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깨어난 엘프 (3)
엘프는 자연의 마력에 크게 반응한다.
인간과 다른 신체 구조가 그러하지만, 자연의 마력으로 엉망이 된 내부를 회복한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베르덴의 마력은 자연의 마력, 그 이상으로 정순하다.
그래서 마력 위압을 진정제로써 쓴 건데.
‘확실히 인간 마법사와는 다르다.’
베르덴이 과거를 상기했다.
지금까지 마력 위압으로 마법사를 제압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베르덴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광활한 마력을 접한 그들은 대부분 정신을 잃거나 압도당해 주저앉았다.
그런데 엘프의 반응은 비슷하되 다르다.
덜덜 떨리는 몸.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식은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지만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겁에 질린 모습이다.
하나 마력의 격차를 인지하고 경악한 것과는 상이하다.
그래, 마치…….
‘내가 처음으로 초월자를 목격했을 때와 비슷한 것 같군.’
마탑에 처음 입성할 때였으니 8살 때.
시야가 겨우 닿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어릴 적 마탑주를 마주했던 그 감각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인간의 형상 너머에 감춰져 있는, 그 인지 밖의 존재감을 말이다.
뭐, 어쨌든.
‘생각 이상으로 잘 통한 모양이니 다행이군.’
그러니 좀 더 수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베르덴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블루가 스리슬쩍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고, 에드몬은 마법사다운 초롱초롱한 눈으로 상황을 구경했다.
“이름이 뭐지?”
“……카란스.”
“나는 애셔다. 저쪽은 에드몬 로드리너.”
“만나서 반갑───”
으득.
카란스가 어금니를 깨물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다 베르덴의 눈치를 보더니 감정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 광경에 에드몬이 멋쩍은 듯 웃었다.
“허허, 아무래도 대화가 가능한 건 자네뿐인가 보군. 부득이하게도 나는 여기서 지켜만 보고만 있어야 할 것 같네.”
딱히 상관은 없다.
어차피 질문에 대답할 입은 하나뿐이니까.
베르덴이 카란스를 보며 물었다.
“묻겠다, 카란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뭐지?”
“…….”
카란스의 미간이 작게 흔들렸다.
이내 기억을 상기한 그에게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만신창이가 된 인간을 죽이고, 당신이 날 기절시킨 기억이다.”
이성을 상실했을 때도 기억을 한다는 건가.
“기억력이 좋군.”
“그게 엘프다.”
“좋아. 그럼 다음이다. 정령 블루…… 아니, 포레트와 함께 숲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도 기억이 나나?”
카란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베르덴과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 작게 숨을 내쉰 카란스의 시선이 블루에게 향했다.
“……대답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정령에 대해서인가?”
“어째서 당신이 포레트와 같이 있는 거지?”
카란스는 정령과 마력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마법사……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티리아 왕국의 궁정 마법사에게 습격받아 납치당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포레트가 곁에 있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티끌만 한 마력조차 느낄 수도 없었다. 어쩌면 납치범의 강함으로 유추해 봤을 때 소멸했을지도 모르고…… 가능성은 후자가 더 높았다.
그 사실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다.
숲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몸체는 푸른색으로 변했다. 마력의 성질마저 완전히 달라졌다. 서로의 마력이 연결된 감각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친구이자 생사를 같이할 동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알아야만 한다.
왜 포레트가 여기에 있는지, 왜 포레트가 변했는지.
“…….”
베르덴이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이건 심문이라기보단 대화이며 설득이다. 엘프가 겪어 온 경험이 필요한 이상, 강제력은 가능한 배제하고 협조를 이끌어 나가는 게 현명할 터.
‘어설프게 정보를 가공하는 건 피한다.’
엘프 또한 베르덴처럼 정령의 기억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력 위압만으로는 정확한 증언을 얻기 힘들다.
그러니 보다 신중하게 다가가야 한다. 카란스가 의도적으로 거짓을 섞으면 더욱 피곤해질 테니.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판단을 내렸다.
“포레트에게서 기억을 봤다.”
“기억……?”
“네가 레오닐…… 회색 수염을 기른 마법사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부터다. 포레트는 정처 없이 너를 쫓다가 왕국으로 흘러들어 왔지.”
베르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 가감 없이 밝혔다.
슬론의 깊은 숲에서 정령에게 습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토벌을 감행한 것.
그 후 정령석을 통해 정령을 부활시켰다는 사실과 도시에서 인간 학살을 일으키지 않도록 안전책을 마련한 것까지 전부.
대화의 말미는 카란스의 구출로 마무리 지었다.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카란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 심중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마지막에 남은 표정은 분노도, 두려움도 뭣도 아닌…… 바로 기쁨이었다.
이윽고 카란스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역시…….”
역시?
“당신은 엘프로군요……!”
……?
* * *
난데없는 카란스의 발언에 주변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에드몬이었다.
“애, 애셔, 자네가 엘프라고……?! 확실히 얼굴은 그렇게 볼 여지가 충분하지만, 뾰족하지 않은 귀로 보나 마법으로 보나 내가 아는 엘프와는 다른…….”
“전 인간입니다.”
베르덴이 한마디로 에드몬의 말을 일축했다.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바닥을 향하고 있던 연녹색의 눈이 베르덴의 벽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동족을 만나기라도 한 듯 상기된 얼굴과 함께.
“……왜 내가 엘프라는 거지?”
“엘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엘프뿐이기 때문입니다.”
카란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직 정상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힘이 실렸다. 짧은 시간 동안 이만큼 회복이 가능한 건 엘프 중에서도 고위 엘프밖에 없다.
“고위 엘프라면?”
“바로 ‘관리자’입니다.”
엘프 종족의 중앙 체계는 인간과 다르다.
왕이나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아닌, 엘프가 숭배하는 ‘세계수’가 종족의 중심에 있으며, 그런 세계수를 보살피는 ‘관리자’들이 통치를 대행한다.
관리자는 세계수를 통해 다른 엘프들과 의식을 공유할 수 있으며, 일정 범위 내에 있는 엘프의 위치까지 파악이 가능한 존재다.
그리고 관리자를 수호하는 것이 카란스와 같은 ‘가디언’ 엘프.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로 파악한 정보다.
“널 회복시켰다고 해서 날 관리자로 여기는 건 섣부른 판단인 것 같은데.”
“그 외에도 이유는 있습니다.”
정령을 임의로 부활시킬 수 있는 건 관리자의 권능이다.
그만한 양의 자연의 마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엘프 개개인이 아닌 세계수의 마력을 일부 빌려야 가능한 일이니까.
“물론 포레트의 부활은 제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것과 다릅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과 정체성마저 변질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란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당신의 마력에서는 세계수의 것과 같은, 순결함이 느껴집니다, 형제여.”
이러한 이유들로 카란스는 태도를 바꾸었다.
다른 종족들을 혐오하나, 동족에게만큼은 신뢰와 따스함이 가득한 엘프의 종족 특성. 특유의 집단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말이 없어진 베르덴.
그가 자신의 외모를 가리켰다.
“내 귀가 뾰족하지 않은데도?”
“엘프는 인간 따위와 다릅니다. 외형을 참고할지언정 매몰되지 않습니다.”
“내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마력이 변질되는 것은 아닙니다. 엘프적 관점에서는 당신은 고귀한 엘프입니다.”
카란스는 베르덴이 뭐라고 하든 간에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엘프적 관점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베르덴이 눈을 감았다.
“애셔, 괜찮은가?”
“감히 형제에게 말 걸지 마라, 인간 마법사. 수염을 뜯어 버리기 전에.”
“……허허, 이 엘프 친구는 말이 상당히 험하군.”
“친구? 난 네 친구가 아니다.”
에드몬과 카란스가 신경전을 벌였다.
곧 생각을 가다듬은 베르덴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
“알겠습니다, 형제여.”
“정말로 애셔 말은 잘 듣는구만.”
“어쨌든 카란스, 네 말은 이해했다. 정말로 내가 엘프라고 여긴다면…… 납치범들에게 잡혀가 무엇을 봤는지 말해 줄 수 있겠지?”
베르덴은 카란스의 생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편이 더 순조로울 테니까. 애초에 베르덴이 속인 것도 아니고 카란스 본인이 혼자 오해한 것이기도 하니.
정정하는 건 훗날에 해도 늦지 않다.
카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만 그보단 보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본다면…… 기억 말인가?”
“엘프는 세계수가 없는 한 기억을 나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령, 포레트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반짝!
허공을 난 정령이 카란스의 어깨에 안착했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다가, 이름을 불린 게 기뻤던 모양이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포레트를 매개체로 서로 마력을 흘려 넣으면 됩니다.”
확실히 어려울 건 없었다.
다른 자의 기억을 보는 건 한두 번이 아니긴 하나, 직접 기억을 공유하는 건 이번이 처음.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
베르덴은 방심하지 않았다.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엘프에 대한 경계심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카란스가 주춤하더니 몸을 휘청거렸다.
아직 부상이 남아 있는 건가? 그렇게 묻자 카란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형제여…… 혹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카란스가 굶은 지 몇 주가 지났다.
아무리 자연의 마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금식이 계속되면 힘을 낼 수가 없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을 보는 건 잠시 뒤로 미루지. 곧 구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고맙습니다, 형제여.”
* * *
카란스의 곁은 블루에게 맡겼다.
그리고 감옥의 입구는 안전 가옥에 있는 다른 기사에게 맡겼다. 지상으로 올라온 베르덴과 에드몬이 대화를 나누었다.
“허, 설마 애셔, 자네를 엘프라고 생각할 줄이야. 엘프가 인간에게 저리 친절한 건 처음 봤네. 살다 살다 신기한 걸 다 보는군.”
“저도 그렇습니다.”
“나에게만 슬쩍 얘기해 보게. 혹시 자네가 엘프의 피를 이은 것은 아닌가?”
베르덴은 고아 출신이다.
부모의 얼굴을 본 적은커녕 이름조차 모른다. 당연히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고.
베르덴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엘프하고 인간 사이에서 생식 작용이 가능하긴 합니까?”
“당연히…… 불가능하지. 전체적인 외형은 비슷해도 아예 다른 종족이니까.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지. 그래도 뭐 있다면 하프 엘프라고 불리긴 하겠군.”
하프 엘프. 하프 엘프.
에드몬은 그 어감이 맘에 들었는지 몇 번 되뇌었다.
“그나저나 저 엘프는 어떻게 할 건가?”
“무슨 뜻입니까?”
“솔직히 말해 엘프는 존재만으로 위험하네. 자네도 알지 않는가? 엘프를 잘못 건드렸다가 멸망당한 나라에 대해서 말이야.”
엘프는 동족을 버리지 않으며 원한을 잊지 않는다.
만약 카란스가 왕국에 끌려와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대수림에 전해지면 왕국과 엘프 간의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언데드 사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희생자가 발생하겠지.
“그래서, 카란스를 죽이라는 말입니까?”
“후작가의 일원으로서는…… 그게 안전하다고 믿네. 하나의 목숨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다만 그 외의 방법이 있으면 그걸 택하고 싶군.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니까.”
에드몬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그를 보던 베르덴이 시선을 돌렸다.
“그건 기억을 확인할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가능한 카란스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 * *
와구와구.
카란스가 허겁지겁 음식을 삼켰다.
예절도 뭣도 없는 야만적인 행동이었으나, 잘생긴 외모 덕분에 그것조차 고귀해 보였다. 스테이크, 파스타, 식빵 등으로 배를 채운 그가 과일 음료로 목을 축였다.
“너는 엘프가 아니라 엘프의 탈을 쓴 오크인 건가? 대체 혼자 얼마를 먹은 거지?”
수십 개의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에드몬을 흘겨본 카란스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형제여.”
“음식값은 내 돈으로 지불했는데?
“잘 먹었습니다, 형제여.”
카란스는 무시로 일관했다.
에드몬의 눈가가 씰룩인 걸 본 베르덴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 기억을 보여 줄 준비가 되었나?”
“그렇습니다.”
엘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