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85화 (185/366)

185화 협조 (1)

가디언급 엘프.

운반자는 금발 엘프를 그렇게 지칭했다.

베르덴은 엘프를 포함한 이종족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흥미가 가지 않았을뿐더러, 마탑에서 마법 지식을 독학하고 또 연구하느라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으니.

기껏해야 대중적인 서적 몇 개를 읽은 게 전부였다. 당연히 엘프들 사이의 서열이 어떤지, 어떤 힘을 다루고 있는지도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저 금발 엘프가 다른 엘프와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베르덴은 운반자들의 이동 방향을 살피곤, 공간가방에서 중급 마석을 꺼냈다. 한바탕 일을 벌이기 전에 준비해야 할 밑 작업을 위해서였다.

가장자리에서 천장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그 뒤에 각각의 마석을 중심으로 동일한 마법진을 작성했다. 별로 손이 가는 술식은 아니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걸로 완성.’

마무리를 짓고 검지손가락 끝에 맺힌 마력을 가라앉혔다.

마법진에 실수는 없다.

스스로의 실력을 자신한 베르덴이 곧장 금발 엘프가 운반된 방향으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석등의 은은한 빛이 감도는 공간이 나타났다.

수술 도구들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아주 깔끔하게 차려입은 드레뷔스가 서 있었다.

그가 환한 얼굴로 금발 엘프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오오! 정말로 살아 있어! 진심으로 감격스럽군. 내 살아생전에 살아 있는, 그것도 가디언급 엘프를 보게 될 줄이야……! 당장 만져 봐도 되겠지?”

“이 시간부로 엘프의 소유권은 드레뷔스 님에게 양도되었습니다.”

“허락을 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미소를 지은 드레뷔스가 두 명의 운반자를 제치고 당장 엘프를 어루만졌다.

팔과 어깨 그리고 다리, 가슴 부근과 복부. 마지막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 본 그가 감탄을 내비쳤다.

“속이 이렇게나 엉망이 되어 있는데 살아 있다니…… 확실히 여태껏 봐 왔던 엘프 시체들과는 결이 다른 육체야. 하, 보기만 해도 연구 의욕이 샘솟는 것 같아. 이런저런 실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군. 아, 볼일 끝났으면 너희는 이만 나가 봐라. 오늘은 이 엘프를 이리저리 뜯어볼 거니까 괜히 방해하지 말고.”

“예. 하지만 주의하실 게 하나 있습니다.”

“……?”

“이 엘프는 실험 도중 깨어나 마법사 여섯을 살해한 전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몸 상태로는 의식을 되찾는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도 못하겠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싸늘한 시체가 아닌 생물입니다. 이 점 유념하시길.”

“유념? 나보고?”

운반자의 충고에 드레뷔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금발 엘프의 머리를 두들겼다.

“설령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해도 나한테 다가오지 못하고 얼어 죽을 텐데. 죽어 가는 실험체 따위한테 조심은 무슨.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참견하지 말고 가라.”

“알겠습니다. 부디 성과를 얻길 기원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운반자들이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미약한 진동이 울리고 나자 기척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실험실 바깥으로 나간 건가.

베르덴이 시선을 드레뷔스에게 향했다.

드레뷔스는 본인의 실험실에 낯선 마법사가 있는 걸 꿈에도 모른 채 금발 엘프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바로 심장이나 뇌를 건드는 건 위험부담이 크니까…… 손이나 발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니면 그나마 아직 망가지지 않은 내부부터 살펴볼까? 그러려면 출혈을 가능한 최소화해야…….”

드레뷔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방향을 정했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술 도구들을 뒤적거리다 찾는 게 없었는지 장갑을 벗고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침묵이 내려앉은 실험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

터벅, 터벅.

베르덴이 걸어 나와 아무렇지 않게 드레뷔스의 자리를 차지했다.

의식을 잃은 금발 엘프.

드레뷔스가 했던 것처럼 엘프의 몸을 지그시 눌렀다. 신체를 형성하는 조직 일부가 파괴되기라도 한 듯,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이렇게나 엉망이라.

‘어떤 강력한 힘이 안을 헤집었군.’

그것도 한순간이 아닌 장시간.

마법사로 치면 마력회로의 과부화가 지속되어, 마력회로가 파괴된 끝에 괴사한 경우와 비슷하다.

‘그런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는 하나뿐.’

자의적으로 과부화를 발생시키는 거다.

물론 그렇기에 매우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기도 했다.

자신의 마력회로를 파괴한다는 건, 스스로를 손가락부터 하나씩 잘라 가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만큼 머리를 하얗게 만들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의미였다.

대체 무슨 실험을 당했길래 이렇게 된 걸까.

뭐가 됐든 간에 고문 수준을 넘어선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베르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경험했기에 혐오할 수 있는 인체 실험.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 엘프라고 해서, 역겹다는 기분은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베르덴이 몸을 돌렸다.

정체 모를 약품들을 손에 든 드레뷔스가 서 있었다.

“응? 너는 누구지? 분명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내가 실험체 운반이나 할 걸로 보이나?”

그 말에 드레뷔스가 베르덴을 살폈다.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회색 방어구와 녹색 로브. 잿빛 머리칼과 벽안.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별난 외모에 그가 빈손으로 턱을 쓸었다.

“음, 확실히 못 보던 얼굴이군. 전하께 들은 게 없으니 왕가 쪽 인물은 아니고, 귀가 뾰족하지 않은 걸 보니 엘프도 아닌 것 같은데. 이곳에 무슨 볼일이지? 여긴 또 어떻게 들어왔고?”

“질문하는 건 네가 아니다.”

화아아아악!

삽시간에 피어오른 베르덴의 마력이 실험실을 휩쓸었다.

‘이건…… 마력감지?’

드레뷔스가 미간을 좁혔다.

1위계 기초 마법 중에서도 마력폭발도, 마력위압도 아닌 마력감지.

눈앞에 있는 불청객이 불순한 목적으로 실험실에 기어들어 왔다는 건 이해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력을 저렇게 운용하는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베르덴의 수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마석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던 마법진이 베르덴의 마력에 반응했다.

차단의 마법진(The Obstruction).

네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기동하며 서로 공명했다. 본래보다 성능이 강화된 마법진. 반투명한, 얇은 마력의 막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실험실 전체에 스며들었다.

천장, 벽면, 두 사람이 서 있는 바닥까지도.

마법진의 정체를 꿰뚫어 본 드레뷔스.

그가 눈썹을 씰룩이더니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시선이 닿아 있지 않았던 잠깐 사이에, 베르덴이 스태프 하나를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드레뷔스가 푸른 눈동자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이지?”

“너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목적을 밝힌 베르덴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협조 부탁하지.”

* * *

“뭐…….”

드레뷔스는 당혹감을 숨기기 못하고 벙찐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자신의 실험실에 숨어들어 온 것도 모자라, 마법진으로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고는 갑자기 협조하라니.

스태프를 들고 있는 걸 보나, 저 태도를 보나 이건 그냥 협박 그 자체였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현실이다.

이내 드레뷔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화가 나는 건 둘째 치고, 이 상황 자체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하하하하하! 협조? 협조라고? 내 살다 살다 실험실에서 강도한테 협박을 당할 줄이야. 그것도 1왕자 전하의 성에서! 이거 신선해도 너무 신선한 거 아닌가?”

스윽.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드레뷔스가 이죽거렸다.

“그나저나 너는 마법사인가? 마법사 강도라……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어떤 방법으로 쥐새끼처럼 여기에 기어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에스티리아 왕가의 궁정 마법사단 소속의 나, ‘드레뷔스 페온테로드’가 지키는 장소에 오게 되다니. 운이 없어도 더럽게도 없군.”

궁정 마법사단 소속이라.

‘생각보다 높은 조직에 속해 있군.’

그러니 당연히 아는 게 많겠지.

어느 정도 중요한 정보도 숙지하고 있을 테고. 여러모로 월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강하긴 할 것이다.

경지를 대충 가늠해 본다면 5위계 하위 언저리일 터.

‘뭐. 마도사여도 상관은 없지만.’

마법전에서 패배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으니.

그저 금발 엘프를 지키고, 실험실을 보존하며 어떻게 드레뷔스를 살려서 제압할지 계산하는 게 전부였다.

한바탕 웃은 드레뷔스가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손에 들고 있던 약물들이 떠올라 근처 책상에 안착했다. 품에서 세공된 지팡이를 꺼낸 그가 베르덴을 겨냥했다.

“뭐, 그래도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몸풀기로는 나쁘지 않겠군. 오히려 기대감이 더 차오르는 느낌이라 더 좋아. 너…… 이름은 모르겠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아, 물론 그 전에 치울 건 치워야겠지.”

드레뷔스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베르덴의 뒤에 있던, 온갖 실험 도구가 올려져 있는 책상 그리고 엘프가 실려 있던 카트가 날아가 벽면에 딱 붙었다.

염동력.

마력 조작 능력은 수준급이다.

‘엘프는 걱정 안 해도 되겠군.’

베르덴 이상으로 드레뷔스가 금발 엘프에게 신경을 쓰는 듯하니. 풋내기 마법사도 아니고 눈먼 마법이 엘프에게 착탄할 일은 없겠지.

마력회로를 더욱 강하게 활성화했다.

베르덴과 드레뷔스.

둘이 서로를 향해 무기와 마력을 겨누었다.

“오, 쥐새끼 마법사 주제에 꽤나 차분하군.”

드레뷔스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저 엘프 뺨치는 얼굴이 잠시 뒤에 어떤 식으로 일그러질지 궁금해졌다.

‘흠, 이제 보니 장비도 상당히 귀한 것 같기는 한데.’

얼려 죽인 뒤 가진 걸 빼앗고 남은 건 실험체로 삼는다. 살려 두면 갖가지 정보를 캐낼 수 있긴 하겠지만, 드레뷔스 딴에는 죽여서 흔적까지 지우는 게 더 편했다.

잘못하면 실험도 못 하고 1왕자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닐 테니까.

만약 발목이 제대로 잡혔다간 뭘 하기도 전에 무능력을 입증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살리든 죽이든 속전속결로 끝낸다.’

결정을 내린 드레뷔스가 선공을 가했다.

<다중 빙결 화살>

눈속임을 위한 마법.

다섯 개의 얼음 화살이 일직선으로 날아왔으나 베르덴은 대응하지 않았다. 화살이 그대로 직격하자, 마력의 장막이 전방위에서 그를 보호했다.

달리 마력을 조작하지 않았음에도.

‘자동 마력 방벽인가? 방어구나 로브에 내재된 기능인 것 같은데…… 비효율적이고 희귀한 걸 잘도 쓰는군.’

하지만 매직 아이템으로 상시 보호받고 있다고 한들, 그걸 뚫을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특히나 물과 얼음을 다루는 마법사라면.

<격류>

마력이 속성으로 변환된다.

거센 파도가 들썩이며 위아래로 베르덴에게 육박했다.

물 속성 마법사의 기본적인 전법은 바로 연계.

상대가 가진 공간을 빼앗고 서서히 익사시켜 버리거나, 추가로 얼음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면 물속에 가둔 뒤 적을 얼리는 등 한순간에 승패를 결정짓는 게 주요한 노림수다.

드레뷔스는 명확히 후자에 속한 4위계 상위 마법사.

촤아아아악.

몰아치던 파도가 양옆으로 갈라진다.

그렇게 나뉜 마법은 곧장 베르덴을 덮치지 않고 또다시 나뉘어 천장으로 치솟았다.

산산이 부서지며 전방위에서 들이닥치는 파도.

이어 마력을 쥐어짜 낸 드레뷔스가 마법을 시전했다.

<얼음지대>

드레뷔스에게서 퍼져 나간 서리가 격류에 닿았다.

삽시간에 확산한 찬기가 부서지는 파도를 일부 얼렸다. 차가운 파도에 뒤섞인 얼음 파편들이 일제히 베르덴에게 쏟아졌다.

피할 공간은 없다.

불로 녹이거나 정면에서 때려 부술 수 있을 지도 모르나, 저만한 규모의 얼음 해일을 없애기엔 시간이 부족할 터.

“별거 아니군.”

드레뷔스는 압도적인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건 베르덴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이오>

혹한의 반지(모조품)의 냉기 강화와 메이벨의 귀걸이가 가진 범위 강화. 베르덴이 본래 가지고 있던 얼음 계열 마법의 경지.

오큘러스에서 확산된 냉기가 드레뷔스의 연계 마법을 여지없이 집어삼켰다.

불이 불을 태우고, 얼음이 얼음을 얼린다.

동일 계통의 마법사 간의 격차가 컸을 때 발생하는 상하 관계.

자신 있게 만들어 낸 마법이 한낱 얼음 조각이 되는 것을 본 드레뷔스가 멍하니 그 광경을 응시했다.

“이게 무슨…….”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손 하나.”

손 하나?

그게 무슨 뜻이지?

이해가 따라갈 찰나, 뒤쪽에서 뭔가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발생한 마력.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사각에서 튀어나온 석편이 정확히 드레뷔스의 손등을 분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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