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복귀 (1)
베르덴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튀어오른 불꽃이 브릭의 오른손을 차츰 불태웠다. 느슨해진 공기. 타닥거리는 소리가 고요히 귓가를 맴돌았다.
“형제여, 그 레오닐이라는 인간은 이제 오지 않는 겁니까?”
“그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좌표를 변경했으니 여기서 마주칠 일은 없겠지.”
목소리가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그에 가장 경악한 건 다름 아닌 브릭이었다.
“변경……?”
발동된 공간 좌표 전송은 중단시킬 수 없으며 수정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한 장담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 마법진을 깊게 공부한 궁정 마법사들이 그렇게 확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뭘 어쨌다고?
브릭이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발동 도중에 공간 좌표를 변경하다니,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레오닐은 왜 오지 않는 거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다른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 마법진은 정확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한데 그 틀을 제멋대로 바꾸었다고? 레오닐 각하조차 불가능했던 일을, 너같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브릭의 상한선은 언제나 레오닐이 기준이다.
왕국의 최강자로서 그가 보여 준 위용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들어 보기만 했을 뿐, 본 적조차 없는 초월자보다도 더욱.
적어도 브릭에게는 그러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레오닐이 하지 못한 걸 눈앞의 마법사가 해냈다니.
설령 그것이 편린에 불과할지라도……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베르덴이 답했다.
무감정적인 시선과 함께.
“너는 그렇게 믿어라.”
<어스 클로>
대지의 발톱이 눈동자에 비쳤다.
갑작스러운 일격.
브릭이 즉각적으로 화염구를 몸 아래로 착탄시켰다.
그 덕분에 직격은 피했으나 허벅지가 깊게 베여 나갔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까지.
피가 뜨겁게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고통이 정신을 일깨웠다.
‘……주, 죽는다.’
먼 옛날에 잊었던 공포가 엄습했다.
전신을 휩싸는 소름에 손이 덜덜 떨렸다.
공간 이동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모른다. 이해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레오닐 각하가 없는 상황은 변함이 없다. 마치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라도 된 것만 같다.
‘아니, 내가 여기서 죽을 리 없다!’
이성이 아닌 본능의 영역.
어금니를 깨문 브릭이 마력을 끌어모았다.
<열화광>
몸에서 화염의 빛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불태우며 적의 시야를 일정 시간 빼앗는 마법. 근처에 있던 카란스가 마법에 휩쓸렸다.
직후 브릭이 마법을 연계했다.
눈과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육체에 오는 부담을 무시하고 연산 속도를 과도하게 높였다.
화아아아악!
하나 남은 팔.
그 위로 거대한 불덩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5위계 상위, 집중 마법 <작염구>.
지금처럼 협소한 공간에선 위협적이다.
시전자인 브릭 또한 죽을 수도 있지만, 그건 적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마법으로 여길 탈출한다.’
브릭은 스스로의 생존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를 간과했다.
첫째, 집중 마법의 긴 시전 시간.
상대는 베르덴과 에드몬이다.
마법이 완성되는 걸 잠자코 기다려 줄 리가 없다.
그리고 둘째.
가디언 엘프는 강하다.
콰드드드득!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며 마법이 사라졌다.
“아……?”
브릭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무언가가 몸 밖으로 솟아나 있었다. 흐릿해지는 시야를 부여잡자, 나무뿌리로 뒤덮인 팔이 가슴 중앙을 관통하고 있었다.
“……! ……!!”
목 뒤쪽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폐와 심장이 치명상을 입은 탓일까. 비명은커녕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다리가 힘없이 무너졌다.
어떻게든 시선만을 옆으로 돌렸다.
복수를 이룬 엘프가 안광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시, 실험체 따위가……!’
브릭의 생각은 끝을 맺지 못했다.
벼락을 버금은 바람이 쇄도하며 브릭을 수직으로 관통했다.
정신이 사그라진다.
마력회로를 빠져나오는 마력. 이내 육체 기능이 완전히 정지하며 몸이 피 웅덩이에 잠겼다.
궁정 마법사 제4석차 브릭 메드워, 사망.
빛을 잃은 눈동자에는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 * *
‘미친…….’
라이너스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오랜 시간 그를 감금했던 궁정 마법사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죄다 5위계 이상의 마법사. 모험가로 치면 미스릴 등급의 기준점을 넘는 강자들이 말이다.
‘분명 후작가라고 들은 것 같은데.’
에드몬이라 불린 노년의 마법사.
그는 궁정 마법사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사이가 좋지는 않은 것 같다만…… 말인즉슨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뜻일 터.
‘그런데 대체 왜 날 구하러 온 거지?’
설마…… 다른 실험에 이용하려고?
그게 아니면 왕가와 적대하기라도 하는 건가? 왕국의 귀족이? 게다가 엘프가 왜 이들을 돕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리를 굴려도 마찬가지.
라이너스는 이런 부분에서는 별로 능숙하지 못했다.
‘어쨌든 살았으니 다행이지, 뭐.’
결국 깊게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허허, 모두 고생 많았네.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 자네는 괜찮은가?”
“아, 난 괜찮소. 다행히 육체적인 고문은 당하지 않아서 말이오.”
“음, 확실히 그렇게 보이는군.’
라이너스는 안전하다.
실험실에 있는 궁정 마법사는 전부 사망했고 레오닐 또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
에드몬이 허리를 톡톡 두들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마법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실질적으로 전투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대는 5위계 마법사. 세상의 기준으로도 강자에 속하는 자들이다.
‘나 혼자 상대했다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겠지.’
물론 승패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도중에 실험실이 무너졌을 것이다. 시간도 길어져 공간 좌표가 전송되는 걸 막지도 못했을 테고.
에드몬이 시선을 흘겼다.
상처 하나 없는 베르덴이 서 있었다.
‘제대로 된 실력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상상 이상이로군.’
재능, 노력 게다가 경험까지.
뭐라 콕 짚는 게 무의미할 만큼 전체적으로 남다르다. 어째서 칼리아가 그의 강함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신비하다.
에드몬은 내심 그렇게 평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브릭이 자신 있게 마법진을 밝힌 걸 보면 어지간히 확신이 있었던 건 분명할 텐데 말이야.”
마법진의 틀을 부숴 구조를 변경하는 과정. 그걸 말로써 설명하려면 매우 길어진다.
마탑에서 논문으로 써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니까. 지금 상황에는 불필요한 대답이다.
그러니 요약하자면.
“마법진의 수준이 낮았습니다.”
“공간과 관련된 마법진인 데다가 궁정 마법사가 쓰는 것인데도?”
베르덴이 브릭이었던 것을 가리켰다.
누가 뭐래도 결과가 그를 증명하고 있다.
에드몬이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허허허! 그렇게 말하니 도저히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군. 하긴 이 상황 자체를 자네가 빚은 것이니……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것도 없지.”
궁금하다. 알고 싶다.
에드몬은 그런 호기심을 가볍게 억눌렀다.
한숨도 돌렸겠다, 더 이상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다.
이제 아크리엔으로 돌아갈 차례.
거기서 후작가의 지원을 받아 왕국으로 넘어가면 목적은 달성이다.
그때, 카란스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형제여,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공간 좌표를 변경하셨다고 했는데…… 그럼 레오닐은 어디로 간 겁니까?”
“오, 듣고 보니 그렇군.”
카란스와 에드몬이 귀를 기울였다.
그건 라이너스도 마찬가지. 심지어 블루마저 빛을 반짝이여 관심을 드러냈다. 숲의 정령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모였다.
‘어디로 갔냐라.’
장거리 좌표를 전송하지는 못했다.
거리가 멀수록 좌표를 설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기껏해야 에스티리아 왕국의 어딘가로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꽤 당황스러울 거다.’
베르덴이 작게 미소 지었다.
* * *
공간 이동.
그 특유의 보랏빛 파동이 요동쳤다.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진다.
이내 광활하게 명멸하는 마력의 빛 속에서 한 존재가 나타났다.
레오닐 베르타나스.
시야를 차단한 그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찬란한 형태의 스태프가 바닥을 짚었다.
잠시 후 공간의 변화에 적응한 레오닐이 천천히 눈을 떴다. 메마른 시선이 주위를 비추었다.
정적이 감각을 휘감았다.
레오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분명 브릭이 보내 준 좌표로 이동했다.
당연하게도 해외에 있는 실험실이 나타나야만 했다. 그리고 앞에는 폐기 처분을 담당한 궁정 마법사들이 도열하고 있어야 정상일 텐데.
‘대체 여기가 어디지?’
빛 한 점 없는 공간.
시야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다.
게다가 절로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퀴퀴한 악취까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곧장 후각을 차단했다.
이어 <암시>를 시전해 시야를 밝혔다.
레오닐이 눈썹을 씰룩였다.
“……이형종?”
거기다 아인종까지 보인다.
아니, 아인종, 이형종 따로 구분할 것도 없었다.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대한 벌레들.
그 중심에서 기괴한 형태의 거미가 산성 침을 뚝뚝 흘렸다.
지면에는 스톤 이터가 지나간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저 멀리서 인간 냄새를 맡은 동굴 오우거가 바닥을 쿵쿵 울리며 다가왔다.
이곳은 왕국의 2대 금지 중 하나, 빛이 들지 않는 동굴.
베르덴이 알고 있는 좌표 중에서도 레오닐을 성가시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아무리 6위계 마도사라고 할지언정, 갑자기 깜깜한 동굴 속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닐 테니까.
물론 베르덴에 의해 몇 번이나 토벌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숫자는 다시 채워졌다.
비정상적인 생식력.
그렇기에 이곳은 금지라 불린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수백이 넘는 괴물.
놈들이 일제히 사냥의 눈을 빛내며 레오닐에게 달려들었다.
* * *
라이너스의 구출은 성공했다.
궁정 마법사를 처리하고, 그 흔적마저 전부 지워 버린 덕분에 정체를 들킬 일도 없다. 놈들이 알고 있는 건 라이너스의 인상착의뿐.
베르덴이 가진 기만의 얼굴로 라이너스의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로브를 둘러 오른팔이 없는 걸 감추었고. 누군가 들춰 보지 않는 이상 외팔이라는 걸 들킬 염려는 없을 터.
“하하, 수고하시게.”
에드몬이 경비병에게 돈을 쥐여 주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아크리엔에 입성했다. 오랜만에 도시 냄새를 맡은 라이너스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흡, 사람 냄새가 이렇게 향기로울 줄이야.”
“역겹기만 하다만.”
“허허, 감동 좀 느끼게 좀 내버려 두게.”
잡담을 나누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베르덴 일행이 전에 묵었던 곳과 같은 장소였다. 먼저 음식을 주문하고 전과 동일한 꼭대기 층을 빌렸다.
아늑함이 느껴지는 방.
식탁 위에 호화스러운 요리들이 차려졌다.
라이너스와 카란스가 눈을 빛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음식인지……! 자, 잘 먹겠소!”
“허허, 체하지 않게 천천히 드시게.”
라이너스가 허겁지겁 손을 움직였다.
허기가 심했는지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위기감을 느낀 카란스는 그릇 몇 개를 가지고 베르덴 쪽으로 슬쩍 피신했다.
‘꽤나 난잡한 저녁이군.’
그러던 그때, 문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 똑똑. 똑.
불규칙적인 노크 소리.
식기를 내려놓은 에드몬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았다.
즉, 후작가의 사람이라는 뜻.
문이 열리며 갈색 로브를 두른, 살벌한 기세를 가진 사내가 들어왔다. 그가 에드몬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휴가까지 반납하고 달려왔는데…… 아주 편안해 보이시는군요, 에드몬 님.”
“오, 오느라 고생했네, 멜자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