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03화 (203/366)
  • 203화 각하?

    브릭이 헤리안을 지킨다고 말했다.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경멸만이 느껴지는 선언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들렸는지 몰라도, 적어도 베르덴에게는 그러했다.

    그래서 보란 듯이 헤리안을 없애 버렸다.

    명백한 도발이자 무시.

    이에 브릭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분노에 휘둘리는 일은 없었다.

    브릭이 가볍게 혀를 차며 감정을 털어 냈다.

    “후우, 쯧. 헤리안, 괜찮은 인력을 잃었군. 실력은 다른 궁정 마법사보다 조금 떨어지긴 했어도, 그 이상으로 성실했는데. 이래서야 레오닐 각하를 뵐 면목이 없겠어.”

    쓸 만한 걸 잃었다.

    브릭이 느낀 건 그게 전부였다.

    애초의 그는 타인에게 인생을 바친 마법사다.

    가족은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한들, 그들이 원한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것이다. 브릭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충성과 사명에 초점을 두고 있다.

    헤리안을 포함한 두 명의 궁정 마법사.

    브릭의 밑에서 수년간 지내 왔던 가까운 이의 죽음은, 어떤 슬픔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에스티리아 왕가와 레오닐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 아까울 뿐.

    “그나저나 왕국에서 시선을 거둔지 오래라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뭐, 내 멋대로 부르지. 이봐, 벽안의 마법사. 너는 왕국의 궁정 마법사를 살해했다. 그 손해를 도대체 어떻게 갚을 거지?”

    “지금 손해 따질 때가 아닐 텐데.”

    베르덴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 브릭이란 궁정 마법사가 강하다고 한들, 전력의 차이는 명백하다.

    가디언 엘프, 카란스.

    5위계 상위의 마도사, 에드몬.

    베르덴과 그의 마력을 받은 블루까지. 전투가 벌어진다면 접전은커녕 사냥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은 브릭 또한 잘 알고 있을 터.

    ‘그런데 태연하다.’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저 손과 관련된 건가.’

    베르덴의 시선이 브릭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흰색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 안쪽에서 비정상적인 마력량이 감지된다. 단순히 마법을 준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브릭이 입가를 비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도 내가 위축되지 않는가 궁금한 거겠지. 뭐, 사실 딱히 숨길 생각도 이유도 없다.”

    브릭이 보란 듯이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 이식된 검은 물체. 그 위로는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베르덴은 그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공간 좌표계인가.”

    “호오, 생각 이상으로 유식하군. 그래, 맞다. 이건 말 그대로 레오닐 각하의 신호를 받아 입력된 공간의 좌표를 전달하는 매직 아이템. 일종의 발신기이자 수신기라고 할 수 있지.”

    “레오닐이라고?!”

    라이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 설마 그 레오닐이 여기에 온다는 뜻은…….”

    “이미 이곳의 좌표를 설정해 작동시켜 놨다. 곧 레오닐 각하께서 신호를 보내시면 공간 이동진이 발생할 테지. 예정된 시간까지…… 대략 10분 정도 남았군.”

    브릭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당연하게도 너희들이 막을 방법은 없다. 설령 나를 죽인다고 해도, 이 손등을 짓이겨 부순다고 해도 말이다. 한번 발동된 좌표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되돌릴 수 없으니까. 이미 결말이 정해진 셈이지.”

    “허허, 어쩐지 혼자 나선다 싶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먼그래. 얍삽하기로는 궁정 마법사의 단장급이로구만.”

    “쓰레기 인간.”

    “……오늘따라 심한 말을 많이 듣는군. 뭐, 곧 죽게 될 테니 얼마든지 들어 주도록 하마. 흑마법사가 아닌 자들의 저주 따위는 하등 두려울 게 없으니까. 언데드가 되어서 찾아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 그 전에 너에게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브릭이 베르덴에게 초점을 향했다.

    “벽안의 마법사, 네 재능은 썩 훌륭해 보인다. 앞서 죽어 버린 궁정 마법사들보다 훨씬. 그러니 궁정 마법사단에 들어와라.”

    “…….”

    “너에게는 아주 유익한 제안일 거다. 레오닐 각하께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것보단 궁정 마법사로 귀의하는 것이 당연히 더 나으니까. 심지어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권력 또한 가지게 될 텐데. 암, 거절할 이유가 없지. 물론 조건은 있다.”

    브릭이 에드몬을 가리켰다.

    “네 마법으로 직접 저들을 처단해라. 그렇게 하면 내 직접 각하께 건의해 한자리 내주도록 하지.”

    에드몬의 힘은 몹시 탐이 난다.

    ‘하지만 그는 후작가의 충신.’

    회유를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 여기서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나머지 엘프나 정령 그리고 장인은 별 쓸모가 없으니 덤으로 같이 처분해 버리고.

    “에드몬 로드리너, 이제 앞날이 창창한 젊은 마법사가 살려고 발버둥을 칠 텐데, 설마 추하게 저항할 생각은 아니겠지?”

    “……못 본 사이에 잔머리가 많이 늘었군, 브릭.”

    “별말씀을.”

    브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얄밉기 짝이 없었다. 에드몬이 눈살을 찌푸리며 베르덴에게 속삭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방법은 하나뿐이네. 최단 시간으로 브릭을 죽이고,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멀리 떨어질 수밖에. 그래도 발각되지 않을 확률이 매우 희박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이게 유일하네.”

    “…….”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갑자기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계속 아무런 말도 없으니, 에드몬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르덴은 주변의 반응을 무시했다.

    그의 시선은 줄곧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브릭의 손등에 맺힌 마법진을 향해.

    공간과 관련된 마법진은 하나같이 최고난도.

    베르덴이라고 해도 구조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 해도 그 속도는 남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

    이윽고 공간 좌표의 분석이 끝났다.

    집중을 푼 베르덴이 눈동자를 옆으로 향했다.

    “에드몬 님.”

    “엇, 설마 나를…….”

    “대책이 있습니다.”

    대책?

    “그, 그게 뭔가? 아니, 내가 뭘 하면 되지?”

    베르덴이 브릭의 팔을 가리켰다.

    “저 오른손을 잘라 주시겠습니까.”

    * * *

    베르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한순간에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브릭은 섬짓함을 느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윈드 엣지>

    바람의 칼날이 날아왔다.

    음속을 넘어서는 속도와 섬뜩한 예리함. 마법으로 막아 내기엔 늦었다. 궤적을 읽은 브릭이 격하게 몸을 비틀었다.

    촤아악!

    찢긴 로브에서 피가 튀었다.

    “이런, 얕았나. 확실히 실력이 늘긴 늘었군.”

    “이게 무슨 짓이지? 벽안의 마법사, 설마 내 제안을 거절할 셈이냐? 무의미하게 죽임을 당할 걸 알면서도?”

    “형제에게 말 걸지 마라, 쓰레기.”

    카란스가 재빠르가 돌진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각을 노리는 움직임은 마법사의 눈으로 좇기 어려웠다. 투사체 형태의 마법은 적합하지 않다.

    쿠웅!

    브릭이 스태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볼케이노>

    끓어오른 용암이 지면에 가득 흘러내렸다.

    디딤발이 없어진 카란스가 침을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거리를 유지하는 건 마법사의 기본적인 상식.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일 뿐이다.

    <볼텍스>

    중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합성 마법. 그를 목격한 브릭이 주춤했다.

    ‘무슨 연산 속도가…….’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휩쓸렸다.

    용암과 함께 나가떨어진 브릭이 충격에 신음했다. 퍼뜩 고개를 들자 나무뿌리로 뒤덮인 화살이 날아왔다.

    “고작 이딴 것에 내가 당할 것 같은가!”

    화아아아악!

    스태프를 휘둘러 불꽃을 흩뿌렸다.

    그 순간 화살의 궤적이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며 브릭의 오론쪽 어깨를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에드몬의 바람 조작.

    “이번에 좀 깊었군.”

    “큭…….”

    “다음은 폭풍에 주의하게.”

    에드몬의 스태프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천장에 달라붙은 카란스는 숲의 정령과 함께 짙은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고, 블루는 브릭의 빈틈을 엿봤다.

    그리고 저 뒤에서는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겨낭하고 있었다.

    브릭이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설마 선심 써서 내놓은 제안을 단칼에 거절당할 줄이야. 정상적인 판단조차 하지 못하는 마법사였다니.

    이건 예상 외였다.

    ‘하나 레오닐 각하께서 오시면 전부 해결될 일.’

    남은 시간은 고작 7분.

    대체 자신의 오른손으로 뭘 어쩌려는지 모르겠으나, 조금만 버티면 이쪽의 승리다.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한 브릭.

    그가 무자비한 폭력을 향해 있는 힘껏 저항했다.

    * * *

    브릭은 최선을 다했다.

    마력, 반응, 전투 방식 등 앞선 헤리안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궁정 마법사 제4석차이자 5위계 상위라는 경지에 어울리는 강자임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상대는 그 이상이었다.

    압축된 바람이 폭발했다.

    그 여파에 내장이 크게 뒤흔들렸다. 기껏 들이마신 공기를 바깥으로 토해 냈다.

    브릭이 입가를 틀어막았다.

    이내 몸을 내던지자 뾰족한 나뭇가지가 허공을 갈랐다.

    ‘가디언 엘프가 이렇게 성가실 줄이야……!’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태워 죽이려고 해도 속도가 빨라 맞히기가 어렵다.

    그리고.

    <연쇄번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화염의 벽으로 충격을 감쇄한 브릭이 입술을 씹었다.

    ‘게다가 전격 속성을 쓰는 정령이라니!’

    저런 건 본 적이 없다.

    하나같이 허용하면 치명적이라 신경이 빠르게 마모되었다. 와이번 무리에게 조롱당하는 오크가 된 듯한 기분이다.

    결국 사냥의 끝이 다가왔다.

    <섬뢰>

    “커억……!!”

    번개가 등을 관통했다.

    작열감을 견디지 못한 브릭이 스태프를 떨궜고, 카란스가 날아와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부러진 치아와 함께 허공에 떠오른 브릭의 몸.

    에드몬이 재빠르게 손을 그었다.

    촤아아악!

    브릭의 오른손이 잘려 나갔다.

    곧장 바람을 일으켜 잘린 손을 베르덴에게 전달했다.

    “끄아아아악……!!”

    절단 부위를 움켜쥔 브릭.

    그가 덜덜 떨며 소리를 내질렀다.

    “네놈들의 끝은 이미 정해졌다! 곧 레오닐 각하께서 오시면 전부 몰살이란 말이다! 지금이라도 자결하는 게 이로울 거다!”

    흰자에 핏발이 가득 섰다.목소리에는 절규에 가까웠다.

    지금의 브릭은 죽기 직전, 저주를 내뱉었던 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덴이 브릭의 오른손을 잡았다.

    곧장 손끝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낸 그가 공간 좌표의 마법진에 침투했다.

    남은 시간은 약 3분.

    ‘하지만 파훼는 불가능하다.’

    구조가 너무도 복잡하다.

    요추만을 찾아 부순다고 해도 족히 30분은 걸릴 터. 그렇기에 베르덴은 파훼가 아닌 바로 구조 그 자체로 목적을 바꾸었다.

    이 마법진에는 두 개의 기능이 존재한다.

    하나는 안전장치, 나머지 하나는 좌표 설정 기능이다.

    전자는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한다.

    돌기둥 안이나 지면 아래로 육체가 이동되는 경우를 말이다. 잘 이용하면 레오닐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다.

    그리고 후자는 좌표 그 자체.

    브릭의 말마따나 임의로 좌표를 수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 틀 자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 선의 이야기.’

    마탑주의 마법진을 파훼한 베르덴.

    그는 마법진의 틀을 부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베르덴은 멈추지 않고 세밀하게 마력의 실을 조절하며, 마법진의 구조 일부를 변경하는 데 집중했다.

    그걸 알 리 없는 브릭이 크게 비웃었다.

    “크하하하! 헛된 희망을 꿈꾸는 게 한심하기 짝이 없군!”

    “닥쳐라.”

    “쿠웁……!”

    카란스가 브릭을 발로 찼다.

    옆구리를 칼로 저미는 고통이었으나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대비해야겠어.’

    레오닐이 온다면 승산이 희박하다는 건 사실.

    베르덴을 믿는 것과 별개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숨 막히는 긴장이 흘렀다.

    어느덧 예정된 때에 가까워지자 마법진에 마력이 크게 일기 시작했다. 곧 좌표가 전송되고 공간 이동의 마법진이 형성될 터.

    각자 마력을 끌어모은 채 상황을 주시했다.

    화아아아악!

    어느새 마력의 빛이 공간을 휘감았다.

    몇 번이나 봐 온 좌표의 전송. 그를 목도한 브릭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레오닐 각하……!!”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이제 공간이 일그러지며 왕국의 최강자가 나타날 차례였다.

    ……그런데 너무도 조용했다.

    제 할 일을 마친 마법진이 이미 사라졌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고 있어야 할 공간은 그저 잠잠했다.

    “가, 가, 각하?”

    브릭의 눈동자에 격한 파문이 일었다.

    베르덴이 브릭의 오른손을 휙 하고 내던졌다.

    “조금 아슬아슬했군”

    공간 좌표 변경,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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