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엘프 (2)
정보대로라면 버려진 감옥에 배치된 경비병은 총 10명이다.
두 개의 감옥 입구를 지키는 병사가 각 2명씩이며 순찰을 도는 인원은 6명. 예비 병력까지 포함하면 더 많지만 발각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암시>
<비행>
베르덴이 천장 구석에 몸을 숨겼다.
호흡까지 죽이며 기척을 완전히 숨긴 채 경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멀리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런데.
쿵…… 쿵…… 쿵…… 쿵…….
진동이 무겁게 느껴진다.
마치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춘 기사…… 아니, 그것보다 더한 무게감이다. 아리엔테성 경비병의 무장 수준으로는 날 수가 없는 소리.
그와 더해서 횃불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빛이 보였다.
‘뭐지?’
미리 접했던 정보와는 차이가 있다.
베르덴은 이상함을 느끼며 시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 진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4m에 육박하는 거체.
몸 전체는 활활 타오르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나간 자리에는 뜨겁게 달구어진 지면이 붉게 명멸했다.
그 광경에 베르덴이 눈을 부릅떴다.
‘……골렘?’
그것도 화염 골렘.
형태로 보아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왜 지하 감옥에 경비가 아니라 천연 골렘이 있는 거지?’
그뿐만이 아니다.
어째서 습기가 있는 감옥에 화염 골렘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저걸 왜 내버려 두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나같이 의문투성이다.
설마 저 골렘을 경비로 대신 삼은 건가?
정황상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천연 골렘은 피아를 구별하지 않을 텐데.
어쨌든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1왕자의 여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큰 변수다.
자연 발생하는 골렘에겐 활동 영역이 존재한다.
그 경계선을 넘지 않으면 무해하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그게 무엇이 됐건 간에 적대한다. 더군다나 별도의 감각기관이 없어, 오로지 마력으로만 사물을 판단하기에 영역 내에 사각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저 골렘의 영역권이 감옥 전체라면 이미 발각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공간가방에서 오큘러스를 꺼낸 베르덴이 전투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그것도 무색하게, 화염 골렘은 중간에 코너를 돌아 모습을 감췄다.
쿵…… 쿵…….
묵직한 진동이 점점 멀어져 간다.
발각될 위기를 넘긴 베르덴이 마력을 가라앉혔다.
‘위험했군.’
골렘은 핵을 부수지 않으면 반영구적으로 활동하는 이형종.
그런데 화염 골렘에게서는 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감옥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찾으려면 감옥 전체에 마력을 퍼뜨리는 등 이리저리 헤집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화염 골렘은 베르덴을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뛸 테고.
전투의 여파는 아무리 지하 깊은 곳이라고 해도 큰 위험부담. 기껏 잠입하는 데 성공해 놓고 허무하게 발각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변수는 역으로 베르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천연 골렘을 토벌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는 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는 뜻. 하물며 감옥을 배회하는 것으로 보아 경비로는 안성맞춤이겠지.
‘즉, 이 지하 감옥에는 뭔가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가설일 뿐이다.
허영심이 가득한 1왕자가 단순히 내버려 두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니. 하나 그렇다 해도 탐색을 할 가치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지면 가까이 내려온 베르덴.
화염 골렘이 사라진 방향과 그 속도를 정확히 기억하며, 놈이 지나왔던 복도를 향했다.
비밀 사교장의 첫날.
베르덴이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 * *
비밀 사교장의 회의실.
중심에 있는 거대한 타원형의 테이블. 그 상석에는 1왕자가 삐딱하게 앉아 턱을 괴고 있었고, 좌우로 각각 세 명씩 나란히 착석해 있었다.
1왕자 발르그나가 서류를 툭 떨어뜨렸다.
그 위에는 왕국 남부에서 발생한 피해 현황이 상세히 기입되어 있었다.
“하, 짜증 나는군. 고작 언데드 따위한테 얼마를 잃은 건지. 그리고 이 귀족 놈들이 고작 그런 이형종 하나 막지를 못해서 도망을 쳐?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군.”
시민이 얼마나 죽었든 간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몇천 명 죽은 거쯤이야 왕국 전체에 비하면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으니까. 몇 년 지나면 금방 복구가 될 테고.
하나 문제는 이로 인해 정쟁에서 호되게 당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귀족이 영지를 지키지 않고 도망쳤다……. 제길, 그 빌어먹을 에스퍼렌사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분명 온종일 붙잡고 늘어질 게 뻔해. 아주 상상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군.”
그러자 로베르트가 말했다.
“그러니 그 전에 꼬리를 잘라야겠죠.”
“꼬리?”
“언데드 사태에 대한 책임을 페데릭 백작에게 몰아넣을 겁니다. 미리 전하께서 구속하면 에스퍼렌사 후작도 강하게 나오지는 못하겠죠. 그리고 적당한 때에 숙청하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거라고 봅니다.”
“음…….”
1왕자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백작이 죽으면 내 세력이 깎이지 않을까?”
“감안하셔야 하는 부분이에요.”
“다른 곳도 아니고 곡창지대가 엉망이 된 이상, 향후 몇 년간 자체 식량 수급이 매우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기근에 시달리면 왕국은 예상 이상으로 혼란스러워질 테니, 그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백작급 목 하나면 오히려 싼 편이지요.”
클란드의 보충 설명에 1왕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겠군. 그 준비는 넬리타가 하는 건가?”
“물론이에요, 전하. 저를 믿고 맡겨 주시면,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설계를 해 드리겠습니다. 과거 ‘루비넬리안 공작’의 가문을 멸문했던 것처럼요.”
루비넬리안 공작가.
한때 왕국 4대 공작 중의 일각이었다. 반란 혐의로 토벌되기 전까지는.
“루비넬리안이라…… 간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로군. 확실히 그때는 너의 도움이 크긴 했지. 덕분에 나는 아바마마께 자격을 인정받았고, 공작 영토의 일부를 하사받기까지 했으니. 그래, 넬리타. 이번에도 너에게 일임하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나머지도 넬리타를 성심성의껏 조력하도록. 훗날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잘 챙겨 줄 테니까 말이야. 혹시 아나? 여기 있는 모두가 귀족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가게 될지.”
“자금이 부족하지 않게 지원하겠습니다.”
“제 용병단은 언제든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전하.”
“마찬가지입니다…… 킥.”
1왕자의 말에 웃음소리가 피어났다.
로베르트는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다음 안건을 살폈다. 순간 클란드의 눈가가 움찔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아, 그런데 내 아우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가볍게 목을 푼 클란드가 말을 이었다.
“2왕자 로트닐은 주요 지지 세력인 고위 귀족들을 규합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도회장을 열고, 사교회를 갖거나 선물을 하는 등 세력을 유지하는 데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뭐, 로트닐답군. 걔는 여자에 미치긴 했어도, 사교회의 왕자라고 불릴 정도로 말주변이 좋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에버스는?”
“3왕자 에버스는…… 많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로 인해 조합이 무너졌으며, 꼬리를 자르느라 세력이 대거 잘려 나갔고,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언제 발을 뺄까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1왕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그거참 다행이군!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아주 제대로 물었어. 덕분에 나하고 로트닐도 재미 좀 봤지. 얼마 전까지 건방지게 눈을 치켜뜨더니…… 지금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심히 궁금하군.”
“킥, 초상화라도 그려 올깝쇼?”
“됐다. 그런 건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 그럼 다음은?”
“다음 안건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상 다리오가 역할을 넘겨받았다.
그렇게 비밀 사교장의 회의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휴식 시간을 포함해 3일은 넉넉히 벌 수 있을 터.
‘……다른 쪽도 순조롭다면 좋으련만.’
클란드가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곤 회의에 집중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 * *
회의가 지속되는 동안 베르덴은 탐색에 전력을 다했다.
화염 골렘을 피해 이리저리 비행을 하며 빠르게 움직인 결과, 어느새 버려진 지하 감옥의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과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뭐 하나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아예 없을 줄이야.
진심으로 화염 골렘을 방치하고 있는 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찾은 게 없으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아닌 옛 왕성 중심부에 숨기고 있는 모양이다.
가능하면 발각될 위험이 적은 지하 감옥에서 찾아냈으면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탐색 지역 중 하나를 지운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베르덴이 통로를 지나치며 하수도로 향했다.
그가 반응한 건 그때였다.
‘……잠깐.’
멈춰 선 베르덴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감옥의 중앙 복도. 기억하고 있는 설계도대로라면 도중에 통로 따위는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베르덴의 시야에는 외길이 하나 비쳤다.
설계도에 없는 길.
눈을 가늘게 뜬 베르덴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곧 외길의 끝에 있는 막다른 장소에 도착하자, 양측에 텅 빈 감옥이 하나씩 존재하고 있었다.
녹슨 철창과 굳게 잠겨 있는 자물쇠.
오래 방치되었는지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감옥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확실히 설계도가 옛날에 만들어진 터라, 감옥이 버려지기 전에 증축을 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사방이 막힌 골목을 주욱 둘러봤다.
총합 24개의 창살.
2개의 자물쇠.
하나의 벽.
바닥에 둘, 천장에 두 개가 튀어나온, 벽돌.
“…….”
유심히 관찰하던 베르덴이 벽을 앞에 두고 정확히 여덟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풍경은 여전했다.
꿉꿉한 습도나 짙게 쌓인 녹을 보면 그저 버려진 감옥일 뿐이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베르덴의 눈에는 정확히 비쳤다.
벽돌에서 자물쇠.
창살에 난 녹을 따라 천장에 있는 벽돌을 지나친다.
직후 다시 창살과 자물쇠를 넘어 시작점인 벽돌에 도달하는, 하나의 원.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오래된 벽.
베르덴은 확신했다.
“마법진이군.”
그것도 예사 수준이 아닌.
* * *
의도적으로 배치된 인공물.
그 시각적 착시 속에 숨겨진 마법진에는 서로 다른 3개의 마법진이 교묘하게 겹쳐 있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마법진 자체의 흔적을 은폐하고 있고, 중간에 있는 마법진에는 보호용 마법술식이 새겨져 있으며, 안쪽에 있는 것은 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코 얕은 수준으로 새길 만한 마법진이 아니다.
적어도 베르덴과 마법진에 대해 논할 정도. 특히나 눈길을 끄는 것은 중간에 있는 보호용 마법진이었다.
<토벤의 시선>
옛날 토벤이란 마법사가 만든 고난이도의 마법진.
섣불리 마법진을 건드리거나 이 공간을 파괴하려 했다간 마력이 지하 감옥을 넘어 왕성 전체를 격동시킬 것이다.
그리고 침입자에게는 마력의 시선이 맺힌다.
일정 시간 동안 실시간으로 위치가 발각되는 효과. 저기에 당하면 아리엔테에 있는 병력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위장으로 숨기는 건 불가능하고.
살고 싶다면 그대로 등을 돌려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발견한 것이 베르덴이 아니었다면.
‘찾았다.’
눈을 빛낸 베르덴이 즉시 마력의 실을 뽑아 마법진 내에 침투시켰다.
마법진이 서로 연계가 되어 있긴 하나, 결국 시간문제일 뿐. <토베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사각…… 사각…… 쩌적.
마력의 실이 마법진의 요추를 갉아 하나둘씩 무너뜨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마법진이 깨지며 숨겨진 두 개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랑곳하지 않고 보호용 마법진에 침투했다.
‘과연 누가 이런 걸 여기다 새겼을까.’
마법진만큼이나 마법 실력 또한 출중하다면 흑마도사 비올라에 준할 정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고.
물론 누가 됐건 위축될 베르덴이 아니었다.
쩌적!
이윽고 <토벤의 시선>이 박살 나며 마력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마법진.
사실 이건 굳이 파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문의 역할을 하는 게 전부니.
기이이이잉.
억지로 내부를 건드려 마법진을 강제로 기동시켰다.
쿠구구구구…….
푸른빛이 발광하며 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교차적으로 벽돌이 움직이며 방금까지 없던 통로가 나타났다. 그 너머에는 녹슨 철문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끼이익.
철문 너머에는 거대한 나선의 계단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피로 얼룩진 마력 승강기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까마득한 높이다.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마석 등이 미약하게 빛났다.
‘수상하기 짝이 없군.’
베르덴은 이곳이 1왕자가 숨겨 둔 비밀이라고 확신했다.
마력 승강기는 소음이 크다.
시각와 청각 그리고 촉각 등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베르덴. 오큘러스를 단단히 쥔 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길이 하나밖에 없긴 했지만 미처 눈치채지 못한 장치나 함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도중에 위에서 내려온 자와 마주칠 가능성도 있고.
시간을 쓰더라도 신중하게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랐다.
‘더럽게 높군.’
오르는 속도를 대충 측정해 봤을 때 왕성 중심부까지 올라온 것 같은데…… 아주 정확하지는 않아도 엇비슷할 테지.
베르덴이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고개를 들자 또다시 문이 나타났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아주 깨끗한 철문이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잘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끼익거리는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몸을 낮춘 베르덴이 신속히 안쪽으로 진입했다.
닫힌 문.
베르덴의 귓가에 목소리가 스쳤다.
───흐흐흐흠.
활기찬 콧노래.
베르덴이 주의를 기울이며 진원지로 향했다. 두꺼운 기둥 뒤에 숨은 그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흐흐흐흐흐흐흠.”
하얀색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흥얼거리고 있다.
그런 그의 앞에는 금속 테이블이, 그 테이블 위에는 사람이 하나 놓여 있었다. 피부에 핏기가 아예 없는 걸 보아 시체인 듯했다.
그런데 그 이목구비가 이상했다.
인간과 달리 뾰족한 귀, 미려한 얼굴 그리고 에메랄드빛의 머리칼을 가진 사내. 베르덴은 그 특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