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비밀 사교장 (3)
‘눈썰미가 좋군.’
설마 보자마자 의심을 받을 줄이야.
빈테르트에서 투자 계열을 담당하고 있는 수장, 로베르트.
베르덴을 위협할 만한 강자는 아닌 듯싶지만 적어도 육감 하나만큼은 뛰어난 모양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기만의 얼굴은 멀쩡히 기동하고 있었고, 로베르트는 그 위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흔들릴 이유는 없다.
그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베르덴은 내색하지 않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로베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본인도 초면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나 이 불길한 기시감을 모른 척하고 넘기기에는 애매했다. 이어진 침묵을 깬 건 가일이었다.
“그만 가시죠.”
그제야 로베르트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아무래도 제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실례했어요, 암상인.”
“개의치 마시오.”
“그럼 안에서 뵙도록 하죠.”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 세누엘이 앞장서서 빈테르트를 안내했다.
로베트르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클란드가 숨을 내쉬었다.
“검은손 로베르트.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군. 그렇지 않나?”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로베르트의 의심에 반응하지 않는 데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벙어리 말테드를 연기하는 모습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클란드가 피식 웃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야.”
클란드가 중절모를 푹 눌러썼다.
“우리도 이만 가도록 하지.”
* * *
루벤 드 에스퍼렌사 후작은 창가에 섰다.
가만히 서서 광활하고 평화로운 땅을 바라보는 것은 후작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나 그의 검붉은 눈동자는 풍경이 아닌 어딘가를 좇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사교장에 도착했겠군.”
“예정대로라면 그럴 겁니다. 한데…… 생각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그래 보이나? 뒷모습만 보고 잘도 아는군.”
“허허허. 각하와 지낸 지 어언 수십 년이 아닙니까.”
에드몬이 웃으며 물었다.
“혹시 애셔에 대한 것입니까? 확실히 그가 칼리아 아가씨를 많이 도왔다고는 하지만, 이번 의뢰를 맡기기에는 많이 이른 감이 있긴 합니다. 혹시라도 배신할…….”
“자네는 그를 어떻게 보고 있나.”
“……배신할 인물로는 안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력이 말해 주었으니까요.”
에드몬은 베르덴의 힘을 목격했다
전신에서 흘러 넘치는 재능.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에 필적하는 노력과 강인한 정신력까지 갖추었다.
“그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질 마법사가 아닙니다. 돈 몇 푼, 매직 아이템, 아티팩트를 주어도 제 뜻에 맞지 않으면 거절하겠죠. 설령 각하의 의뢰라고 해도 말입니다.”
후작이 베르덴의 벽안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래 보이더군. 뭐, 그가 1왕자에게 붙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 그리고 애셔가 아니라면 애초에 시도하지도 못했을 의뢰기도 하니. 실패한다 해도 기밀을 발설하지도 않을 테고. 물론 듣던 대로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잡히지도 않겠다만.”
“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애셔가 아닌, 애셔가 알아낼 비밀이 문제지.”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1왕자는 큰 문제가 아니다. 아직 왕도 아닐뿐더러, 빈테르트를 등에 업고 범죄자들 사이에서 허울뿐인 권력을 위시할 뿐이니까.”
하지만.
“에스티리아 왕은 다르다.”
1왕자는 오만하기 짝이 없고
2왕자는 성욕에 미쳐 있으며.
3왕자는 탐욕이 끝도 없다고.
각기 다른 왕비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그들의 공통된 아버지인 에스티리아 왕은 과연 어떨까.
“에스티리아 왕은 오만하되 겸손했고, 성욕이 있되 순수했으며, 탐욕스럽되 절제를 했지. 한마디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뭐 하나 특출난 것 없는 그저 그런 인간.”
좋게 말하면 평범한 왕.
나쁘게 말하면 귀족에게 휘둘리는 무능한 왕.
“그런데 그는 변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벨디른 공화국과의 전쟁으로 국가가 휘청거릴 무렵에 ‘신임 재상’이 나타난 이후로부터.
역으로 공화국의 영토를 침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왕이 될 기회를 목전에 뒀던 이후로부터 말이다.
“하지만 신임 재상은 죽었지 않습니까.”
“물론 신임 재상은 사망했다. 그가 데려온 마법사들도 실종되거나 사망했고. 하나 에스티리아 왕은 그떄 영광을 쥐지 못한 것에 아집을 가지고 있다. 노쇠하여 건강이 악화된 지금까지도.”
후작은 확신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공화국을 압도했던 그때를, 에스티리아 왕은 아직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물론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건 사실이지.”
그 불안감이 무엇인지 에드몬은 잘 알고 있었다.
웃음기를 지운 에드몬이 물었다.
“만약 에스티리아 왕이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왕자와의 거래에서 확신할 만한 증거를 발견한다면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관없다.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다만…….”
후작이 눈을 번뜩였다.
“계획을 더 앞당겨야겠지.”
* * *
비밀 사교장은 여타 귀족들의 사교회와는 다르다.
인맥을 위해 거짓된 웃음을 짓거나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지도 않으며, 몇 날 며칠을 머물며 시끌벅적한 파티를 즐기지도 않는다.
보다 날것의 분위기.
아리엔테에 찾아온 범죄자들은 서로 간의 친분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이곳에 찾아온 건 인맥 따위가 아닌, 오로지 1왕자가 주는 이권을 탐하기 위해서였으니까.
“…….”
베르덴이 조용히 회장(會場)을 둘러봤다.
초대된 수뇌부와 그 측근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교장이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삭막한 적막이 흘렀다.
‘죄다 따로 노는군.’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미치광이.
거칠게 음식을 집어 삼키는 대머리 용병.
깨작깨작 케이크를 잘라 먹는 주황 머리의 여자.
우아한 손놀림으로 몇 인분의 식사를 하는 거체의 상인.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1왕자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생긴 것만큼이나 능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나저나 로베르트가 안 보이는데.’
빈테르트 측에는 그녀를 제외한 세 명의 사내밖에 보이지 않았다.
1왕자와 독대하고 있는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안 그래도 특별 대우를 받는 빈테르트인데, 그중에서도 3인의 권력자 중 하나인 로베르트가 직접 찾아왔으니.
대접이 다른 거야 당연한 거겠지.
적막이 깨진 건 그때였다.
위스키로 병나발을 불던 광인 톨라브.
그가 이죽거리며 다 들리게 목소리를 내었다.
“킥킥. 거참 많이도 처먹네. 오크도 저 정도는 배 속에 못 처넣을 텐데. 저러다가 나중에 뻥 터지는 거 아닐까 몰라.”
갑작스러운 도발이었다.
그 끝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자명했다.
거상 다리오가 멈칫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 미치광이 놈. 가만히 있는 남에게 시비 거는 습관은 아직도 고치질 못했군.”
미친놈은 무시하는 게 답인 법.
다리오는 고개를 젓고는 식사를 이어 나갔다. 톨라브가 몇 번 더 비아냥거렸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무시로 일관했다.
톨라브가 혀를 찼다.
“쯧, 분위기 좀 띄워 보려고 한 건데 재미없게. 상인 아니랄까 봐 속 좁은 건 여전하네. 안 그래, 로바트?”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시끄럽다.”
빈테르트의 쌍둥이 마법사.
그중 형으로 불리는 로바트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톨라브가 낄낄거리며 술병을 흔들거렸다.
“킥킥킥킥, 시끄러운 건 너겠지. 안 그래도 너…… 아니, 너희 형제들에 대해서 갖은 소문이 들려오던데.”
“뭐?”
“암흑가 경매장에서 아주 제대로 당했다며? 동생 생일 선물 준비한다면서,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 자금 마련했다가 같은 놈에게 경쟁 입찰을 3번이나 털리고 난동을 피웠다고. 그러고 보니 너도 꽤나 운이 좋네? 자칫 경매장을 망쳐 놓을 뻔해 놓고,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게 참…… 킥!”
비웃음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쌍둥이 동생 록키가 슬쩍 시선을 옆으로 향하자, 로바트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강하게 불거져 있었다.
‘형, 화났다!’
“이 정신병자 새끼가 감히 누구보고……!”
“킥. 감히? 그딴 말은 너희 부하들한테나 하시고. 빈테르트 간부 자리에 앉더니 무게만 지랄맞게 잡네. 야, 그냥 옛날처럼 하지 그래? 거슬리는 새끼는 죄다 튀겨 죽이면서 말이야.”
아, 톨라브가 화색을 띠었다.
“그런데 내가 널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빈테르트 들어가서 간부 노릇 좀 할 수 있는 건가?”
“그 입 닥쳐라!”
콰앙!
로바트가 책상을 내리찍었다.
그와 동시에 활성화된 마력회로. 로바트의 손끝에서 자그마한 전류가 번쩍였다.
“오, 로바트가 제대로 열받은 모양인데.”
“그러게. 잘하면 재미난 구경을 볼 수 있겠어.”
용병단장 게울. 그리고 설계자 넬리타가 흥미롭게 구경했다.
다리오는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여전히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고, 가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와인 잔을 기울였다.
클란드 또한 마찬가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베르덴에게 좋은 상황이긴 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니 애써 말테드를 연기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저 미치광이와 빈테르트 간부의 실력이 어떤지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아쉽게도 못 볼 것 같군.’
베르덴이 옆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 직후, 회장의 문이 열리며 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로베르트.
그녀의 옆에는 이 성의 주인이 있었다.
“하라는 식사는 안 하고 뭘 하는 거지?”
에스티리아 왕가의 1왕자, 발르그나 베인 디 에스티리아.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 *
머리카락 한 올마저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에 가깝게 정돈된 황갈색의 머리칼.
가슴 한가운데 박힌 에스티리아 왕가의 상징. 그리고 그 옆에 수놓인 휘황찬란한 장식과 보석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아프게 할 정도였다.
‘마법 물품도 아닌 평범한 의복에 대체 얼마를 쏟아부은 거지.’
겉모습도 문제지만 실용적인 측면이 아예 없다.
오만하고 허세가 가득하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단언하건대 베르덴이 봐 왔던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사치스럽다.
하물며 디자인 또한 최악. 베르덴의 미적 감각을 완전히 부정하는 외형이기에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베르덴이 아니라 말테드였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르그나 전하를 뵙습니다.”
클란드가 한쪽 무릎을 꿇었고, 베르덴이 차례로 예를 갖추었다. 광인 톨라브는 볼 안쪽을 씹으며,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하나 전부 무릎을 꿇은 건 아니었다.
빈테르트의 인물들은 1왕자를 앞에 두고도 허리를 숙이는 데 그쳤다.
가일, 로바트, 록키.
빈테르트의 지배자를 섬기고 있는 자들.
암흑가의 왕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에스티리아 왕이라면 모를까, 고작 왕위 계승 후보에게는 충분한 예를 갖출 수 없다는 뜻이겠지.
그를 본 1왕자가 눈가를 씰룩였다.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 하나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
“일어나라.”
예를 갖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서 들어 보니 꽤나 소란스럽더군. 내 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지?”
“작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가일이 답하자 1왕자가 와락 표정을 구겼다.
“마찰? 내가 주최한 사교장에서 말이냐? 감히 누가!”
톨라브와 로바트.
시선들이 둘로 갈렸다. 그중에 빈테르트의 일원이 있다는 걸 확인한 1왕자가 곧장 로베르트에게 고개를 향했다.
“허 참. 로베르트, 아무리 내가 빈테르트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내 허락도 없이 내 성에서 피를 보려고 하다니. 이건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피를 볼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그야 당연한 거죠…… 킥.”
로바트와 톨라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롭게 단순한 여흥으로 봐 주시지요.”
“여흥…….”
1왕자가 단어를 곱씹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1왕자는 자신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는 걸 매우 매우 싫어했으니까.
그러나 빈테르트는 권위를 내세울 상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권위를 쥐여 준 것이 다름 아닌 빈테르트였으니. 아무리 1왕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자극하는 건 손해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 이대로 물러서는 건 볼품이 없다.’
사교장에 초대한 자들과 호위들.
많은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다.
차기 에스티리아의 정점에 서게 될 자신이 암흑가의 왕 본인도 아니고, 그의 부하들에게 위축되는 일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됐다.
어떻게 한다.
잠시 생각하던 중 1왕자의 눈에 낯선 사내가 보였다. 클란드가 측근으로 새로 데려온 모양인데…….
‘그래, 그거면 되겠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라면 사교장의 분위기를 자신이 이끌 수 있을 터.
미소를 지은 1왕자가 빈 의자에 앉았다.
“여흥이라. 생각해 보니 로베르트,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아무리 비밀 사교장이라고 해도 지금까지는 너무 삭막하고 심심했지. 안 그런가?”
“전하, 그게 무슨……?”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 한번 여흥을 즐기자는 말이지.”
로베르트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1왕자가 손가락을 들었다.
“마침 처음 보는 자도 있고 말이야. 이거 꽤나 재밌는 여흥이 될 것 같은데.”
다이아 반지로 장식된 손가락.
그 끝은 정확히 말테드…… 로 위장한 베르덴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데 모인 시선들.
그 중심에 선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이건 못 들었는데.’
변수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