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깨어난 엘프 (2)
전체적인 외형은 비슷할지언정 엘프의 내부 구조는 인간과 다르다.
이종족이 가진 특유의 마력회로.
자연의 마력 그 자체를 생명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신체는 더없이 생소하다.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로 정보를 얻었을지언정, 그게 한정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베르덴은 엘프의 회복을 감행했다.
망설임조차 없는 행동이었다. 그 확신의 근거는 단 하나였다.
‘정령이 그렇다고 했으니까.’
눈앞의 금발 엘프는 정령사다.
말 그대로 정령의 힘을 다루는 존재.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엘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정령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블루에게 물었다.
베르덴이 설계한 마법진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통해 엘프의 몸을 회복시킬 수 있냐고. 블루가 내보인 감정은 오해할 여지 없는 긍정이었다.
가설에 근거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물론 만에 하나의 일을 대비해 안전책도 마련해 놓았다.
‘최악은 없다.’
화악.
베르덴이 마력을 조작했다.
퍼져 있던 마력이 마석들에게 집중되었다. 세공사가 손수 새겨 넣은 두 개의 마법진이 일제히 기동했다.
형태 변화(The Alternation)
연계 마법진(The Link)
각 마석에서 흘러나온 마력의 파동이 서로 교차한다.
상쇄 간섭이 일어난 부분에 빈 공간이 자리했고, 보강 간섭이 발생한 위치에 수많은 마력의 점이 생겨났다.
“마력을 파동의 형태로 변화시킨 다음, 그 성질을 이용해 마력을 연결한다라…… 마법진의 구성이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군. 아카데미에서 교육용 작품으로 선보여도 전혀 손색이 없겠어.”
아예 관객이 된 에드몬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이건 결국 토대에 불과할 뿐이며, 핵심은 지금부터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한 블루가 즉각 반응했다.
블루가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곧이어 그 몸체가 마력의 점들 중 하나에 닿는 순간 이변이 일었다.
점과 점을 잇는 마력의 선이 생겨났고, 선과 선이 만나 마력의 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면과 면이 교차하며 공간이 형성되었다.
‘완성됐군.’
베르덴이 마력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마법진은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엘프를 감싼 공간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에드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애셔…… 내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데, 혹시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마력으로 이루어진 공간, 일명 ‘안식처’입니다.”
엘프의 육체는 아주 약해져 있었다.
과도하게 마력을 주입했다가 몸이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가능성까지 있었을 정도로. 그러한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안식처였다.
“안식처의 효과는 총 두 가지로, 하나는 마력의 균일성입니다.”
안식처는 외부와 분리되어 있다.
그런 내부 공간 전체에는 완전히 균일한 마력이 흐르고 있다. 어디를 중점으로 회복시켜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보다 균형적인 회복을 도모한 설계였다.
“그렇군. 그게 더 안전하기도 할 테고, 평균적으로 회복 시간도 짧을 테니. 이해했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뭔가?”
“다른 하나는 제어입니다.”
* * *
“제어?”
마법진 유지, 마력 조절, 상태 점검.
엘프를 회복시키면서 위 세 가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한다.
물론 짧은 시간이라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신경이 분산되는 만큼 아주 미세한 제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엔 벅차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할지라도.
확신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아, 그래서 저 정령을 데려온 건가?”
“맞습니다.”
블루는 마력의 공급처다.
보다시피 베르덴을 대신해 안식처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안식처의 전체적인 설계였으며 블루를 데려온 이유 중 하나였다.
“허…….”
에드몬의 입이 벌어졌다.
마법진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마법의 계열이다.
일정 수준 이상 마법진을 다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양한 마법적 능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당연하게도 그 길은 쉽지 않다.
마법진에 대한 학문은 너무도 난해해 익히기 어려웠으니까. 괜히 마법사들이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범재가 마법진을 공부하려면 10년, 20년 정도는 매달려야 할 테니.
마법사 또한 사람.
너무 먼 미래보단 가까운 부귀가 끌리는 법이다.
그런데 고작 2주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저런 복합적인 마법진을 설계하다니. 아니, 마석 세공 시간을 제외하면 일주일 남짓일 터.
‘도대체 누가 이런 마법사를 키운 거지?’
에드몬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내 고개를 흔들어 이성을 붙잡고는 질문을 하나 더했다.
“잠깐. 잠깐만, 애셔. 저 안식처를 이루고 있는 마력은 자네의 것임이 분명하겠지?”
“예.”
“엘프는 자연의 마력을 생명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는 건 자네의 마력이 그만큼 정순하다는 뜻인가?”
타인의 마력.
그 정순함의 정도는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다. 극도로 감각이 발달되어 있지 않는 이상 말이다. 기껏해야 대강 가늠하는 게 전부다.
마도사인 에드몬 또한 그 범주에 속했다.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베르덴이 발걸음을 옮겼다.
안식처를 이루고 있는 마석 하나에 다가섰다.
여섯 개의 마석에는 모두 형태 변화와 연계, 두 개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눈앞의 마석만큼은 하나의 마법진이 더 새겨져 있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상태로 오른손을 마석에 갖다 대었다.
잠들어 있는 마법진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두 개의 푸른 고리가 떠올라 각각 베르덴의 손등과 손목을 감쌌다.
안식처의 마력 제어 권한이 베르덴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이미 전달했지만 한 번 더 말하지. 엘프를 살리고 싶으면 가능한 저항하지 마라.”
반짝.
블루가 긍정의 빛을 내비쳤다.
그 직후, 베르덴이 천천히 손을 비틀었다.
블루에게서 공급되는 마력의 양이 증가했다. 안식처 내부에 균일하게 퍼져 있던 마력의 농도가 조금씩 높아졌다.
시선을 내려 엘프를 살폈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호흡이 더 강해졌다.
방향은 정확하다.
그러니 이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베르덴은 엘프를 면밀하게 주시하며 더욱 농도를 높였다.
블루는 다름 아닌 베르덴의 마력을 부여받은 정령. 고작 이 정도에 마력이 고갈될 일은 없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간다.
적막한 긴장 속에서 에드몬은 호흡 소리조차 감추었다. 난생처음 보는 마법진으로 엘프를 회복시키는 건 한평생을 살아도 못 볼 광경이었으니까.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봐야만 했다.
그때.
들썩.
엘프의 손이 움직였다.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했고, 생기 또한 강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마력 농도를 유지하기만 하면 곧 회복할 터.
‘시간을 헛되이 쓰지는 않았군.’
이윽고 엘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힘이 실렸다.
바깥에 드러난, 숲은 연상케 하는 연두색 눈동자. 아직 제정신이 아닌 건지, 초점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베르덴에게 멈춰 섰다.
“일어났나?”
“…….”
엘프가 멍하니 쳐다봤다.
점차 초점이 선명해지던 그 순간.
“이, 인간……?!”
엘프가 눈을 부릅떴다.
파악! 갑자기 몸을 일으킨 엘프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벌써 저만큼 신체 기능이 돌아온 건가.
예상을 웃도는 회복력이다. 기껏해야 손을 들어 올리는 게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뻐어어어억!
“끄억?!”
도약한 엘프가 금속 천장에 부딪혔다.
감옥이 크게 울리며 엘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눈이 뒤집힌 게 의식을 잃은 모양.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뒤통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천장이 너무 낮았나?”
“…….”
“…….”
베르덴과 블루는 할 말을 잃었다.
* * *
힘들게 회복시켜 놨더니 엘프가 또 기절했다.
금속 천장이 우그러질 정도로 머리를 부딪히고 말이다. 다소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베르덴은 곧 정신을 다잡았다.
엘프를 침대에 눕히고 블루와 함께 안식처를 기동했다.
화아아아악.
점차 피가 멎고 부상이 회복된다.
곧이어 엘프가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에드몬이 마도를 펼쳤다. 바람으로 성질 변화한 마력이 엘프의 행동을 억눌렀다.
“끄으윽……!”
“잠시 참아 주게. 뒤통수가 또 터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이제 됐나?”
“됐습니다.”
에드몬이 마력을 해제했다.
그와 동시에 마석 하나가 날아왔다. 구속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마력의 사슬이 엘프를 옭아맸다. 살기를 번뜩인 엘프가 광분했다.
“인간! 당장 풀어라! 네놈들의 사지를 찢어 버리기 전에!”
수려한 외모답지 않은, 거친 분노다.
아무래도 힘으로 위압하는 건 소용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다른 걸 이용하는 수밖에.
“블루, 진정시켜.”
블루가 반짝이며 엘프에게 다가갔다.
마력의 사슬을 부숴 버리던 엘프에게서 점차 움직임이 멈췄다. 정확히 블루를 바라본 엘프가 목소리를 흘렸다.
“……포레트?”
포레트?
그게 블루의 본명인가?
생소한 이름을 부르자 블루가 명멸했다.
흘러나온 마력에선 따스한 감정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리웠는지 엘프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것 같은데…… 참으로 감동적이군. 훌쩍. 아, 미안하네. 나이가 많아지니 감정이 예민해져서 말이야.”
에드몬이 눈가를 슬쩍 문질러 눈물을 닦아 냈다.
베르덴은 무표정한 얼굴로 엘프와 블루를 바라봤다. 확실히 극적인 해후이기는 하니 잠깐 기다려 줄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포레트…… 너, 너 몸이 대체……! 그 안에 새겨진 건 또 뭐고?!”
엘프가 블루의 변화를 인지했다.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강제 마법진 또한.
그때, 엘프와 베르덴이 시선을 마주쳤다.
엘프는 확신했다.
“네놈……! 네놈이군! 포레트를 이렇게 만든 놈이! 내 친구까지 괴롭히다니……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너만큼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엘프가 다시 분노에 휩싸여 미쳐 날뛰었다.
블루가 진정시키려고 해 봤지만 무리였다. 이성을 거의 잃어버린 엘프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원래 엘프가 이렇습니까?”
에드몬은 엘프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베르덴이 조언을 구하자, 에드몬이 수염을 쓸며 과거를 회상했다.
“젊었을 적에 호기심 때문에 엘프의 영역을 침범한 적이 있었네. 그러다 엘프 하나를 만나서 인사했더니, 갑자기 수십 명을 데리고 쫓아오던지 뭔가. 살기 가득한 화살을 날리면서 말이야. 그때 내가 4위계 하위였는데, 하마터면 거기서 인생 하직할 뻔했지.”
“……다른 경험은 없습니까?”
“몇 번 엘프와 접촉을 시도하긴 했네. 그리고 한 번은 제압을 한 뒤 대화를 나눠 보려고 했고, 실제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게 되었지.”
그리고.
“욕만 듣고 수백 명의 엘프에게 추적당했네. 허허, 다리에 화살이 꽂히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 후로는 엘프와 친해지는 걸 접었네. 다음에는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말이야.”
에드몬이 그리운 추억이라며 껄껄 웃었다.
“아무튼. 엘프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네. 영역을 침범한 인간이라면 더욱 그러겠지. 그런데 저 친구는 인간에게 실험당해 죽을 뻔했으니…… 증오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걸세. 힘을 써서 억지로 누르는 건 오히려 역효과일 테고 말이야. 그건 내가 경험해 봐서 잘 알아.”
어쨌든 대화를 나눌 수는 있다는 건가.
그러나 베르덴은 느긋하게 엘프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옆으로 비켜.”
반짝……?!
블루가 당황하며 몸을 흔들었다.
자신이 직접 엘프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며 설득했다. 하지만 싸늘한 벽안을 마주한 순간, 블루는 덜덜 떨며 비킬 수밖에 없었다.
“포레트!”
그 모습에 엘프가 더욱 증오를 불태웠다.
욕이란 욕은 다 내뱉었고, 가감 없이 살의를 쏘아붙였다. 엘프에게 다가선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마력 위압>
화아아아악!
마력의 중압감이 감옥을 장악했다.
쩌적. 바닥을 이루고 있던 벽돌이 금이 가며 깨졌다.
“큭……!”
에드몬이 주춤하며 숨을 삼켰고, 정령은 황급히 침대 아래로 몸을 숨겼다. 위압의 중심에 있는 엘프는 완전히 경직되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식은땀.
삽시간에 분위기를 장악한 베르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좀 진정했나?”
“…….”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라.”
……끄덕.
엘프가 작게 고개를 움직였다.
직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베르덴의 마력 위압에 분노가 조절된 것 같았다.
“저게 되네?”
에드몬은 지식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