….”

    에드몬이 보낸, 엘프의 기억 속에도 있었다.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푸른 수정이라니.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었다.

    후작이 생각에 잠겼다.

    ‘푸른 수정…… 심장 소리…… 심장…… 푸른…… 심장…… 심장…….’

    “어……?”

    잠깐.

    ‘심장이라고?’

    “서, 서, 설마……!”

    후작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

    그의 눈동자는 전에 없을 정도로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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