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98화 (198/366)
  • 198화 해안 도시 아크리엔

    에스퍼렌사 후작가 본가.

    그 주인인 에스퍼렌사 후작은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언데드 사태과 교구 학살에 대한 건 어느 정도 정리했지만, 1왕자의 실험실, 엘프 등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 다시금 눈앞에 나타났다.

    엘프와 특이 형질을 가진 마법사를 이용한 비윤리적인 실험. 과연 에스티리아 왕의 목적은 무엇일까.

    에스퍼렌사 후작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셈인가.’

    벨디른 공화국과의 전쟁 중 나타난 한 명의 재상과 마법사들.

    그들은 에스티리아 왕과 모종의 거래를 했고, 그렇게 줄곧 밀리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공화국을 압도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대가는 너무도 컸다.

    재상은 암암리에 공화국의 포로와 왕국의 시민들을 이용해 학살에 가까운 실험을 자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전쟁에 사용했고.

    이것은 왕국에서 독립한 리비안트 공화국의 수뇌부를 제외하면…… 후작 본인을 포함해 극소수의 존재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지만.’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당시의 리비안트 공작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성공했을지 실패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처럼 후회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하나는 장담할 수 있다.

    만약 에스티리아 왕이 또다시 피를 보려 한다면, 그때는 과거와 다를 것이라고. 그건 에스퍼렌사 후작의 의지였으며, 그가 충성하고 있는 ‘그녀’의 생각이었다.

    털썩.

    후작이 의자에 몸을 누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사용인이 편지를 들고 나타났다.

    발신인은 에드몬.

    주저 없이 인장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글귀를 주욱 읽어 내리던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레오닐의 실험실에 잡혀 있는 실험체가 있다.

    한시가 급하며 엘프의 도움이 필요한 일. 애셔와 함께 먼저 출발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아크리엔에 비밀리에 수송 마차와 지원군을 보내 달라……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에드몬……!’

    자칫하면 궁정 마법사와 접촉할 수 있다.

    최악으로는 레오닐과도 말이다. 고작 엘프 하나와 마법사 둘이 대적하기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후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곧장 바깥을 향해 말했다.

    “붉은 신념의 기사단장, 멜자르드를 호출해라.”

    * * *

    레오닐의 실험실.

    그걸 찾는 건 가능한 물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심지어 엘프 카란스의 존재까지.

    그렇기에 베르덴 일행은 무단으로 동쪽 국경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 처형 혹은 징역형에 이를 정도의 중범죄였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신경 쓰일 리가 없었다.

    베르덴과 에드몬.

    두 사람이 고속으로 비행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연락을 보냈으니, 국경 문제는 각하께서 완벽하게 처리해 주실 걸세. 그러니 우리는 실험실을 수색하고, 실험에 사용되는 엘프 및 인간이 있다면 구출해서 아크리엔에서 대기하면 되는 일이지. 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의 보수일세.”

    이번 사안은 후작이 의뢰한 것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후작에게 고용된 베르덴에겐 그에 걸맞은 보수가 주어져야 할 터. 그런데 아직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라이너스 때문에 깜빡했군.’

    외수는 베르덴이 왕국에 온 세 가지 목적 중의 하나.

    후작가의 의뢰를 뒷전으로 생각할 정도로 우선순위는 아득히 높다. 지금으로선 보수보다도 라이너스의 생존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보수는 일이 해결된 다음에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보수가 목적이 아니라는 건가……. 애셔, 어째서 이번 일에 선뜻 나섰는지 물어도 되겠나?”

    베르덴은 아직 자신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엘프에게서 본 기억을 말하고, 시간의 촉박함을 어필하는 게 전부였으니. 물론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애초에 라이너스의 존재는 후작가에게 반드시 밝혀야 했으니까.

    “외팔이 장인에게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는 인체 실험을 혐오합니다.”

    베르덴의 진심이었다.

    그 음성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드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네. 더 자세한 건 묻지 않도록 하겠네.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자네의 노력 덕분이니. 그리고 이제 강행군을 이어 가야 하니 대화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드몬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가디언 엘프는 확실히 여타 엘프들과는 다르군. 아무리 전력을 내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의 속도를 따라올 줄이야.”

    사삭. 사사삭.

    카란스는 포레트…… 아니, 블루와 함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나무 위를 질주했다.

    감각이 강화된 베르덴은 움직임을 좇을 수 있었지만, 에드몬이 정확히 포착하기엔 어려운 속도였다.

    “체내의 마력이 피부 아래의 근육을 감싸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허허, 인간은 부여 마법을 통한 것이 아니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게다가 기본적인 신체 능력 또한 강인한 전사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기까지 하니…… 참으로 엘프란 신비한 종족이야.”

    에드몬은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카란스에게 날이 선 말을 들었음에도 신경을 쓰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엘프에 대해 익숙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성격이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에드몬은 권위와 자만에 찌든 마법사와 다르다는 건 분명했다. 모험가 겔톤처럼 말이다.

    “속도를 좀 더 높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음, 나도 그렇게 보이네. 그럼 먼저 앞장서도록 하지.”

    에드몬이 마력회로를 더욱 강하게 활성화했다.

    대기를 관통하는 소리가 귓가에 감돈다. 베르덴은 어렵지 않게 에드몬의 속도에 맞추었고, 카란스와 블루가 그 뒤를 따랐다.

    * * *

    베르덴 일행은 하나같이 평범하지가 않았다.

    에드몬은 5위계 상위의 마도사이고, 카란스는 관리자를 수호하는 가디언 엘프이며, 블루는 다름 아닌 이형종이다.

    베르덴은 이들 이상으로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마법사였다.

    며칠간의 강행군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그래서 휴식 시간은 최대한 줄였고, 아크리엔에 도착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고된 여로.

    그리고 하루의 휴식.

    그것이 이들의 방침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네. 후우,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야. 나이가 들어서 조금 지치는군.”

    에드몬이 허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런 일행들 앞에 나타난 해안 도시 아크리엔. 구름 사이로 산산이 부서진 여름 햇살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도시에 익숙한 에드몬이 안내를 맡았다.

    베르덴과 카란스는 로브를 푹 눌러써 외모를 감추었고, 블루는 카란스의 품속에 꼭꼭 숨었다. 검문을 하고 있는 경비병에게 에드몬이 슬쩍 돈을 쥐여 주었다.

    “크흠. 어서 지나가시죠, 어르신.”

    “고맙네.”

    경비가 신분을 확인하는 척, 일행들을 안으로 들였다.

    아크리엔은 관광도시.

    귀족들이 밀회를 즐기러 오는 일도 더러 있기에, 뇌물은 공공연한 관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툼한 지폐를 손에 쥔 경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카란스가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재물을 받고,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을 안으로 들이다니. 역시 인간이란.”

    “그래서 자네가 편히 들어온 것이 아닌가? 이해는 하지만 대충 넘어가세.”

    “흥.”

    “일단 예정대로 식사나 하러 가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휴식 없이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위험하니까 말일세.”

    “예, 그러시죠.”

    베르덴은 군말 없이 수긍했다.

    마력은 남아돌았으나, 체력적으로 피곤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카란스는 베르덴의 뒤에 붙어 바짝 따라왔다.

    식당을 겸하는 최고급 여관에 들어섰다.

    가장 꼭대기의 방을 빌린 그들이 가볍게 몸을 풀었고, 잠시 후 호화로운 식사가 방 안에 차려졌다.

    카란스의 눈동자가 해산물을 응시했다.

    “저건 뭐지, 인간 마법사?”

    “응? 아, 랍스터일세. 상당히 비싼 해산물이지. 그만큼 맛이 있냐고 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럼 저건?”

    “생선튀김이군. 뼈만 잘 발라서 튀기면, 그 맛이 또 일품이지.”

    “저건? 저건?”

    “콘 치즈하고 해물찜일세.”

    카란스는 지식으로 바다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직접 본 적은 없다.

    당연히 해산물 또한 마찬가지다. 강이나 호수에서 잡은 생선은 흔했지만 이런 요리들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질문을 이어 가던 카란스가 흠칫했다.

    “저건…… 대체 뭐지?”

    “생선회일세. 갓 잡은 생선을 손질해 그대로 올린 거지. 아직 신경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아주 싱싱한 걸 잡았나 보군.”

    뭐? 산 채로 썰었다고?

    “으, 역시 인간은 야만적이군.”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런데 침이나 닦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헛.”

    카란스가 침을 삼켰다.

    “형제여, 배가 고픈데 식사를 해도 되겠습니까?”

    베르덴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에드몬은 껄껄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감사합니다, 형제여.”

    카란스가 재빨리 착석했다.

    포크를 쥔 그가 음식을 하나둘씩 맛보기 시작했다. 취향에 맞았는지, 카란스의 입가가 내려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허허, 엘프가 이렇게 식성이 좋은 줄은 몰랐군. 우리도 어서 들도록 하지.”

    베르덴과 에드몬도 식사를 시작했다.

    확실히 값이 비싼 만큼 음식의 질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에드몬이 과일 음료로 입안을 씻어 냈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군. 이대로 잠에 들면 더할 나위 없겠다만…… 그 전에 애셔, 자네와 의논할 게 있네. 바로 레오닐에 대해서지.”

    레오닐은 궁정 마법사의 정점이다.

    가진 힘도 그렇긴 하나, 왕국 내에서의 권력 또한 절대적. 그야말로 왕을 지키는 성벽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에 하나 의문이 든다.

    “레오닐의 존재는 왕가의 모두가 주목하고 있네. 1왕자, 2왕자, 3왕자 그리고 공작가와 같은 왕위 계승자들은 전부. 만약 레오닐이 누구 하나를 지지한다면 엄청난 이점을 갖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 후작가 또한 주목하고 있었지.”

    그런데.

    “레오닐이 그리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네. 카란스를 대수림에서 납치했을 때도, 뭔지 모를 실험을 했을 때도 말일세.”

    에드몬이 턱을 쓸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나는 내 나름대로 꽤 깊게 생각했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하나밖에 떠오르지가 않더군.”

    “공간 이동입니까.”

    한순간에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

    베르덴은 마탑에서 수년간 몰래 훔친 재료들을 끌어서 공간 마법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 만큼 공간 이동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이해하고 있었다.

    “맞네. 공간 이동이라면 그의 행적이 전부 이해가 되지. 하지만 대외적으로 레오닐이 공간 속성에 적성이 있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네. 그렇다는 건, 마법진이나 모종의 마법 물품 혹은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되지.”

    에드몬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애셔, 자네도 알 걸세. 공간 이동의 도착지에는 마력의 파장이 급격하게 날뛴다는 걸 말일세. 다시 말해, 레오닐이 온다면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거지.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계획은 당장 취소일세.”

    정체가 발각된다면 레오닐이라도 죽이겠다.

    그런 각오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일부러 마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대는 무려 6위계의 마도사.

    객관적으로 봤을 때, 베르덴과 에드몬 그리고 카란스와 블루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승산은 적을 테니까.

    “그러니 그때가 되면 내 지시를 따라 주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자네는?”

    포크로 회를 찍은 카란스가 움찔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인간의 지시 따위 듣지 않는다며 뭐라 했겠지만, 에드몬의 시선에는 진지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알겠다, 인간 마법사.”

    반짝.

    블루도 명멸하며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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