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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87화 (187/366)
  • 187화 성공 (1)

    베르덴이 확인했을 때 금발 엘프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숨이 붙어 있다고는 하나, 내부 조직이 일부 붕괴했으니 몸이 제대로 기능할 리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겠지.

    그 판단은 분명 정확했을 터.

    ‘그런데 드레뷔스를 죽일 줄이야.’

    단순히 분석을 잘못했던 걸까.

    아니면 고통을 이겨 낼 다른 요소가 있던 걸까.

    분명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초점이 흐릿한 엘프의 연두색 눈동자에는 분노와 증오, 혐오 등 온갖 감정이 들끓고 있었으니. 언제나 예외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엘프의 시선은 베르덴에게 머물렀다.

    하나 그가 아닌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엘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온다.’

    베르덴이 즉각 자세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엘프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맹렬한 돌진이었으나 발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소리 없는 화살과 같은 움직임. 엘프는 맨손이었으나 그 속도는 기를 활성화한 전사 이상. 뛰어난 신체 능력이다.

    ‘하지만 움직이는 게 부자연스럽다.’

    몸 상태가 멀쩡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능한 충격을 최소화해 기절시키는 수밖에.

    터엉!

    엘프의 손날이 마력방벽을 울렸다.

    충격이 흡수되며 푸른빛이 명멸한다.

    베르덴이 스태프로 엘프의 몸을 가격한 뒤 반응을 살폈다.

    숨을 토하며 비틀거리는 엘프. 실제 충격에 비해 피해가 커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직전의 감각을 떠올린 베르덴이 손을 내밀었다.

    <마력폭발>

    1위계 기초 마법.

    엘프의 가슴 부근에서 순수한 마력폭발이 일어났다.

    최대로 위력을 높여도 사람 하나 날려 보내는 게 전부인 수준이나, 몸속이 엉망인 엘프에게는 위협적이었다.

    털썩.

    “커억……!”

    엘프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실시간으로 엄습하던 고통이 마력폭발로 인해 가중화된 상황. 정신력이 강해도 이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터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프는 증오심을 지우지 않았다.

    까드드득.

    치아가 서로를 짓누른다.

    잇몸에서 터져 나온 피가 엘프의 입가에 맺혔다.

    “인…… 간……!!!”

    흰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이내 엘프가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뻐억!

    둔탁한 충격에 엘프는 시야가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증오심과 분노는 결국 육체의 한계를 이겨 내지 못했다.

    엘프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눈이 반쯤 감긴 그에게서 미약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종족을 때려 보는 건 처음인데.’

    베르덴이 손을 쥐었다 폈다.

    감각을 극대화하여 조절한 손대중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다. 엘프의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뭐, 어쨌든.’

    드레뷔스도 죽었고, 엘프도 확보했으니 상황은 종료.

    남은 건 뒤처리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엘프를 이 역겨운 실험실에서 내보내는 것. 이미 그 루트는 생각해 둔 상태다. 베르덴이 마석 하나를 꺼내 마법진을 구현했다.

    구속 마법진, 디테인(Detain).

    마력의 사슬이 엘프를 단단히 옭아맸다.

    만에 하나라도 운반 도중에 깨어났다간 위험하니. 엘프를 둘러멘 베르덴이 실험실을 나왔다. 피가 묻어 있는 마력 구동 승강기에 올라타 버튼을 눌렀다.

    기기기기기긱.

    마찰 소리와 함께 베르덴과 엘프가 지하 아래로 내려갔다.

    * * *

    아리엔테를 둘러싼 인공 호수.

    그 상수도와 하수도는 각각 다른 자연 호수와 연결되어 있다.

    평소 물이 나가고 들어오는 양이 정확하게 같은 설계.

    그렇게 호수의 높이를 유지하며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한다. 때론 상수도와 하수도의 입구를 다르게 조작해 기후에 맞게 대응하기도 한다.

    폐쇄되지 않는 인공 호수.

    베르덴, 아니 엘프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탈출구다.

    <암시>

    풍덩.

    베르덴이 엘프를 데리고 하수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호흡을 유지하면서 수류를 움직이는, 이 복합적인 마법 조작은 트리플 캐스팅을 깨우친 마법사만에게만 가능한 영역.

    익숙지 않은 물속이라 베르덴은 평소보다 신경을 더욱 기울였다.

    ‘……저긴가.’

    다른 호수와 연결된 하수도의 경계선.

    녹슬지 않게 마법 처리가 된 금속 문에는 물이 지나다니는 작은 틈새들이 뚫려 있었다.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넓지는 않다.

    지형조작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때려 부수는 수밖에.

    흔적이 남겠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눈치챌 때쯤, 이미 베르덴은 이곳에서 자취를 감췄을 테니.

    “후읍.”

    베르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어 엘프의 호흡을 제외한 두 마법을 해제하며, 여유가 생긴 마력회로를 다른 마법으로 전환했다.

    더블 캐스팅.

    <락 블래스터>

    ───쩌어어어어어엉!

    두 개의 거대한 암석이 문과 충돌했다.

    퍼져 나가는 충격에 수류가 크게 술렁였다. 5위계 마법에 해당하는 위력에 문이 크게 우그러졌다.

    그리고.

    <격류>

    <어스 자벨린>

    대지의 창이 수류를 따라 가속했다.

    정확히 우그러진 문의 중심에 격중하자 큰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와 함께 유속이 급증하며 베르덴과 엘프를 끌어당겼고, 애써 그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푸확!

    베르덴이 엘프를 끌고 자연 호수에서 빠져나갔다.

    흠뻑 젖은 두 사람. 가볍게 불을 일으켜 낮아진 엘프의 체온을 높였다.

    이렇게 엘프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다음은 엘프를 숨겨 둘 차례.

    ‘내가 회수하러 오기 전까지.’

    <지형조작>

    쿠구구구구구……!

    지면 아래에 작은 공동을 생성했다.

    그 중심에 엘프를 눕혀 놓은 뒤, 중상급 마석을 여러 개 꺼내 나열했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건 필요한 손해다.

    베르덴이 마력의 실을 사용해 구속 마법진의 틀을 부쉈다.

    그러곤 안쪽에 있는 구성 부분의 일부를 마력의 실과 연결한 뒤 마석에 이어 붙였다.

    그것을 반복하길 여섯 번.

    인위적으로 마법진의 지속 시간을 늘린 개량 방식으로, 다름 아닌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가 창안한 개량 마법진.

    마탑에서 실험당할 당시 터득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걸로 도중에 마법진이 풀릴 일은 없겠지.’

    확인을 마친 베르덴이 공동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숨구멍은 일부 제외하고 입구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 후 은폐 마법진으로 덮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숨겨 놓았다.

    ‘이제 실험실만 남았군.’

    호흡을 들이마신 베르덴.

    그가 다시금 호수로 뛰어들었다.

    * * *

    베르덴이 드레뷔스의 실험실로 돌아왔다.

    엘프를 운반하기 전과 차이는 없었다. 고요한 실험실 안에는 여전히 피비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드레뷔스였던 것을 일별한 베르덴이 염동력을 펼쳤다.

    실험실 내에 있는 모든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끌어당겼다.

    드레뷔스의 실험 일지.

    베르덴이 제 손에 들어온 종이 뭉치를 몇 장 뒤로 넘겼다.

    ‘대부분 엘프에 대한 거군.’

    엘프의 특성, 사회 및 체계.

    그리고 가디언이 무엇인지에 대한 엘프의 직급 또한 직접 쓴 필체로 기록되어 있다. 그 양은 꽤나 방대했는데, 대중적인 책에서는 접할 수 없는 정보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흥미가 끌린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살펴볼 생각은 없었다.

    정보의 중요성은 추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터.

    베르덴은 실험실을 샅샅이 뒤지며 중요하다 싶은 건 모조리 챙겼다. 그렇게 모은 서류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공간가방에 그대로 보관했다.

    텅텅 빈 실험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흔적만 지우면 끝이군.’

    본래라면 이 상태로 떠나는 게 초기의 계획.

    하지만 침입의 흔적을 깡그리 없앨 수 있는, 그럴듯한 개연성이 있는데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베르덴이 승강기를 타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화염 골렘이 지나간 경로를 확인하고 난 다음 감옥 중심부로 향했다.

    오래된 감옥 벽.

    그 위에 손을 얹고 마력을 흘려보냈지만 무엇도 감지되지 않았다. 아마 골렘 핵의 마력이 차단되었기 때문이겠지.

    ‘어디까지나 드레뷔스의 말이 맞다면 말이지만.’

    덜컥, 덜컥.

    베르덴이 주저 없이 벽을 들췄다.

    그러자 시야에 빈 공간이 비쳤다.

    그 중심에는 구체로 가공된 마석이 놓여 있었는데, 주위로 희미한 마력의 막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석 자체에 마력 차단막을 새긴 건가.’

    이런 식으로 천연 골렘을 배회하게 만들어 경비로 삼다니. 상당히 신박한 아이디어였다.

    작게 감탄한 베르덴이 조심스레 핵을 집어 들었다.

    차단막이 유지되는 걸 확인하며 다시 실험실에 침입했다.

    차단의 마법진은 이미 지속 시간이 끝나 사라진 상태.

    베르덴은 화염 골렘의 핵을 드레뷔스의 시신 옆에 놔두었다.

    그리고.

    까앙───쩌저저저적!

    오큘러스를 단번에 휘둘러 차단막에 충격을 주었다.

    새겨진 금이 수십 갈래로 쪼개짐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다. 허공으로 흩어진 마력. 화염 골렘과 핵을 가로막는 벽이 사라졌다.

    쿵……! 쿵……! 쿵……!

    계단 쪽에서 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핵에서 멀찍이 떨어진 베르덴이 입구를 주시했다. 이윽고 나선 계단을 오른 화염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르르르륵.

    화염 골렘이 내뿜는 열기와 발자국에 남겨진 불길이 실험실을 태우기 시작했다.

    퍼억! 핵 옆에 있던 드레뷔스의 시신은 이물질로 취급되었는지 골렘에게 짓밟혀 형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쿠웅.

    핵을 되찾은 화염 골렘은 드레뷔스의 실험실에 주저앉았다. 아주 얌전히, 안에 있던 모든 걸 서서히 불태우면서.

    ‘완벽하군.’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갔다.

    베르덴은 내심 흡족해하며 유유히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 * *

    정확히 오후 4시.

    클란드는 전력을 다해 베르덴과 약속했던 시간까지 회의를 진행시켰다. 1왕자 발르그나는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회의 때문에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래도 성격상 인사는 받아야 했다.

    아리엔테 성의 알현실.

    호화로운 의자에 앉은 1왕자 앞으로 비밀 사교장의 참석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로베르트를 필두로 한 빈테르트는 한쪽에 비켜선 채 고개만을 숙였다.

    암상인 클란드가 대표해 말했다.

    “회의를 주도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발르그나 전하.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다. 추후의 일을 기대하고 있겠다.”

    “물론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다시금 허리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과도한 예법이긴 했으나, 1왕자의 오만한 성향을 맞춰 주려면 어쩔 수 없었다. 1왕자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축객령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알현실을 나섰다.

    게울, 넬리타, 다리오, 톨라브.

    이들은 서로 간의 별다른 작별 인사 없이 측근들을 데리고 떠났다. 물론 로베르트에게 정중히 목례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클란드가 중절모를 쓰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들어가시오, 로베르트.”

    “네, 나중에 보도록 하죠.”

    “내 능력이 필요하면 불러 주시오. 그럼 이만.”

    클란드가 몸을 돌려 복도를 걸었다.

    말테드로 위장한 베르덴은 묵묵히 그 곁을 따랐다.

    집사 세누엘의 배웅을 받으며 성문을 나선 두 사람.

    천천히 인공 호수의 다리 위를 걷고 도시의 거리에 들어섰다.

    클란드가 종종 말을 걸었지만,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타인의 눈이 닿는 장소에서는 철저하게 말테드를 연기했다.

    이윽고 맡겨 놓았던 말을 회수한 베르덴과 클란드가 에슬라를 빠져나갔다.

    초저녁의 하늘.

    도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후에야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엘프는 확보했습니다.”

    “휴우, 정말로 고생했네, 애셔.”

    클란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덴은 그런 그에게 실험실에서 일어났던 과정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란드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화염 골렘을 실험실에 남겨 뒀단 말인가?”

    “예.”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염 골렘은 침입의 흔적을 철저하게 불태웠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든 터라, 엘프를 빼앗겼는지 드레뷔스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잘하면 누군가 침입한 게 아니라, 화염 골렘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인식될 수도 있었다.

    ‘하수도 쪽에 남긴 흔적을 보면 다르겠지만.’

    그걸 알아채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만약 내일 운반자가 멋모르고 실험실을 열었다간 화염 골렘이 난장판을 만들 테니까. 여러모로 수습하기에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 덕분에 1왕자는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허…….”

    클란드가 경악에 가까운 감탄을 내비쳤다.

    “자네는 참…… 아주 대담하군. 음, 이 말 외에는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 거침이 없는 게 칼리아 님 이상이군.”

    “그래도 저는 비행정을 훔칠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거보다 이게 더 심한 거 같은데…… 크흠, 어쨌든. 이제 자네가 확보한 엘프만 회수해 돌아가면 끝이군. 그야말로 생각 이상의 성과야.”

    클란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박차를 가하며 속도를 높이려던 그때였다.

    “멈춰라, 암상인.”

    길을 점거하고 있는 용병 무리.

    용병단장 게울의 측근 중 하나가 베르덴과 클란드의 앞길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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