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배움 (3)
콜록, 콜록!
얕은 기침이 연신 터져 나왔다.
겨우 호흡을 안정시킨 페르네가 고개를 들었다.
“아, 죄, 죄송해요. 너무 깜짝 놀라서…….”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안 묻었는데 사과할 것도 없었다.
“고마워요. 그래서…… 엘프가 갑자기 왜 나온 거죠?”
“뭐, 간단히 말하자면.”
왕가, 실험, 엘프, 특이 형질, 레오닐 베르타나스 등.
베르덴이 여러 키워드를 조합하여 내막을 축약해 설명했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맥락을 파악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정보상 페르네라면 더더욱.
탁.
페르네가 커피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말인즉슨 1왕자의 성에서 엘프를 몰래 빼 왔다는 말씀이시네요?”
“연구자도 처리하고 실험실도 불태웠지.”
“와우.”
1왕자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보란 듯이 안방을 작살낸 거나 다름없는 상황. 그 담대한 행동은 경악을 넘어 감탄이 나올 정도다.
앞으로 그가 뭘 하든 간에 예측하려 하지 말자.
현실을 인지하자마자 그냥 받아들이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페르네는 속으로 굳건히 다짐했다.
“그러니까 그 엘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블루가 필요하다는 거죠? 마석 세공도 그와 관련된 거고요.”
“그렇지.”
베르덴이 시선을 위로 향했다.
블루는 멈출 줄 모르고 세차게 허공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환희와 그리움과 같은 감정이 마력을 통해 느껴졌다.
‘정상적인 반응이군.’
정령에겐 지성이 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계약자인 엘프를 찾아 왕국까지 쫓아올 정도로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것이 베르덴이 알고 있는 인간성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령은 인간이 아니라 이형종이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을 지워도 이상할 게 없다. 지금이야 페르네와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갑자기 돌변해 죽이려 들 수도 있다.
강제 마법진, 콜젼으로 혹시 모를 정령의 위험을 배제한 건 그런 이유였다.
그래도 엘프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이형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다행히 초안을 수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블루에게서 별 반응이 없었으면 다른 방법을 쓰려 했는데.
베르덴은 한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령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약간이나마 늦추었다.
이제 더 이상 확인할 건 없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할 때다.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준비가 되면 오도록 하지.”
“아, 네! 그런데…… 따로 부탁하실 일은 없으세요? 예를 들자면 레오닐의 정보 같은 거요.”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레오닐과 적대할 가능성이 높다.
6위계 마도사.
명실상부한 왕국의 최강자다. 그런 위험을 베르덴이 간과할 리가 없었다. 페르네가 아는 바론 그러했다.
“레오닐하고 궁정 마법사단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긴 하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리스크가 너무 크다.”
레오닐과 왕가는 자신들을 적대하는 자가 누군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뒤를 캐내려고 하다가 발각된다면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게 베르덴의 선택이었다.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라.”
이건 페르네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블루가 그대로 정지했다.
‘말은 잘 듣는군.’
베르덴이 주점을 나섰다.
뒤에 남아 있던 페르네가 식탁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왕자들에 이어서 에스티리아 왕과 레오닐까지…… 대체 에스티리아 왕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가 않네.”
왕국 최강의 마도사, 레오닐 베르타나스.
그 이름을 들었을 때, 페르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에스티리아 왕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레오닐이 관여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테니까. 궁정 마법사단과 왕가의 관계는 그 정도로 매우 깊었다.
그저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미 왕국 내부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지 오래였고, 그 여파가 바깥으로 새어 나왔을 땐 페르네 본인뿐만 아니라 왕국 전역에 걸쳐 혼란이 흩뿌려질 거라는 걸 말이다.
‘진즉에 공국으로 이주할걸.’
페르네가 페일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옛 선배.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거였는데…… 솔직히 그래도 왕국에 남긴 했을 테지만.
뭐, 후회는 이쯤 하고.
쭈욱.
스트레칭을 한 페르네가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쌓아 둔 서류를 뒤져서 적합한 마석 세공사를 찾을 차례였다. 그녀가 손짓했다.
“블루, 나 좀 도와줄래?”
반짝…….
블루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더니 저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참 말은 잘 듣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이형종이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페르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베르덴은 자기 전까지 여관 안에서 설계도를 구상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밝자마자 채비를 갖추고 슬론 숲 입구로 향했다.
바쁜 일정이긴 했으나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진행 과정에 차질이 생길 정도라면 다른 하나를 잠시 뒤로 미뤘을 것이다. 베르덴은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새벽녘이었는데, 겔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능숙한 비행 능력으로 그 앞에 착지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애셔 님.”
“일찍 오셨군요.”
“하하, 많이 긴장되어서 말입니다. 도중에 일어나니 다시 잠에 들지 못하겠더군요.”
겔톤이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마탑이라는 틀을 부순 그의 마음속은 기대감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여전히 퀭한 눈가 안에서 반짝이는 눈빛이 보였다.
‘흠, 저렇게 기뻐할 때가 아닐 텐데.’
베르덴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다.
충고를 해 봤자 제대로 듣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백 마디 말보단 한 번의 경험이 중요할 때다.
“그럼 따라오시죠.”
“넵!”
베르덴이 슬론 숲 안으로 안내했다.
겔톤은 힘찬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아아아아아아악!!”
겔톤의 비명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 * *
겔톤은 지금까지 베르덴에게 이론만을 배워 왔다.
잘못 쌓아 올린 지식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식의 탑을 세우는 과정은 심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을 만큼.
하지만 이젠 극복했다.
더 이상 마탑이라는 허울에 연연하지 않으리라. 그러한 각오를 선언한 겔톤은 새로운 가르침이 시작되기 전날, 오래만에 이론서를 펼쳤다.
“오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론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거부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것으로 이렇게나 바뀌다니.
겔톤 스스로도 벅찬 변화였다.
이제 방해물은 없다.
벽을 부수고 5위계에 도달해 훌륭한 동료가 될 것이다. 겔톤은 확고한 자신감을 가슴속에 품었다.
그런데 역경은 곧 찾아왔다.
바로 고통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겔톤이 풀숲 위에 쓰러졌다.
마력회로를 바늘로 찌르는 격통이 전신에 가득했다. 흙먼지가 그의 옷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베르덴이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너, 너무 아프…….”
“참으시죠. 얼음과 물 속성으로 굳은 마력회로를 풀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마력회로는 재능과 적응에 좌우된다.
어느 계열과 속성에 치우치지 않을 때는 다양한 속성을 다룰 수 있으나, 앞으로 나아갈수록 적합한 계열, 타고난 속성의 마법에 편향될 수밖에 없다.
마법계의 상식, 재능에 맞지 않는 마법은 1위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을 부수려고 했던 사람은 여럿 있었으나 전부 그 한계를 넘어설 순 없었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곧 법칙이 되었다.
그렇기에 다중 연속성 이론은 특별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오로지 재능만으로 결정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영역을 피나는 노력으로 넘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원소 마법의 한해서였지만 마법계에 전율을 일으키기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이론을 실천하는 자는 극소수다.’
다중 연속성 이론은 하나의 이정표다.
보다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마력회로를 새로운 원소 속성에 적응시키기 위한 이론서.
획기적인 만큼 단점은 존재한다.
첫째, 난해하다.
난이도가 매우 높은 이론서들을 부속품으로 사용하여 만든 것이라,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마법사들이 부지기수다.
노력으로 재능을 얻으려면 그에 걸맞은 공부가 필요하다. 여기서 도전자의 절반가량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둘째, 고통스럽다.
적합성이 없는 마법을 사용하는 건 막대한 고통이 따른다.
최대한의 고통 강도만 따지면 칼로 내장을 헤집는 것보다 윗줄이다. 심지어 무리하게 시도했다간 마력회로가 과부화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현세대의 마법사들은 고통을 기피한다.
그런 와중에 큰 리스크까지 감당하며 재능을 개척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럴 바에 차라리 본래 가지고 있던 재능이나 더 키우는 게 낫지.
“실제로도 그게 효율적이긴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도전자의 대다수가 포기 선언을 합니다. 솔직히 말해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없던 걸 쥘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힘들다고 내던지다니. 안 그렇습니까?”
“끄으윽……!”
겔톤이 땅을 짚었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신에 핏대가 불거진, 기절하기 직전의 얼굴이었으나 아직은 그의 각오가 고통보다 강했다.
“이렇게 아침에는 제 주도하에 마력회로를 운용해 그걸 변화시킬 겁니다. 그리고 아세른으로 돌아가선 이론 강의를, 나머지 시간은 자기 주도 학습에 맡기겠습니다.”
“허억, 허억…….”
“지금보다 많이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으시죠.”
포기는 받지 않는다.
마탑을 버리겠다는 다짐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걸 용납할 생각은 없으니까.
베르덴이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겔톤이 몸을 덜덜 떨었다.
손가락에 맺힌 마력이 겔톤의 마력회로 곳곳을 짚어 방향을 지정했다.
“시작.”
화아아아악.
겔톤이 이를 악물고 마력을 움직였다.
지금도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데 이보다 더한 고통이라니. 두려웠지만…… 할 수밖에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겔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기절했나.
생각보다 고통에 면역이 없는 것 같지만…… 뭐,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대략 10분 정도 지나면 깨어나겠지.
‘그때까지 설계도나 만들까.’
근처 나무 아래에게 몸을 누였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교육생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베르덴은 다중 연속성 이론의 창시자다.
직접 가르침을 맡은 이상 실패 따위는 없다. 후유증도 없을 것이다.
예상 교육 기간은 고작 3주.
그마저도 겔톤의 노력 여하에 따라 더 줄어들 수 있다. 아니면 길어지거나.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세계를 통틀어도 이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이곳이 유일하다는 걸.
겔톤 로드니.
그는 운이 좋았다.
“으어어…… 어어…….”
이 순간이 훗날 추억이 될지 악몽이 될지 모르겠지만.
* * *
약 일주일이 지났다.
겔톤은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마음가짐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말이다. 얼굴이 날이 갈수록 수적해진 탓에 페르네가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그의 눈동자에는 샛별과 같은 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마법을 배우기라도 한 것 같은 열정적이고, 열성적인 마법사의 그것이었다.
고통이 가중화되며 기절의 빈도수가 늘긴 했다.
그런 만큼 겔톤은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성장했다. 이론을 배웠고, 모르는 건 빠짐없이 물어봤으며, 여관으로 돌아가선 복습했다.
말뿐인 각오가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베르덴은 남는 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혔다.
아주 정교한 마법진이 가득한 도면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심에서 베르덴은 손을 바쁘게 놀렸다.
그리고.
“……완성이다.”
추리고 추려 총합 여섯 개의 마법진으로 구성된 설계도.
하나같이 따라 그릴 수도 없을 정도로 기하학적인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이걸 그대로 원하는 형태의 마석에 세공하면 끝이다.
베르덴이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지치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곧장 설계도를 챙기고 페르네의 주점으로 향했다.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페르네.
그녀의 카운터 맞은편에는 거친 삶을 살아온 사내가 있었다.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올 때마다 아는 얼굴하고 마주치는군.”
그 목소리에 사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베르덴과 마주쳤다.
“여긴 무슨 일이지?”
“빌린 돈 독촉하러 온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페르네가 부른 거야.”
대부업자 바르톨.
베르덴에게 2억 2천만 엘크를 빌려준 그가 단호히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