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구출 (1)
에드몬과 카란스 그리고 블루가 잠든 밤.
우연히 잠에서 깬 베르덴이 슬쩍 여관 밖으로 나섰다.
딱히 거창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바람을 쐬고 싶었으니까, 그게 이유였다.
밤이 깊었음에도 아크리엔의 거리는 밝았다.
술에 취한 시민들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녔고, 서로 시비가 붙은 용병들은 구석에서 주먹질을 해 댔다.
아크리엔의 순찰병은 말리기는커녕 다른 구경꾼들처럼 관망하기 일쑤였고.
관광지다운 활기와 무질서였다.
“…….”
베르덴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크리엔의 끝에 있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밧줄에 묶여 정박되어 있는 작은 고깃배들.
큰 배들은 제각기 고용된 용병들이 거의 빈틈없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거기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일렁이는 어둠이 시야에 비쳤다.
‘이게 바다인가.’
마석등의 불빛과 달빛을 머금은 밤바다.
에드몬이 말했던 대로 꽤나 장관이었다. 해산물과 같은 식재료는 익숙하지만 이렇게 바다를 보는 건 처음이다.
마탑에는 온갖 지식이 가득하지만,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으니.
‘그러고 보니 에스티리아 왕국에 온 지도 반년이 넘었군.’
베르덴은 선착장 끄트머리에 앉아 지난날을 떠올렸다.
겨울에서 여름까지.
그동안 꽤나 많은 일을 해냈다.
엘더 리치와의 전투로 5위계에 도달한 것, 흑마도사를 단독으로 꺾은 것과 중력 속성 마법을 깨우친 것 등.
왕국에 온 세 가지 목적 중 하나를 이미 이뤘으며, 나머지 두 개는 현재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달성을 지금 목전에 두고 있었고.
다른 것까지 생각하면 더욱 많다.
참으로 바쁘게 살아왔다.
하지만 당초의 목적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복수.
여정의 종착점이다.
그 끝에 다다르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위계는 둘째 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마도를 이루어야 한다. 5위계에 이르면서 육체는 이미 준비가 되었다.
남은 건 정신적인 문제다.
역천으로 압도적인 재능을 손에 넣었다.
목표는 흔들린 적이 없었고, 그 의지는 누구보다도 분명하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지?’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문이 들었다. 1년, 아니 10년이 흐른다고 해도 지금의 마음가짐이 바뀔 것인가.
‘설마 그럴 리가.’
베르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세월의 흐름에 풍화될 정도로 자신이 가진 정신력은 약하지 않았으니까. 고통과 원한은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여전하다.
문득 겔톤이 떠올랐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꿈꾸던 마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마법사. 그는 모험가로서 동료들과 함께 있기를 택했다.
그러한 변화는 베르덴의 이론을 깨우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는 아직 4위계다.
그러나 5위계 오른다면 단번에 마도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 깨우침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룩했다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복수를 버려야 하는 건가?’
복수를 하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강해지기 위해선 복수심을 없애야 한다니. 이보다 모순적인 게 또 있을까. 자조하며 시선을 위로 향했다.
하현달이 고고히 떠 있다.
베르덴이 팔을 들어 올려 천천히 손아귀를 쥐었다. 당연히 잡힐 리가 없었다. 예전엔…… 닿지 않아도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에 기뻐했는데.
‘그 길에 목표가 없다면 의미가 있는 걸까.’
물론 이대로 멈춰 설 생각은 없다.
다만 오늘따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베르덴은 그저 스스로에게 바랐다.
부디 자신의 마도가 복수를 향하기를.
이용당하고 착취당했던 삶.
그것마저 빼앗겨 버린다면 베르덴에게 남는 건 없었으니까. 고개를 숙인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촤아아악.
적적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 * *
다음 날, 아침.
베르덴 일행은 일찍이 아크리엔을 나섰다.
숲의 정령은 인위적인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크기에, 가능한 에스티리아 왕국의 국경과 아크리엔에서 멀어져야 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북쪽에 있는 이름 없는 숲.
단순히 지도로 본 것이기에 정령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유력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카란스가 직접 그랬으니까.
“카란스, 정령과 엘프는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 거지?”
“정령과의 연결. 이걸 엘프는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계약을 위해선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하나는 마력, 다른 하나는 적성입니다.”
정령은 마력으로 이뤄진 이형종.
그 힘을 온전히 다루려면 계약자는 그에 버금가는 양의, 정순한 마력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성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아무리 방대하고 깨끗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적성과 맞지 않은 속성의 정령과는 계약은커녕 교감조차 나눌 수 없다.
심지어 정령의 분노가 엘프에게 향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적합하다면 엘프와 정령은 서로의 마력을 나누어 갖습니다. 본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의식이긴 하지만, 저는 이미 계약을 한 적이 있기에 금방 끝날 겁니다. 인간의 시간으로 한 10분 정도면 되겠죠.”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조건만 총족한다면, 누구라도 정령과 계약을 할 수가 있나?”
“엘프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그럼 나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건가.”
엘프적 관점에서, 베르덴은 엘프다.
즉, 가능성이 있다는 뜻.
하지만 카란스는 고개를 저었다.
“형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조건을 떠나, 마력의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마력이 강하다?
“그렇습니다. 형제의 마력은…… 너무도 순수하기에 이질적입니다. 마치 세계수를 연상케 하는 마력. 만약 정령이 이를 접한다면 그 순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겠죠.”
“그럼 얘는 어떻지?”
베르덴이 푸른 정령을 가리켰다.
자그마한 빛이 명멸했다.
하나 카란스의 반응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포레트…… 아니, 이제는 블루라고 말하겠습니다. 형제께서 부활을 시키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으니까요. 블루도 그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그 이름은 페르네가 지었는데.’
베르덴은 생각을 그대로 삼켰다.
그런 불필요한 정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블루는 형제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형제의 마력을 견딜 수는 있겠지요. 서로 마력의 성질이 같으니까요.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계약은 상이한 존재들이 하는 것.
마력적으로 동일하다면 계약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연결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에드몬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 나도 처음에 분신이라고 느꼈을 정도니. 지금이야 쉽게 구별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일세.”
“그리고 설령 계약이 되었다 한들, 딱히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계약의 가장 큰 이점은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에 반해 블루의 힘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소용이 없다는 거군.”
“정확합니다.”
이해는 했다.
솔직히 가능하다고 할지언정 당장 어찌할 생각도 없었다. 인간과 정령이 계약을 나누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특히나 계약은 마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
무턱대고 감행했다간 육체에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니, 자중하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이건 호기심 이전의 문제였다.
다만 그와 별개로 궁금한 게 있었다.
“카란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듣고 있습니다, 형제여.”
“의도한 건 아니나, 나는 너와 계약된 정령을 한 번 죽였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 * *
엘프는 동족 의식이 매우 강하다.
그건 계약한 정령에게도 통용될 터다. 몸이 갓 회복되었던 시점, 베르덴에게 그토록 분노를 쏟아냈으니까.
그렇기에 의문이다.
아무리 카란스가 베르덴을 엘프로 인식한다고 해도, 그런 원한까지 깨끗하게 씻어 버릴 수 있는지 말이다.
카란스가 답했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이성적입니다.”
“허허, 감정적이 아니라? 이성적이라고 하기엔 내가 들은 욕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내 나름대로 순화한 거다. 진짜 감정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나?”
새하얀 치아가 서로 맞물렸다.
임시 무기로 준 단검과 활 그리고 화살. 그중 단검을 반쯤 꺼내든 카란스의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였다.
에드몬이 한 발짝 물러섰다.
“미안하네.”
“낄 때 껴라, 인간 마법사.”
일그러져 있던 카란스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크흠, 형제여. 엘프는 감정을 중요시하나, 가능한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대부분이 그렇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형제가 처했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노한 정령은 엘프에게도 위협이다.
결코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니, 애초에 인간에게 납치된 탓에 벌어진 일이긴 하나, 난데없이 습격을 받은 베르덴에겐 오히려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형제께서는 정령석을 부수지 않고, 정령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본래의 의도는 그게 아닐지언정 결과적으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말인가?”
“마력의 본질이 변한 건 당황스럽긴 했으나 정체성은 여전합니다. 포레트, 아니 블루와 계약이 끊어졌다고 해도 언제나 제 친구인 건 변치 않습니다.”
반짝, 반짝.
블루가 동감이라는 감정을 빛냈다.
그를 보며 미소를 지은 카란스가 말을 이었다.
“형제께선 과거 인간과 엘프의 분쟁에 대해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간 측에서 엘프를 납치해 물건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족의 참상에 칼을 뽑아든 엘프들은 국가를 멸망시켰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대부분 알 만한 거대한 사건.
분노와 증오로 점철되었으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오로지 철저하게 적을 파괴하는 데 전력을 다했던 엘프의 전법은, 기록 속에 남아 그 두려움을 알리고 있다.
“형제여, 기억하십시오. 엘프는 결코 동족의 아픔을 잊지 않지만, 인간보다도 아득히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능숙하다는 걸.”
따뜻하면서도 싸늘한 음성.
카란스의 충고에, 베르덴은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끝으로 대화는 없었다.
이름 없는 숲을 거닐며 숲의 정령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형제여.”
카란스가 앞을 가리켰다.
나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녹색의 빛무리. 과거에 봤던 숲의 정령의 모습이었다.
* * *
숲의 정령.
그를 응시하던 카란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령이 경계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위협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저만 두고 멀리 떨어져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지.”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에드몬과 블루를 데리고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카란스의 모습이 숲에 가려져 사라졌다. 에드몬이 불안한 표정으로 수염을 어루만졌다.
“애셔, 저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은 건가? 혹시라도 도망간다면 되돌리기 힘들 걸세.”
“괜찮을 겁니다.”
신뢰는 아니지만 믿음 정도는 있다.
그리고 별개로, 카란스가 도주를 시도한다고 해도 붙잡을 확신이 있었다. 그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알겠네. 자네만 믿겠네.”
에드몬도 결국 수긍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카란스와 숲의 정령이 있던 방향에서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화아아악.
그 순간 파동이 일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야말로 생명력이 가득한, 숲을 연상케 하는 기운.
모두의 시선이 앞을 주시했다.
사박거리는, 풀을 밟는 소리와 함께 카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 빛에 휩싸여 있는 엘프.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나뭇가지가 뻗어 나왔다. 숲의 정령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하나였다.
“계약에 성공한 모양이군.”
“감사합니다. 형제 덕분입니다.”
카란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축하는 나중으로 미루지. 당장 추적을 부탁해도 되겠나?”
“예, 맡겨만 주십시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카란스가 나무에 손을 대었다.
조용히 눈을 감자, 숲에서 들려오던 잔음이 사라졌다. 바람 소리도, 새의 지저귐 소리도 말이다.
정적이 계속되던 그때, 마침내 카란스가 눈을 떴다.
“자연이 말하길, 강인한 마력을 지닌 인간들이 이곳을 빠르게 지나갔다고 합니다.”
“언제지?”
카란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인간의 시간으로 약 1시간 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