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엘프 (3)
대륙 남쪽에 있는 대수림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엘프.
그들은 자연의 주민으로서 인간을 배척하며, 교역을 포함한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는다…… 라고 관련 서적에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에스티리아 왕국은 인간 국가.
엘프는커녕 그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텐데, 베르덴의 눈앞에 엘프의 시신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걸까.
의문이 들었으나 아예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정령 블루를 부활시키며 엿본 기억.
분명 당시 엘프를 납치했던 마법사들과 관계가 있을 터. 블루는 그 흔적을 쫓아 왕국까지 오게 되었으니 정황은 얼추 들어맞았다.
‘하지만 저건 다른 엘프군.’
납치된 엘프의 머리색은 화사한 금발이었다.
그에 반해 실험대 위에 누워 있는 엘프는 에메랄드빛의 머리칼을 갖고 있다. 미려한 외모이긴 하나 이목구비의 특징도 차이가 났다.
그렇다면 다른 엘프를 또 납치한 건가.
하기야 한 번 했던 걸 두 번, 세 번 못 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문제는 왜 엘프를 납치했냐는 건데.’
베르덴이 시선을 옮겼다.
시신을 살피고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사내.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엘프의 어깨를 꾹 누르자 저항감이 거의 없이 쑥 들어갔다.
마치 근육과 뼈가 없는 것처럼.
사내가 표정을 찡그렸다.
“역시 겉만 멀쩡하고 내부 조직이 완전히 파괴됐네. 대체 이걸 어떻게 재활용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데…… 어렵군, 어려워.”
한숨을 쉰 사내가 마력을 일으켰다.
멀리 놓여 있던 해부용 칼이 떠올라 그의 손에 안착했다. 그렇게 엘프의 시신을 베어 가르려던 순간,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드르르르르륵.
백색 가운을 착용한 두 사람이 바퀴가 달린 기다란 카트를 끌고 왔다. 그 위에는 엘프가 아닌 인간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드레뷔스 님, 마법사의 새 시체가 도착했습니다.”
“시체? 이번에도 죽은 거라고? 엘프도 아니고?”
“예.”
사내, 드레뷔스가 칼을 내려놓곤 얼굴을 덮었다.
손 틈 새로 보이는 표정은 짜증과 실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아, 쓸 수 없는 실험체만 쌓여 가니. 이렇게 제자리걸음만 하다 보면 실망하실 텐데…… 알았다. 그만 나가 봐.”
“다만 희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드레뷔스가 눈썹을 씰룩였다.
“희소식? 무슨 희소식? 뭐, 따로 인력을 더 충원해 주신다더냐? 그게 아니면…… 갑자기 살아 있는 엘프라도 주신다고 하던?”
“그렇습니다.”
“그럴 줄…… 응? 방금 뭐라고?”
“정확히 이틀 뒤, 오후 2시에 살아 있는 엘프가 운반될 예정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진심으로 당혹감을 드러낸 드레뷔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사, 살아 있는 엘프라고? 그렇다면 실험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이냐?”
“예. ‘가디언’급 엘프이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숨은 붙어 있어도, 본래의 실험 용도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내부가 망가진 터라 재활용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드레뷔스 님에게 첨언하시길, ‘부디 성과를 보이라고’.”
실패를 반복했다간 무사하지 않을 거다.
그런 무서운 경고에 순간 섬찟했지만, 드레뷔스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체가 약속된 것이었으니까.
실망으로 가득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환희가 만연했다.
“하하하하하하! 정말로 희소식이잖아! 뜸 들일 게 아니라 이것부터 말했어야지!”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기대하고 있지. 아, 그리고 1시간 뒤, 이 엘프 시체를 화염 골렘에 보내 소각하도록. 좀 더 만져 봐야 할 것 같지만 재활용하기엔 그른 것 같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두 운반자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드레뷔스는 아까보다 더 유쾌한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금 칼을 잡았다.
같은 공간에 불청객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로.
* * *
“…….”
일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제한된 정보. 그러나 결정적이다.
먼저 엘프를 납치한 마법사는 왕가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이건 사령의 보주를 회수했을 때, 엘더 리치의 기억을 엿보며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 정보를 지금의 상황에 연결한다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가 거래한 건 저 시체들이었군.’
1왕자가 대가로 무엇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저 엘프의 시신과 방금 운반된 인간의 시신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또한. 그래도 무엇이 거래되고 있는지는 확인했다.
그리고.
‘왕가는 모종의 인체 실험을 벌이고 있다.’
문득 글러트니가 떠올랐지만…… 아마 직접적으로 그들이 이 실험에 관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방주에서 진즉에 나타났을 테니까.
그들의 정보력은 베르덴이 가진 것보다도 훨씬 위에 있었으니.
‘그래도 과거 글러트니가 왕국에서 인체 실험을 벌였다는 걸 생각하면 아예 상관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베르덴에게 있어 인체 실험은 혐오와 역겨움의 극치.
하지만 그와 별개로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대체 실험의 목적이 무엇일까.
재활용한다는 의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고민하고 있던 베르덴이 판단했다.
‘일단 지금은 나서지 않는 게 좋겠군.’
여기서 소란을 일으켰다간 얼마 안 가 1왕자도 알게 될 테니. 그렇게 되면 클란드는 빠져나오기 어렵다.
베르덴이 돕는다고 해도 암상인의 신분은 영원히 버려야 하겠지. 그 외 부가적인 여파도 클 테고.
‘그리고 가능하면 살아 있는 엘프를 확보해야 한다.’
증언을 들을 수 있다면, 왕가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틀 뒤로 미룬다.’
결정을 내린 베르덴이 물러섰다.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그가 길을 거슬렀다.
나선의 계단을 내려가 지하 감옥에 발을 디뎠다.
쿠구구구구…….
마법진을 기동해 문을 닫았다.
그러곤 그 위에 은폐 마법진을 덧씌웠다. 이렇게 하면 보호용 마법진 <토벤의 시선>이 파훼된 걸 알아차리지 못할 터.
베르덴은 자신이 남긴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다.
이제는 복귀할 시간.
이미 방법은 마련해 두었다.
<투명화>
유자의 로브의 기능.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는 마법으로 모습과 기척을 감추었다.
그렇게 하수도를 넘어 유유히 인공 호수를 빠져나간 베르덴은 발각되는 일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도착했군.’
회의가 끝나기 얼마 전.
옷을 갈아입고 본래 있던 마법진을 해제한 뒤, 소음을 막는 마법진을 다시 새겼다. 기만의 얼굴을 착용해 말테드로 위장한 베르덴이 아무렇지 않게 침상에 누웠다.
잠시 후, 조금 지쳐 보이는 클란드가 돌아왔다.
마법진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성과는 있었나?”
“있었습니다.”
베르덴이 장담했다.
* * *
베르덴은 버려진 지하 감옥에서 목격한 것만 간략히 설명했다.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클란드의 표정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엘프의 시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게 나오는군.”
엘프는 집단주의 사상을 가진 이종족.
한 개체라도 위험에 빠진 걸 지각한 순간,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동족을 구해 내려 한다. 그것도 무작정 달려드는 게 아니라 사냥을 하듯이.
옛날, 국가 하나가 엘프 종족에게 멸망당한 사례가 있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대륙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그걸 보란 듯이 어기다니.’
아직 조용한 걸 보면 엘프의 위치 추적을 막을 수단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나을 건 하나도 없었다.
클란드가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는 이틀 뒤에 그 살아남은 엘프를 구출할 거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 드레뷔스라는 자에게서 추가로 정보를 얻을 생각입니다.”
“으음…… 그랬다가는 여파가 크지 않나? 자칫 들킬 수도 있고. 차라리 몰래 엘프를 구출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은데. 따로 계획해 둔 바가 있는 건가?”
“예.”
드레뷔스 제압.
실험체 엘프 구출.
그리고 흔적을 지우는 것까지.
베르덴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실행할 자신이 있었다.
내심 갈등하던 클란드가 이내 수긍했다.
“알았네. 어디까지나 나는 조력자일 뿐, 의뢰의 주체는 자네이니 뭘 선택하든 따르겠네. 이틀 뒤, 오후 2시라…… 그때는 마지막 회의가 진행될 즈음인데, 회의가 끝나기 전에 돌아올 수 있겠나?”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도록 하겠네.”
클란드가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그나저나 운이 좋았군. 설마 첫 번째 탐색만으로 위치를 알아내는 데 성공할 줄이야. 덕분에 왕궁 내부에 잠입하지는 않아도 되겠어.”
그 말대로였다.
왕국은 꽤나 복잡하다.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잠입 난이도도 높고, 그에 따른 변수 또한 무수하게 많다.
아무리 설계도를 외우고 계획을 면밀하게 짰다고 한들, 발각될 위험이 매우 높아질 거라는 건 명백했다.
“지하 감옥일 줄 알았다면 잠입하지 않을 걸 그랬습니다.”
“하하, 그것도 그렇군. 굳이 거기라면 성 내부에 침투하지 않고 하수도를 이용해서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위치를 모를 땐, 그게 최선이긴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그 외에 내가 해 줄 만한 일은 없나?”
해 줄 만한 일이라.
“하나 걸리는 게 있긴 합니다.”
“걸리는 거?”
“다른 수뇌부들과의 마찰입니다.”
특히 용병단장 게울은 클란드와 베르덴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물론 갑자기 칼을 들이밀지는 않겠지만…… 도중에 계획에 방해가 안 될 거라며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충분히 할 만한 생각이군. 하지만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곳은 다름 아닌 1왕자가 지배하는 아리엔테성이니까.”
1왕자는 아랫사람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걸 극도로 혐오한다.
빈테르트를 제외하고, 클란드를 포함한 그 외의 수뇌부는 염연히 아랫사람. 마음대로 성에서 활개 치는 걸 1왕자가 좌시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게울은 1왕자 앞에서 낭패를 봤네. 회의실에서 그걸 만회하려고 갖은 아부를 다하고 있는데 보복을 할 여유는 전혀 없지. 그래도 만약 손을 쓴다면…… 아무리 빨라도 성을 떠나 에슬라에서 멀어진 이후가 될 걸세.”
그때라면 상관없다.
말테드의 위장을 벗어던진 베르덴에겐, 그런 용병단은 자그만한 변수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 * *
비밀 사교장이 열린 지 오늘로 3일째.
그동안 베르덴은 철저하게 말테드를 연기했다. 가면이 얼굴과 일체화가 된 덕분에 불편함 없이 음식물까지 섭취할 수 있는 데다가 벙어리라는 특징까지.
실수를 할 일은 전무했다.
이따금씩 게울과 그 용병단 쪽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으나, 클란드의 말대로 말다툼을 포함해 자그마한 마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수뇌부 또한 비슷했다.
고작해야 로베르트가 찾아와 클란드와 잠시 대화를 나눈 게 전부. 베르덴은 지루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마지막 회의가 눈앞에 다가왔다.
“내가 끌 수 있는 시간은 최대 4시까지일세. 될 수 있으면 더 벌긴 해 보겠지만,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 유념해 주게.”
“알겠습니다.”
“행운을 빌겠네.”
클란드가 방을 나섰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됐다.’
완전 무장을 한 베르덴.
그가 망설임 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인공 호수에서 하수도.
그리고 화염 골렘을 피해 지하 감옥의 숨겨진 통로로. 가장 빠른 루트였기에 시간을 최소한으로 소비했다.
곧 나선의 계단을 올라 왕성의 실험실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2시 정각.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자, 바퀴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틀 전에 봤던 두 명의 운반자.
그들이 옮기고 있는 카트 위에 있는 한 남자 엘프.
확실히 전에 봤던 엘프의 시체와 달리 희미하게 핏기가 돌고 있었고, 아주 미약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엘프.
하나 베르덴은 그 사실보단, 엘프의 외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으니까.
‘……설마 운반된 게 저 엘프일 줄이야.’
정령 블루와 함께 있던 엘프.
화사한 금발이 베르덴의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