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배움 (2)
베르덴은 페르네에게 요청할 게 있었다.
하지만 잠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급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겔톤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의뢰자이기도 하니.
우선순위를 바꾼 베르덴이 겔톤과 마주 앉았다.
“모험가 길드에서 지원 요청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잘 해결하신 겁니까?”
“아, 그때는 말을 못 하고 떠나서 죄송합니다. 언데드 때문에 워낙 급한 상황이라고 듣는 바람에 곧장 남부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집결지에서 동료들과 합류했지요.”
모험가 파티 만하.
개개인으로는 백금 등급이나, 파티로는 미스릴 등급. 대규모 토벌에 있어서 주축이 될 수준의 강자들이었다.
베르덴이 겔톤을 바라봤다.
깨끗했던 장비가 이곳저곳 해져 있었다.
“상황이 많이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예, 저희들에게도 이만한 규모의 토벌은 처음이었는데…… 특히나 주변 상황이 최악이더군요.”
질서 없는 피난길, 도망친 영주, 발생하는 범죄.
수천의 언데드 군세가 시체를 양산하고, 죽음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시체는 언데드로서 되살아난다.
가장 심각했을 때는 예상 언데드의 숫자가 7천에 육박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그 숫자가 전부 뭉친 건 아니어서 각개격파를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를 포함한 고위 모험가가 각 조의 리더를 맡아 움직였는데…… 특이한 모험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특이한 모험가?”
“이명이 도살자였나? 징계를 받아 일시적으로 모험가 자격을 박탈당한 사내였는데, 상황이 워낙 심각하니 길드에서 토벌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조를 이루지 않고 홀로 움직이겠다고 하지 뭡니까?”
당연히 길드에선 거절했다.
백금 등급 정도의 전력을 쉽게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으니까.
“그러자 안 죽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뛰쳐나가더군요, 말릴 새도 없이. 참으로 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혼자서 언데드 무리에 정면 돌파라도 한 겁니까?”
“엇. 그걸 어떻게…….”
도살자 갈리아크.
그 전투광은 그럴 것 같았으니까. 경매장에서 구한 무기, 훼월을 원 없이 휘두르며 껄껄 웃고 있을 게 뻔했다.
물론 토벌 보수도 챙기고 말이다.
“혹시 아는 분입니까?”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름만 들어 본 정도입니다.”
“아, 그렇군요. 크흠, 어쨌든 그런 사람들의 활약 덕분에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언데드 잔당만 처리하면 되는 터라 금 등급 이상의 모험가는 대부분 철수한 상황입니다.”
피해는 컸지만 큰 고비는 넘겼다.
나머지는 하위 모험가가 처리해 줄 것이다. 고위 모험가들에겐 별로 이득은 없어도, 그들에게는 큰 실적이자 돈이 될 테니까.
업계 종사자로서의 마땅한 양보였다.
“아 참, 그리고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겔톤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꾸몄다. 베르덴은 그때마다 적절하게 반응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긴 술자리가 아니다.
회포를 풀며 친분을 나누기 위한 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이건 그저 과정일 뿐이다.
겔톤은 그간의 일들을 쏟아 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베르덴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겔톤의 목이 쉬어 갈 때쯤이었다.
“이제 준비가 되셨습니까.”
겔톤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주점에 감돌던 이야기 소리가 사라지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깍지를 낀 손을 식탁 위로 올린 겔톤이 조용히 말했다.
“그간…… 많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제가 바라는 꿈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순간이 괴로울지언정 큰 어려움은 없다. 그것이 겔톤의 삶이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다 해도 고난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한 자신감에는 언제나 젠티르 마탑 출신이라는 배경이 존재했다.
언젠가 자신이 마탑의 주축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벽을 만났다.
당황스러웠다.
남들처럼 실패하고 무너질까 무서웠다.
고민 끝에 마탑을 떠나 모험가의 길에 들어섰다.
동료들을 만나 토벌을 함께하며 어느새 고위 등급에 올랐다. 힘들고 재밌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강해지기도 했다.
하나 결국 제자리다.
성장은 너무도 더뎠고 5위계의 빛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운 좋게 천재 마법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지만 겪어 본 적 없는 가시밭길이다.
틀을 부순다…….
마법사로서 쌓아 왔던 탑이 무너지는 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 정상적인 사고를 회피하고, 육체적 고통으로 정신을 흐트러뜨렸다.
도망치는 건 쉬웠다.
그리고 동료들과 만났다.
“스칼드, 버민, 루비나, 케디언……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애셔 님을 고용했듯, 늘 그렇게 다른 마법사를 고용해 의뢰를 해 왔던 거죠.”
평소대로였다.
겔톤이 없어도, 그들은 모험가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 세상은 분명 그대로일 거라고. 그렇다면 내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가치란 게 있기는 했던 걸까? 나의 삶은 무의미했나? 앞으로도 그럴까?”
겔톤이 피식 웃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니 말도 제대로 안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했죠. 그때, 멍하니 서 있는 저에게 스칼드가 다가왔습니다. 파티에서 방출하겠다는 얘기가 들려올 것 같았습니다. 그 정도로 저는 제대로 한 게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저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역시 우리 다섯이 모여야 모험가 파티 ‘만하’지!’라고 하더군요.”
든든한 리더, 스칼드.
장난기 가득한 전사, 버민.
까칠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궁수, 루비나.
언제나 온화한 중재자인 성직자, 케디언.
그리고 할 때는 하는 마법사, 겔톤까지.
많은 민폐를 끼쳤음에도 그들은 그를 줄곧 동료로서 여기고 있었다.
그제야 겔톤은 깨달았다.
이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걸.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로서 동료들과 모험을 같이하는 것이 꿈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겔톤이 손을 꽉 쥐었다.
“저는…… 마탑을 버리겠습니다.”
마탑에서 쌓아 온 상식, 지식, 자부심과 아집 그리고 자그마한 우월감까지 전부 버리겠다.
벽을 넘든 넘지 않든 간에 젠티르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저 한 명의 모험가로서 살아갈 것이다.
순수하게 마법을 추구하고 동료들을 지키는 마법사로서.
이것이 겔톤의 각오였다.
“애셔 님, 다시 한번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겔톤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탑이라는 위대한 배경을 버리겠다는 마법사. 나이 어린 마법사를 대하는 태도에는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뭐든지 하겠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무너지지 않겠습니다.”
겔톤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 그는 이미 틀을 부쉈다.
그러니 이제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 그 역할은 온전히 의뢰를 받은 베르덴의 것이었다.
“내일 오전, 슬론 숲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길드 연무장도 아니고 페르네의 주점도 아니다.
새로운 장소다.
그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르침을 의미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겔톤이 이내 미소를 띠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겔톤이 주점을 나섰다.
줄곧 처져 있던 어깨에는 어느샌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탑을 버린 마법사라.’
설마 그만한 각오까지 할 줄은 몰랐다.
처음 보는 경우라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마탑을 부순 마법사라는, 자신의 타이틀보다는 훨씬 덜하긴 하지만.
끼익.
그때, 주점의 안쪽 문이 열렸다.
페르네가 정령과 함께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혹시 이야기 끝나셨나요?”
끝났다.
이제 다른 대화를 할 차례였다.
* * *
“멀쩡히 돌아오신 걸 보면 다행히 잠입 의뢰는 성공하셨나 보네요.”
“당연하지.”
준비는 했지만 사실 운도 따르긴 했다.
만약 지하 감옥에서 흔적을 찾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순조롭게 완수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쪽은 어떻게 됐지?”
“저도 마찬가지예요. 용병단장 게울, 미친 마약상 톨라브, 거상 다리오에다가 마담 넬리타하고 그 외 실종된 자들까지…… 하나같이 거물급 악당들이라 긴장했는데, 제 정보원들이 후작가하고 손발이 나름 잘 맞더라고요. 빈테르트를 제외하고 추적이나 감시나 완벽했어요. 거의요.”
“거의?”
“하나 놓친 게 있거든요. 게울 용병단의 간부인 자롤프가 약 스무 명가량 되는 용병들을 데리고 사라졌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어요.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후자에 가깝겠지.”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그랬으니까.”
“…….”
페르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잠깐 서늘함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야 익숙하다. 아니, 오히려 약과라고 할 수 있다. 평소의 그였다면 자롤프가 아니라 게울을 죽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놓친 게 아니라 죽은 거라서. 덕분에 이번 의뢰는 완벽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후작가에게…….”
“말 안 해도 될 거다. 클란드가 직접 보고 있었으니 알아서 전달했겠지.”
“그럼 저는 여기서 커피나 마시고 있으면 되는 거죠?”
페르네가 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얼음이 담겨 있어 차가운 감촉이 입술을 적셨다. 여름에 진입한 지금 날씨에 마시기 적당한 음료였다.
베르덴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휴식을 즐기는 중에 미안하지만 의뢰할 게 하나 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죠?”
“유능한 마석 세공사를 한 명 수배해 줘야겠어.”
베르덴이 구상한 엘프 회복용 마법진은 아주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평소처럼 단순히 마력으로 마법진을 구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정확도는 기계적이어야 하며, 오차가 생겨도 곧장 대처가 가능할 정도로 체계적이어야 한다. 거기서 필요한 게 바로 마석이다.
마석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광석이나 다름없다.
그 쓰임새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으며, 세공을 거친다면 용도는 더욱 확장된다. 예를 들자면 비행정의 엔진과 같이 다수의 마법진을 연계하는 것처럼.
페르네가 커피 잔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음, 생각나는 후보가 몇 있긴 한데 확실하진 않네요. 알아보고 확실히 정해지면 말씀드릴게요.”
“급할 필욘 없다. 설계도를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단순히 설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세한 검증을 거쳐 자그마한 오류조차 잡아내야 하니까. 그 과정은 대부분 머릿속으로 진행될 것이다.
‘다행히 특수한 성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며칠은 걸린다.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는 필요하다.
“세공사는 직접 만나실 건가요?”
“아니, 대행이면 충분해.”
“알겠어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둘 테니까, 준비되시면 설계도를 제게 넘겨주세요.”
“그래, 세공 비용은 그때 같이 보내지.”
이걸로 마석 세공 건은 해결됐다.
페르네가 맡았으니 알아서 제대로 된 세공사를 선별하겠지.
그럼 다음이다.
“블루,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반짝?
정령이 작게 명멸했다.
그 감정에는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베르덴이 정령에게 용건이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흔치 않은 일에 페르네 또한 흥미를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베르덴은 잠깐 고민했다.
과연 지금의 얘기를 페르네가 들어도 될지 말이다.
‘상관없겠지.’
정보가 새어 나갈 이유는 없다.
같이 후작가의 의뢰에 가담한 마당에 숨길 것도 아니었고. 이미 한배를 탄 지 오래였다.
베르덴이 블루를 직시했다.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에서 알아낸 ‘가디언 엘프’의 정체.
그것은 ‘세계수’를 수호하는 엘프에게 붙여진 칭호다. 그리고 다른 명칭으로는 이렇게 불린다.
정령의 계약자, 정령사.
“네 계약자를 찾았다.”
……?
블루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저 계약자가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부웅! 부웅! 부우웅!
블루가 거세게 발광하며 주점 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반응에 페르네가 눈을 깜빡였다.
“어? 블루가 왜 저래요? 그 계약자라는 게 대체 뭐길래…….”
“엘프.”
“아, 엘프…….”
페르네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커피를 마셨다.
엘프, 엘프…… 어감이 생소하긴 한데 분명 어디서 들어 봤는데.
‘아니, 잠깐.’
이윽고 페르네가 눈을 부릅떴다.
‘엘프?!’
푸웃!
커피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중력 장막>
암자색의 보호막이 베르덴을 감쌌다.
귀중한 장비에 커피 냄새가 배는 건 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