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엘프 (1)
1왕자가 말하는 여흥이란 바로 볼거리.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하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상은 상황을 주도해 빈테르트 앞에서도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로베르트도 잘 알고 있었다.
“비밀 사교장은 흐트러진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자리가 아닌가요? 그럴진대 마찰을 유도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가 나리라고 봅니다만.”
“역효과랄 것까지야. 이건 그냥 놀이일세. 클란드가 새로운 친구를 데려오기도 했고, 게울 쪽에서도 못 보던 용병을 데려왔으니, 식후 운동 겸 가볍게 실력을 보겠다는 거지.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서로 죽고 죽이라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의견은 충분히 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안 그런가, 드로난?”
“그렇습니다, 전하.”
뒤에 있던 호위 기사가 긍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1왕자가 그거 보라며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본 로베르트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서렸다.
‘어리석긴.’
재작년, 사교장에 참가한 수뇌부는 총 여덟 명.
그런데 언데드 사태로 인해 두 명이 실종되었다. 피난 도중 죽은 게 분명하겠지.
방금 전 둘이 따로 식사를 하며 그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인지시켜 줬건만, 그보다 같잖은 자존심을 우선시하다니.
다른 왕자를 골랐어야 했나.
문득 후회가 들긴 했지만…… 대체재가 될 만한 건 2왕자나 3왕자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세 명의 왕자 중에선 1왕자 발르그나가 그나마 낫다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비위를 맞출 수밖에.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내심 혀를 찬 로베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게울, 전하의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못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높으신 분들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막내야, 잘할 수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게울의 막내 용병이 크게 소리쳤다.
“클란드, 당신은요?”
“저는…….”
클란드가 대답을 하기 전, 베르덴이 앞으로 나섰다. 품에서 회색 너클을 꺼내 양손에 쥔 채로.
───괜찮은 건가?
클란드가 시선으로 물었다.
주력인 원소 마법을 쓰지 못하는 불리한 상황이기에 당연한 걱정이었지만, 베르덴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 또한 아니었다.
고등 룬으로 강화된 감각과 3위계 부여 마법으로 강화한 신체 능력. 그리고 숱한 전투를 치러 온 경험.
몇몇 놈은 위험하긴 해도, 여흥의 상대가 될 용병단의 막내는 상대가 가능하다. 제약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이 베르덴이 내린 판단이었다.
‘물론 나서지 않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여기서 발을 빼는 건 좋지 않을 테지.’
암상인 클란드가 유일하게 데려온 측근이 약함을 드러내는 건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으니까.
뭐, 비슷한 마찰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은 해 뒀기에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변수는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무대가 만들어질 줄은 전혀 몰랐지만.
베르덴이 가볍게 몸을 풀며 생각을 마쳤다.
“하하. 이보게, 로베르트. 다들 기다렸다는 듯 나서지 않나? 내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것이지.”
“…….”
“자, 뭣들 하는가. 바로 무대를 만들어라.”
전신 갑옷을 갖춘 호위들이 내려와 식탁과 의자를 치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대 위에서 베르덴과 막내가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1왕자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심판을 자처했다.
“여흥은 여흥일 뿐, 서로 죽이거나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히는 건 금하겠다. 그 외의 상처라면 치료해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알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
막내가 우렁차게 대답했고,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1왕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는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지?”
“태생적으로 말을 못 한다고 합니다.”
“벙어리라. 말도 못 하는 자가 여기까지 오다니. 그만큼 실력을 갖춘 자라는 뜻이겠지. 내 말이 맞지 않나, 암상인?”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전하.”
물론 클란드 또한 그 실력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이미 발생해 버린 변수는 베르덴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나은 해결책이었다.
1왕자가 기대감을 드러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자그마한 핸드벨을 손에 들었다.
“아, 그 전에. 단순히 보기만 하는 건 재미가 덜할 테니,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나는…… 그래, 저 용병에게 천만 엘크를 걸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1왕자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돈을 걸었다.
그리고 태반 이상이 막내 용병을 선택했다.
급소 부위만을 가린 갑옷.
그 외로 보이는 근육은 보란 듯이 강인함을 드러냈으니까. 그에 반해 전신을 옷으로 감싼 베르덴은 약소해 보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로베트르도 끝내 내기에 참여했다.
“음? 자네는 저 벙어리에게 거는 건가?”
“그편이 수익이 더 높으니까요.”
“그런 걸…… 음, 그래. 도박판에서는 역배라고 한다지? 대세는 대세인 이유가 있는 법인데……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군.”
1왕자가 선언했다.
“그럼 시작하게.”
딸랑.
핸드벨이 울림과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검과 주먹이 수차례 교차했다.
이윽고.
쩌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무대 밖으로 피가 튀었다.
* * *
<전신 강화>
부여 마법을 마친 베르덴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기를 활성화한 용병.
정면에서 돌진한 놈이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오른쪽 어깨.
움직임을 꿰뚫어 본 베르덴이 가볍게 피해 냈다. 그러자 멈칫한 검이 곧바로 그를 추격했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일방적이군.”
“오, 막내라길래 불안했는데 조금 하네요?”
용병에게 돈을 건 다리아와 넬리타가 감상을 전했다. 1왕자 발르그나 또한 그들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몇몇 이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킥. 이거 일방적으로 끝날 거 같은데, 게울?”
“시끄럽다, 톨라브.”
막내 용병이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상대인 베르덴은 회피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누가 봐도 용병이 상대를 압도하고 있는 듯했다. 겉으로는 말이다.
“……끝났군.”
가일이 단언했다.
그 직후, 베르덴이 움직였다.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
그가 가진 무기 중 하나가 상대방의 관찰을 끝냈다.
당겨진 팔.
발을 내디딘 지점.
힘을 싣기 위해 비틀린 허리.
다음의, 다음 수까지 훤히 보인다.
그만큼 베르덴과 막내 용병의 격차가 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볼거리도 적당히 보여 줬으니.’
더 이상 여흥을 이어 갈 이유는 없다.
후웅.
머리 위로 지나간 검격.
어느새 용병의 몸에 가까이 붙은 베르덴이 왼팔을 휘둘렀다.
“컥?!”
너클이 복부의 오른쪽을 강타했다.
급소를 가격당한 용병이 비틀거렸다. 이내 이를 악물고 검을 당겼으나 이미 읽힌 상태다.
정확히 빈틈을 파고든 베르덴이 용병의 턱을 후려쳤다.
뼈에 금이 가는 감각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이어 몸을 회전하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신체의 유연성을 극대화한 발차기가 여지없이 면상에 직격했다.
쩌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무대 밖으로 피가 튀었다.
허공에 뜬 용병이 바닥에 쓰러졌다.
부러진 치아와 내려앉은 코.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관중들 앞에 드러났다.
순식간에 끝나 버린 여흥.
용병의 승리를 예감한 사람들이 말을 잃었다. 너무도 허망한 패배에 1왕자가 손을 부들거렸다.
“이……!”
“잘했어요, 말테드.”
짝짝짝.
로베르트가 박수를 쳤다.
암상인과 빈테르트 측이 그를 따랐고 회장에는 어느새 박수 소리가 가득 찼다. 몇몇은 얼굴빛이 좋지 않았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베르트가 1왕자에게 말했다.
“덕분에 추후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네요. 즐거운 여흥이었어요, 발르그나 전하.”
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끝내자는 눈빛. 삽시간에 주도권을 빼앗긴 1왕자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휴식 후, 수뇌부들만 따로 다시 모이도록 하지.”
때앵!
핸드벨을 내팽개친 1왕자가 자리를 박찼다.
로베르트가 일행을 데리고 그를 뒤따라 회장을 빠져나갔다.
“쯧, 돈을 잃었군.”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거하고 다른가 보네.”
그리고 다리오와 넬리타 또한.
광인 톨라브가 게울을 스치듯 지나갔다.
“킥, 병신.”
어금니를 깨문 게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감히 전하께 실망을 안겨 드리다다니……!”
잘못하면 1왕자에게 받는 돈이 줄어들 수도 있다. 아니, 그건 분명하겠지.
그의 측근들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자, 게울이 즉시 달려가 막내 용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게울이 이 상황을 초래한 암상인과 베르덴을 노려봤다.
“덕분에 손해가 크다, 암상인.”
“화풀이할 대상을 잘못 찾은 것 같소만.”
잠깐의 대치가 이어졌다.
이내 등을 돌린 게울이 용병들과 막내 용병의 시체를 가지고 회장을 나섰다. 그러고는 방을 배정해 줄 하인이 찾아왔다.
1왕자로 인해 발생한 변수.
그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 * *
클란드와 베르덴이 귀빈실에 들어왔다.
둘만 있는 것을 확인한 베르덴이 방 한가운데에 마법진을 작성하여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걸 차단했다.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클란드가 외투를 벗었다.
“후우, 설마 왕국 남부가 난장판이 된 마당에 여흥을 즐기자며 싸움판을 벌일 줄이야. 그것도 1왕자가. 이건 전혀 예측하지 못했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리 잘 싸우나? 용병을 아예 가지고 노는 수준이던데. 물리 마법사…… 뭐, 그런 건가?”
“마법사라고 해서 근접전이 약하다는 건 편견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거 같은데.
클란드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크흠, 어쨌든 덕분에 변수는 잘 넘길 수 있었네. 그러니 이제 다음에 집중할 차례로군.”
아리엔테성에 잠입하는 건 성공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1왕자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낼 차례였다.
“내가 가능한 안건을 끌어내어 벌 수 있는 시간은 오늘을 포함해 약 3일. 그 안에 이 넓은 왕성을 샅샅이 뒤져야 하네. 전해도 말했듯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아.”
“알겠습니다.”
이미 그에 맞춰 수색 구역의 우선순위를 정해 놓은 상황. 예측 가능한 변수에 대한 대책 또한 마련했다.
베르덴은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이후는 맡기겠네. 부디 처음부터 비밀을 찾아내길 바라지.”
“예.”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안내자가 찾아왔다.
복장을 단정히 갖춘 클란드가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경비에게 당부했다.
“내가 올 때까지 안에 있는 친구는 깨우지 말게. 굉장히 예민해서 기상 직후에는 엄청 난폭하거든. 매우 위험하니 취급에 주의하도록.”
“아…… 예. 알겠습니다.”
경비가 수긍했다.
그 또한 이곳에 모인 손님들이 누구인지 알기에, 경고를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았다. 곧이어 클란드와 안내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슬슬 가 볼까.’
문은 마법진으로 단단히 잠갔다.
클란드의 경고가 제대로 이어진다면 경비가 잘 지키겠지만. 이렇게 하면 비상 상황에서도 들킬 염려는 없다.
벽면을 때려 부수는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다름 아닌 1왕자의 성에서 그런 짓을 벌일 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본래의 장비를 갖춘 베르덴이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적셨다.
아래로는 까마득한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베르덴.
이내 중력에 몸을 맡기며 아래로 낙하했다.
* * *
아리엔테성에는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가 두 곳이 존재한다.
하나는 성의 중심부로, 1왕자가 주거하는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옛 왕성의 버려진 지하 감옥이었다. 베르덴은 그중 후자를 선택했다. 단순한 직감이었다.
화아아아아악!
낙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어느새 거대한 인공 호수와 가까워진 베르덴이 마법을 펼쳤다. 공기저항을 높여 속도를 줄이고 입 주변에 공기를 끌어모았다.
베르덴이 소리 없이 호수에 빠져들었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어떤 소란도 들려오지 않았다.
발각되지 않았다는 뜻.
확인을 마친 베르덴이 수류를 조작하며 아래로 잠영했다.
아리엔테를 두른 호수는 고여 있지 않다.
인위적으로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상수도와 하수도가 존재한다. 그중 하수도는 지하 감옥 바로 아래를 지나간다.
베르덴을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저기 보이는군.’
호수에 잠긴, 아리엔테의 아랫부분.
물살을 따라, 녹슨 철창으로 가려져 있는 입구에 도착했다. 철창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하수구로 잠입한 베르덴이 이동하며 신중하게 거리를 가늠했다.
움직이는 속도와 그에 따른 위치.
설계도로 확인한, 하수도와 지하 감옥이 가장 가까워지는 곳을 노려야 한다. 이내 베르덴이 눈을 번뜩였다.
‘여기다.’
<지형조작>
쿠구구구…….
시전자의 뜻에 따라 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빠져나온 베르덴이 마법을 더욱 지속했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끝에 마침내 목표인 빈 공간이 나타났다.
‘다행히 정확히 짚었군.’
바깥으로 나가자, 퀴퀴한 냄새가 나는 감옥의 풍경이 시야에 비쳤다. 다시금 지형을 조작해 나왔던 통로를 감쪽같이 지우자,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