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93화 (193/366)

193화 깨어난 엘프 (1)

겔톤은 자신이 피워 낸 불꽃을 한동안 바라봤다.

초췌한 몰골임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법사라면 그의 감정이 어떨지 작게나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내 여운이 흐릿해져 갈 때쯤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겔톤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와 같은 한숨이 아니었다. 노력이 결실로 보상받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의뢰는 성공입니까?”

“당연한 걸 물어보시는군요.”

겔톤이 웃으며 덱사르의 보석을 꺼냈다.

햇빛에 반사된 녹색의 빛이 눈동자에 비쳤다. 굳은살 없는 손가락이 보석을 더듬었다.

“솔직히 말해…… 보수로써 이 보석을 드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압니다. 제가 얻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죠.”

“가치는 주관적인 겁니다.”

2세대 덱사르의 보석.

겔톤에게 있어서는 기껏해야 5번 정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소모품이다.

하지만 베르덴에겐 다르다.

마법만이 아니라, 실전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마법진을 저장할 수 있었으니까.

겔톤이 베르덴의 대답을 되뇌었다.

“가치는 주관적이다…… 그렇습니까. 애셔 님에겐 이 덱사르의 보석이 그만한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겠죠.”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중 연속성 이론.

이 가르침은 겔톤에게 있어서 너무 컸다. 베르덴이 생각한 가치보다 더욱.

그러나 물질적으로 보수를 더할 수는 없었다.

뭘 해도 부족하니까.

돈이나 마력 포션 따위론 오히려 의미를 퇴색시킬 것이며, 착용하고 있는 마법사 전용 장비를 주려고 해도 상대가 가진 것에 비하면 급이 맞지 않았다.

“…….”

고심하던 겔톤이 보석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베르덴이 건네받은 순간 나지막이 말했다.

“훗날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모험가 길드를 통해 연락 주십시오. 마법사로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모험가로서는 다를 테니까요.”

파티 단위라고 해도 겔톤은 미스릴 등급.

길드의 이름을 등에 업은 고위 모험가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어딜 가든 간에 대우를 받는다.

그러한 사회적 위치는 암지에서 위명을 떨친다고 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말뿐인 약속이다.

하나 겔톤이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덱사르의 보석을 손에 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겠습니다.”

“항상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겔톤이 한 발자국 물렀다.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진지함이 묻어 있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제 동료들에게 돌아갈 시간이군요. 하하, 제가 화염 마법을 쓰는 걸 보고 엄청나게 놀랄 게 눈에 선합니다.”

물론 토벌에 쓰기에는 수준이 턱없이 낮다.

조급함을 버리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단계를 쌓아 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력회로에 큰 손상이 갈 테니까.

겔톤은 그러한 베르덴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래도…….’

야영을 할 때 불을 피울 정도는 된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동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왕국에서 계속 활동할 겁니까?”

“저번에 동료들에게 듣자 하니, 벨디른 공화국에 유명한 관광 명소가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왕국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토벌과 여행.

그것은 진정한 모험가가 된 겔톤의 삶이 될 것이다. 마탑에 돌아갈 생각을 버린 그는 비로소 마법사가 되었다.

겔톤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존경을 담아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애셔 님.”

그 길로 겔톤이 떠나갔다.

베르덴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겔톤은 염원하던 5위계의 벽을 아직 넘지 못했다. 그 대신 새로운 길을 경험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발버둥 친 끝에 터득한 이론.

평생에 걸쳐 굳어진 고정관념이 무너졌으니, 앞으로 같은 마법을 대한다고 해도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정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쩌면 벽을 넘어 5위계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나쁘지 않은 의뢰였다.’

진심으로 마법을 추구하는 마법사.

베르덴이 예상했던 3주보다 더 빠른 걸 보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깎아 이뤄 낸 결과였다.

인체 실험과 같은, 타인의 희생을 발판 삼는 자들과는 다르다. 옛날 베르덴이 바라 마지않았던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다중 연속성 이론.

베르덴은 이론을 창시한 이후 처음으로 보람이란 걸 느꼈다. 잠시 고아원에서 마법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 그가 시선을 돌렸다.

덱사르의 보석이 영롱하게 빛났다.

어떤 마법진을 저장할지 이미 정해 놓았다.

그리고 그건 베르덴이 가진 마법들 중, 다른 의미로 비장의 수단이 될 것이다.

‘과연 쓸 기회가 올진 모르겠지만.’

위기는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다.

그걸 위해서 여러 비장의 수단을 마련한 것이고.

의뢰는 완수했다.

보수를 받은 베르덴은 곧장 아세른으로 복귀했다.

* * *

마석이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

주점에서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바르톨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툼한 가방 하나를 짊어지고 말이다.

“어머. 직접 가져온 거예요? 부하들 안 시키고?”

“얼마가 걸린 일인데 시키긴 누굴 시켜?”

페르네에게 쏘아붙인 바르톨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있는 베르덴 앞에 다가섰다. 잠시 시선을 마주한 바르톨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세공사가 그러더군, 이렇게나 복잡한 걸 도대체 어떻게 만드냐고.”

“그래서?”

“거리에 나앉고 싶으면 그러라고 했더니 열심히 만들던데. 덕분에 세공사가 탈진해서 앓아누웠다. 어쨌든 네 설계도대로 만들어 왔으니 확인해 봐.”

베르덴이 직접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어 식탁 위에 나열했다.

정팔면체로 세공된 중상급 마석 6개.

베르덴이 그중 하나에 마력을 불어넣자 마법진이 기동했다. 새겨진 선을 따라 푸른빛을 내뿜은 마석이 허공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직접 하나씩 면밀하게 관찰했다.

‘아니 X발,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뭐라도 트집을 잡으려는 눈빛이다. 엄숙한 분위기가 흐른다.

마석이 하나둘씩 통과될 때마다 바르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 쥔 손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마치 어릴 적 뒷골목 양아치들에게 상납금을 바칠 때의 기분이었다.

……탁.

이윽고 마지막 마석의 확인이 끝났다.

“세공사의 솜씨가 좋군.”

그 한마디에, 바르톨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손을 문질러 땀을 지워 낸 그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여기 정산서다. 안 떼어먹었으니까 직접 확인해 봐.”

푸른 눈동자가 숫자들을 훑었다.

재료로 사용된 마석과 세공 비용은 확실히 예상 범위 내였다. 정확하게 따지면 평균적인 금액보다 낮은 수준.

나름대로 노력은 했던 모양이었다.

바르톨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 정도 했으면 난 최선을 다한 거 같은데…… 약속은?”

“네가 최선을 다한 거랑 약속이랑 무슨 상관이지?”

“뭐……! 그럼 마석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냐?!”

“아니, 마음에 들어.”

페르네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두 개의 돈 가방을 바 위에 올려놨다. 버튼을 누르자 안에는 지폐 뭉치가 가득했다.

허공에 떠오른 수표 두 개가 돈다발 위에 내려앉았다.

“세공 비용하고 남은 빚 1억 2천만 엘크다. 확인해 봐.”

“……집 가서 확인하지.”

X발, 속으로 욕을 삼킨 바르톨이 가방을 챙겼다.

양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수표의 금액을 합치면 얼추 액수가 맞아떨어졌다. 대부업자로서의 감이었다.

“돈 잃어버리지 말고 조심히 가요, 바르톨.”

페르네가 손을 흔들었다.

그 얄미운 인사에 바르톨이 눈가를 씰룩였다.

“아주 살맛 나 보이는군, 페르네.”

“뭐…… 덕분에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몇 달 전 빚에 허덕이던 그때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찰랑거리는 보랏빛 머리칼이 매우 거슬렸다.

“나중에 돈 필요하면 연락할게요.”

“닥쳐.”

바르톨이 더 듣기 싫다는 듯 거리로 나갔다.

그 대부업자가 저런 모습이라니. 페르네는 킥킥거리며 유리컵을 닦았다.

세공된 마석을 공간가방에 챙긴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바로 출발하시게요?”

준비는 끝났다.

굳이 아세른에서 뜸 들일 이유는 없다.

“블루.”

이름을 부르자 정령이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곧 엘프를 만나게 돼서 신났는지 상당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페르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블루는 다시 못 보는 건가요?”

“나야 모르지.”

엘프든 정령이든 베르덴에게는 생소한 것들이다.

엘프를 회복시킨 뒤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도록 진정시키는 것도, 그 이후에 정령이 엘프에게 붙을지 아니면 주점으로 돌아올지 등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다.

‘애초에 정령을 부활시킨 것도, 조합에서 암살자를 보낼 걸 대비해서였으니.’

그런데 지금은 조합이 무너졌다.

후작가와 손을 잡은 데다가, 구축한 정보망의 수준까지 예전을 뛰어넘은 페르네는 더 이상 호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뭐, 어쨌든 가 봐야 알게 될 것이다.

베르덴이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블루……!”

페르네가 정령을 끌어안았다.

그동안 거의 내내 붙어 있었던 터라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 블루에게서 흘러나온 감정 또한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닌데…….

“그만하고 놔라.”

벌써 몇 분째인지.

결국 베르덴이 한마디를 하고 나서야 둘이 떨어졌다.

* * *

라인즈의 북쪽에 세워진 작은 타운.

후작가의 안전 가옥으로 향하자 에드몬이 반겼다.

“오오, 기다리고 있었네! 자 자, 어서 들어오게!”

에드몬의 환영을 받으며 가옥에 들어섰다.

적당히 필요한 가구만이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저번에 본 창고와 별로 다를 것 없는 분위기였다.

“엘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 밑에 데려다 놨네. 혹시라도 위에 뒀다간 창문을 부술고 나갈 것 같아서 안전하게 모셔 뒀지. 뭐, 도중에 깨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야.”

“상태는 여전합니까?”

“전보다 안 좋아졌네. 아무리 식사를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여기서 더 길어지면 여러모로 여럽겠지. 한데…….”

계단을 내려간 에드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에게서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는군. 느낌은 자네의 것인데, 마치 두 개로 나뉜 것 같은……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숨길 건 없었다.

어차피 곧 밝혀야 될 일이니까.

베르덴이 로브를 들췄다.

조용히 숨어 있던 정령 블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데없이 이형종이 나타나자 에드몬이 눈을 깜빡였다.

“……정령? 대체 이걸 어디서 난 건가?”

“설명하자면 깁니다. 일단 엘프부터 치료하고 말하겠습니다.”

베르덴이 성큼 지하로 내려갔다.

블루가 그의 어깨 위에 찰싹 붙었다. 이형종과 사람이 어울리는 광경은 에드몬에게도 아주 생소한 것이었다.

‘역시 저 친구는 특별해……!’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다.

에드몬은 흥분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 철컥.

마법 물품으로 만들어진 자물쇠를 개방했다. 두꺼운 금속 문이 열리자 침대에 누워 있는 엘프가 나타났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약간 야윈 몰골이었다.

부웅! 부웅!

날뛰기 시작한 블루.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베르덴이 주변을 살폈다.

“상당히 좁군요. 특히 천장이 낮습니다.”

“여긴 일종의 감옥일세. 되도록 행동을 제한해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 거지.”

천장을 이루고 있는 건 금속이다.

사방에 통로라곤 문 하나뿐이었고.

불편하고 갑갑하다.

확실히 감금에 적당한 장소였다.

“그런데 저 엘프를 어떻게 회복시킬 건가? 저 정령은 왜 데려왔고?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어서 보여 주면 안 되나?”

“……알겠습니다.”

마도사의 재촉에 베르덴이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공간가방에 있는 여섯 개의 마석을 꺼낸 다음, 엘프가 누워 있는 침상 주변에 둘렀다. 정확히 일정 간격을 두고 말이다.

“오오! 마법진이 새겨진 마석이 무려 여섯 개나!”

에드몬이 호기심을 가득 담아 눈을 빛냈다.

상당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베르덴은 묵묵히 준비를 갖췄다.

“블루.”

베르덴의 명령에 정령이 곧장 날아왔다.

정확히 엘프 위에 있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블루.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숨을 내쉰 베르덴이 마력을 개방했다.

화아아아악!

여섯 개의 마석이 일제히 반응했다.

세 개의 마석은 엘프 위로, 나머지 세 개의 마석은 엘프 아래로 떠올라 멈춰 섰다. 이내 마법진이 연동하며, 베르덴의 마력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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