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89화 (189/366)

189화 배움 (1)

암상인과 그를 호위하는 벙어리 말테드.

비밀 사교장이 끝난 지금 그 신분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베르덴과 클란드는 이동 도중에 도시, 타운 그리고 작은 마을을 거치며 모습을 바꾸었다.

평범한 말은 큰 체격의 짐말로.

허름한 수레는 물자 운반용 마차로.

엘프가 들어가 있는 오크통은 물자 상자로.

그리고 클란드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일원으로서, 베르덴은 마법사 애셔로서 로브를 푹 눌러쓰고 정체를 숨겼다.

그렇게 암상인은 자취를 감췄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행적을 감추는 건 당연한 거니까.

특히나 클란드는 이 방면의 전문가였다.

자롤프와 용병들의 죽음.

뒤늦게 그 사실을 게울이 깨닫는다고 해도 추적에는 손도 못 댈 터.

안전 가옥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했다.

비밀 연락망을 통해 후작에게 소식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거리가 멀어 어쩔 수 없이 야영은 불가피했다.

달빛이 환한 깊은 밤.

마법진을 구현해 은폐 및 안전을 확보했고, 마법으로 피운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낡은 로브로 몸을 덮은 클란드는 잠에 든 지 오래였다.

베르덴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수면욕보다 흥미와 지식욕이 더 컸기 때문이다. 며칠간, 여유 시간을 소비해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를 정독했다.

그가 감상을 내비쳤다.

‘이거……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군.’

인체 실험은 역겹고 잔혹하다.

그건 베르덴의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는 명제다.

하지만 글러트니의 박사.

윤리와 주관을 떠나, 그의 발상은 참신했고 실험은 경이로웠다. 그건 베르덴이라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위험해 그 자리에서 당장 박사의 실험 일지를 소각했을 정도로.

‘그에 반해 드레뷔스의 실험은 한심하다.’

엘프와 특이 형질 마법사의 시신을 재활용…… 이라고 쓰여 있지만 실상은 시체를 뒤적거린 게 전부다.

수십 개의 실험 결과는 실패 그리고 실패.

결과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 실험의 발상 자체가 죄다 진부하고 하찮기 짝이 없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시도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로.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성과라고 보이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주관적인 건 형편없어도, 객관적인 정보는 쓸 만하다.

엘프.

그저 아름답고 위험하며 정령과 친한 종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 일지 덕분에 엘프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엘프의 특성.

엘프의 사회.

엘프의 생활 방식.

저 금발 엘프를 칭하던 ‘가디언 엘프’라는 개념까지 말이다.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다.

당연히 베르덴은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엘프는 물과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반년간 생존이 가능하다.]

실험 일지에서 발췌한 문장.

이유로는, 독자적인 마력회로 덕분에 자연의 마력으로 생명 유지가 가능하다고 적혀 있는데, 이건 직접 확인하기 쉬운 내용이었다.

베르덴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의 금발 엘프가 누워 있었다.

나무 상자에 내내 방치할 수 없으니 상태를 확인할 겸 이렇게 한 번씩 바람을 쐬게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깨어 있지 못하기에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다.

물을 먹이려고 해 봤지만 엘프는 반사적으로 거부했다. 지난 며칠간 엘프가 먹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혈색 또한 그대로였고 살이 빠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부 위로 마력이 스며들고 있다.’

베르덴조차 집중해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양. 그러나 한없이 정순하다.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에 적혀 있던 대로 자연의 마력을 영양분으로 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반년간 버틸 수 있다는 걸 보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겠지만.

‘되게 신기한 종족이군.’

인간은 자연의 마력 자체를 다루지 못한다.

그렇기에 마석이라는 편리한 수단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엘프는 신체적으로 이런 구조를 타고나다니.

마법사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령도 비슷했지.’

정령은 정령석 상태에서 자연의 마력을 흡수해 부활한다.

그 방식을 통해 되살아난 게 바로 블루였다. 베르덴의 마력이 자연의 마력 이상으로 정순하다는 증명.

‘어쩌면 엘프도 같은 방식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근거도 없이 무작정 시도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이종족이라고 해도 그건 인체 실험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엘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이 필요하다.

자연의 주민, 엘프.

베르덴은 그를 응시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 *

라인즈의 북쪽.

약 이틀 거리에 있는 작은 타운에 베르덴과 클란드가 발을 디뎠다. 마차를 끌고 외곽에 있는 어떤 건물로 향했다.

3층 규모의 집. 그 옆에는 굳게 닫힌 허름한 창고가 있었다.

‘여기가 후작가가 숨겨 둔 안전 가옥인가.’

클란드가 수동으로 창고의 문을 개방했다.

끼기기기긱. 기름칠을 전혀 하지 않은 모양인지 소리가 상당했다. 마차를 끌고 천천히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집과 연결된 문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허허허, 우리 친구들이 돌아왔군.”

마도사 에드몬.

그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클란드가 로브를 들추며 곧장 예를 갖췄다.

“이런. 에드몬 님께서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들이 아주 놀라운 걸 가져왔다고 하던데 당연히 내가 직접 와야 하지 않겠나. 안 그런가, 애셔?”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마력을 펼쳐 물자 상자를 마차에서 내렸다. 뚜껑을 열자 금발 엘프가 고스란히 시야에 비쳤다.

“허허…… 진짜 엘프로군. 이종족을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인데.”

“이종족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닐세. 그만큼 아주 흥미로운 삶을 살아왔지. 한참이나 어린 후배님한테 한 방 먹기도 하고 말이야. 허허허!”

에드몬이 베르덴을 흘기며 미소 지었다.

내기에서 지고 밑천까지 털린 게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베르덴이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를 건넸다.

“이건 실험실에 있던 마법사에게서 확보한 겁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오오, 그렇군. 어디 보자…….”

에드몬이 빠르게 실험 일지를 훑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음, 확실히 대체로 실험의 과정과 결과만 서술되어 있을 뿐이군. 엘프라는 이종족에 대한 정보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렇다는 건 이 엘프가 바로 핵심이라는 건가.”

세 사람의 시선이 엘프에게 머물렀다.

“어쨌든 둘 다 아주 고생 많았네. 옛 왕성에서 몰래 엘프를 빼돌리다니. 각하께서도 적잖이 당황하시더군. 그런 반응은 참 오랜만이었어.”

“애셔 덕분입니다.”

“자네 덕분이기도 하지. 원수들 틈에서 화를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아, 크흠.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군. 피곤할 텐데 자네는 먼저 올라가서 쉬도록 하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

클란드는 곧바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애셔, 자네와 같이 의뢰를 하게 되어 영광이었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도록 하지.”

“다음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클란드가 건물로 들어갔다.

기절한 엘프를 사이에 두고, 에드몬과 베르덴이 시선을 마주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렇긴 하네. 그런데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엘프를 바라보는 시선에 복잡한 생각이 담긴 걸 보면 말일세.”

눈치챘나.

역시 마도사다운 안목이다.

“하나 요청드릴 게 있습니다.”

“오, 요청이라. 그게 무엇인지 참 궁금하군. 가능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테니 한번 원 없이 말해 보게.”

“의뢰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베르덴이 받은 의뢰는 ‘1왕자의 성에 잠입해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 알아 오는 것’이다. 엘프라는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보란 듯이 데려왔다.

이것으로 사실상 의뢰는 끝난 셈이다.

에드몬은 베르덴의 의중을 짐작했다.

“그 뜻은…… 이 엘프에게 볼일이 있다는 거군.”

“미리 전달드렸다시피 엘프의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내부 조직이 일부 파괴되어 자연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

포션의 반동을 견딜 만한 몸 상태가 아닌 데다가 신성력을 통한 치료도 소용이 없다.

루아스교의 기적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작용하니.

말인즉슨.

“엘프가 언제 깨어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최악으로는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그대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네. 소식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시간이 있다면…….”

“저에겐 이미 대책이 있습니다.”

“뭐?”

에드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아니, 그건 묻지 않겠네. 자네가 말해 줄 리가 없을 테니까. 보다 중요한 건 자네의 목적이겠지. 그래, 엘프를 직접 깨워서 뭘 하고자 하는 건가?”

“엘프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대화……? 그게 전부인가?”

“예.”

물론 무슨 대화를 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정령, 궁정 마법사단장, 왕가의 실험 등 물어볼 게 아주 많았으니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에드몬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내 수염을 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네. 그럼 내 권한으로 의뢰를 연장하는 걸로 하겠네. 각하께는 추후에 전달하지.”

“괜찮은 겁니까?”

“자네가 데려온 엘프가 아닌가. 그 정도 권리를 주장할 이유는 충분하지. 이미 각하의 의뢰로 1왕자의 성까지 잠입한 마당에, 자네가 가져온 정보를 숨길 이유도 없고. 그래도 그 대책이라는 것이 언제쯤 준비되는지 말해 줄 수는 있겠지?”

“적어도 2주 정도는 걸릴 겁니다.”

안전 가옥까지 오면서 큰 틀은 생각해 두었다.

다만 세부적인 건 생각만으로 끝낼 수 없었다. 이건 시행착오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음, 그럼 자네가 준비될 때까지 엘프를 안전히 보호하고 있겠네.”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는 건…….”

“아, 그렇지. 사실 조언을 하나 할까 해서네. 각하께서 이번 의뢰의 보수로 준 고대 동전은 잘 가지고 있나?”

“공간가방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지금처럼 잃어버리지 않게 아주 잘 보관하게. 그건 말 그대로 왕국 제일의 후작가에게서 직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가 그 자체니까. 그러니 아주 요긴할 때 쓰도록 하게. 이 말이 해 주고 싶었네.”

‘……백지수표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의미가 큰 건가.’

베르덴은 에드몬의 조언을 기억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뭐, 사실 자네라면 알아서 하겠지. 그럼 피차 용건을 다 본 것 같군.”

에드몬이 엘프가 담긴 상자를 허공에 띄웠다.

“연락을 기다리겠네.”

에드몬이 엘프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성공적으로 엘프를 전달한 베르덴은 곧바로 타운을 나섰다. 여기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으니.

<비행주파>

베르덴이 하늘을 질주하며 아세른으로 향했다.

* * *

엘프는 자연의 마력과 생명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베르덴의 마력은 자연보다도 더욱 정순하다. 어떤 방향으로는 반응을 보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령석처럼 강제로 마력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엘프의 내부.

자칫하면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대참사다.

보다 세밀한 조절이 필요하다.

간접적으로 마력을 전달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거기서 생각한 것이 바로 정령 블루의 존재였다.

‘블루는 내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전용 마법진을 설계해 순차적으로 마력을 이동시킨다.

그렇게 엘프의 상태를 보며 천천히 그리고 균일하게 마력을 전달할 수 있으면 차도가 보일 게 분명할 터.

베르덴은 속도를 높여 페르네의 주점에 도착했다.

주점은 닫혀 있다.

페르네가 정보상으로서 일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벌컥.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페르네는 아니다.

하지만 눈에 익숙한 옷차림이었다.

베르덴은 그가 누군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겔톤?”

“아! 오, 오랜만입니다, 애셔 님.”

이론을 갈구하는 마법사 겔톤.

언데드 토벌을 갔던 모험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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