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비밀 사교장 (2)
“부디 무사히 다녀오세요! 제발! 부디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페르네의 당부와 함께 베르덴이 아세른을 나섰다.
솔직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세상은 무수한 사건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로부터 뻗어 나온 곁가지들은 자그마한 틈새까지 꽉꽉 메우고 있으니.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넘어가는 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인과라고 했었나.’
로아프라에서 만난 사업가, 데릭 켄드스.
베켄의 사생아에 대해 경고해 주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상공을 비행했다. 그렇게 의뢰서에 언급되어 있던 위치 부근에 도착했다.
숲 한가운데 위치한 버려진 마을.
짐승과 아인종의 잦은 출몰로 인해 주민들이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걸 증명하듯 폐가가 된 건물 곳곳에 야생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키르르르륵…….]
근처를 거닐던 고블린 한 마리가 베르덴을 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옛날 생각 나는군.’
공국으로 공간 이동을 했을 당시에 처음으로 죽인 것이 고블린이었는데.
베르덴이 마법을 사용하려 손을 뻗으려 하자 폐가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강철 볼트.
콰직! 고블린의 머리를 손쉽게 꿰뚫고는 나무 밑동에 처박혔다.
뒤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래켜서 미안하네. 기다리다 보니 많이 심심해서 말이야. 뭐, 얼굴을 보니 놀란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습니다만.”
“그와 별개로 나는 꽤 일찍 왔거든.”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볼트를 회수했다.
폐가 안쪽으로 살며시 날려 보내자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왼손에는 쇠뇌, 오른손에는 볼트를 들고, 중절모를 쓴 중년의 사내.
그의 턱에는 화상 흉터가 짙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군, 유명인 애셔.”
암상인 클란드.
베르덴에게 경매장 목록을 주었던 사람.
“당신이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빈테르트와의 불가침 조약 때문에 서로 간에 건들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그저 표면적인 부분뿐이지. 물밑에서는 이런저런 것들이 오가고 있네. 게다가 빈테르트는 왕국 범죄 세력의 정점이지 않은가. 그들이 조약을 곧이곧대로 지키리라는 걸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할 테지. 이해했나?”
이해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니까.
“페르네가 물어봐 달라고 하더군요. 대체 언제부터였냐고.”
“언제부터였냐라…….”
클란드가 흉터를 어루만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부터였네. 애초부터 이 클란드라는 존재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만들어졌다?
‘괜히 왕국 제일의 후작가가 아니라는 건가.’
베르덴이 알기로, 클란드가 암상인으로 활동한 건 최소 십수 년…….
그동안 정보상인 페르네를 포함해, 빈테르트까지 속일 정도로 완벽하게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니.
능력도 그렇지만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그나저나 설마 자네와 같이 일하게 될 줄은 몰랐네.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야.”
클란드가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오게. 서서 이야기하기엔 내가 나이가 들어서 말이야.”
* * *
버려진 마을의 폐가.
베르덴과 클란드가 삐걱거리는 의자에 마주 앉았다.
“후작가를 통해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네. 현상 수배범을 잡고 정체 모를 흑마법사들과 싸우는 등 크고 작은 의뢰 수십 개를 해결하고 그 완수율은 100%. 더군다나 각하께 의뢰를 받아 여기까지. 아주 바쁘게 살아가고 있더군. 그만큼 무지막지하게 보수를 받긴 하겠다만…… 아무리 결과가 따른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지 않나?”
지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베르덴이 원해서 하는 거였으니까.
“문제없습니다.”
“패기가 넘치는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비밀 사교장과 옛 왕성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겠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1왕자의 비밀 사교장에 초대받은 자는 총 여섯 명.
베르덴은 그중 하나인, 암상인 클란드의 측근으로 위장하여 옛 왕성으로 잠입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계획이었다.
‘내가 위장할 인물은 ‘말테드’라는 남자.’
신체 조건은 자신과 비슷하며, 벙어리라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성격은 담담하며 주무기는 부여 마법을 통한 신체 강화와 합급으로 만들어진 너클.
연기에 생소한 베르덴에게는 딱 맞는 역할의 인물이었다.
“글씨 하나 틀리지 않게, 아주 제대로 외웠군. 좋아, 이제 한번 말테드의 얼굴로 위장해 보게.”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기만의 얼굴을 꺼냈다.
어떠한 구멍도 뚫려 있지 않는 백색의 가면으로 얼굴을 덮자, 피부와 맞닿은 부분에 마력이 미세하게 일었다.
그러고는 미리 접했던, 말테드의 초상화를 강하게 떠올렸다.
가면에서 맥동하는 마력.
이내 가면이 흐릿해지더니 말테드의 얼굴을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목 부근 위로, 머리카락까지 전부.
잿빛 머리칼과 벽안을 가진 마법사가 아닌.
입가에 십자 흉터가 있는, 검은 더벅머리의 얼굴의 사내가 갈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완벽하군. 혹시 불편한 점은 있나?”
“없습니다.”
시야도 느낌도 평소와 같다.
툭툭 쳐 봐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겠지만, 그걸 쓰고 있으면 자네가 애셔로서 인식되지는 않을 걸세. 어디까지나 3위계 이하의 마법만을 사용한다면 말이지.”
기만의 얼굴의 약점.
과한 마력을 일으키거나, 4위계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면 위장은 해제된다. 다시 사용하려면 약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하고.
“뭐, 들키지만 않으면 마법을 사용할 일도 없을 테지. 그래도 내구성은 매우 뛰어나네. 누가 냅다 후려쳐도 끄떡없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그리고 이건 입고 다닐 옷과 가지고 다닐 너클일세.”
금속을 덧댄 청회색의 가죽 갑옷.
그리고 그 위에 걸칠 검은색 로브와 회색의 너클까지.
“……범죄자치고는 제법 고상한 디자인이군요.”
“그야 비밀 사교장에 모이는 건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니까. 죄다 각자의 분야에서 한가락 하는 자들이니 얕보여서는 안 되지. 아,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할 텐가?”
클란드가 베르덴의 공간가방을 가리켰다.
“1왕자는 허세가 가득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라, 달리 몸이나 가방을 뒤지거나 하지 않네. 소지품을 검사한다는 것 자체를, 누가 자신에게 위해를 끼칠까 두려움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니 그 부분에선 문제가 없지만, 그 공간가방의 디자인이 문제지. 마법사 애셔와 디자인과 규격, 심지어 색까지 같은 걸 가지고 다녔다간 자칫 의심을 당할 수도 있으니. 그러니 나에게 주면 들키지 않게 보관해 줄 수 있긴 하나…… 자네는 그걸 원치 않아 보이는군.”
당연히 그렇다.
이 가방 안에는 베르덴의 재산 대부분이 들어가 있으니까. 타인의 손에 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물론 베르덴은 대책에 대해 생각해 놨다.
“이거라면 어떻습니까.”
베르덴이 불에 강하게 그을린 공간가방을 꺼냈다.
흑마도사인 백골의 비올라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허, 상태가 엄청 심각한데. 시장에 올려도 제값의 반의 반의 반조차 받지 못할 정도군.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아주 험하게 다뤘던 모양이야.”
……주인을 죽이는 과정에서 그런 건데.
베르덴은 말을 삼켰다.
“뭐, 그거라면 괜찮겠군. 디자인도 아예 다르고, 크기도 작아 로브 안에 숨기기도 쉽고 말이야. 오히려 겉이 엉망진창이라 아주 범죄자스러워. 이걸로 소지품 문제도 해결된 셈이군.”
작전 개요는 완벽히 외웠다.
클란드에게서 위장 수준도 인정받은 상황.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이제 출발할 생각인데, 달리 궁금한 점이라도 있나? 예를 들면 왜 자네를 뭘 믿고 이런 엄중한 의뢰를 맡겼는가에 대한?”
“그건 이해했습니다.”
베르덴은 여러 번의 의뢰로, 후작가에게 믿음을 받았다.
그리고 옛 왕성의 보안을 뚫을 수 있는 건 베르덴 외에 대체자가 없다는 사실. 납득하지 못할 건 없었다.
하나,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제가 위장한 말테드란 남자, 실존 인물입니까?”
“실존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
사람을 만드는 건 간단하다.
적당히 흔적을 만들고, 소문 좀 내 주면 세간에서는 그러한 인물이 있다고 믿게 되니까.
클란드는 그런 방식으로 여러 거짓 인물을 만들어 왔다.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번 잠입 의뢰도 그중 하나였다.
“쓸 수 있는 패를 많이 갖는 건 기본이지. 물론 그것들을 잘 관리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야. 그래서 다른 질문 하나는 뭔가?”
“개인적인 질문입니다.”
“말해 보게.”
“이번 의뢰의 목적. 단순히 왕권 견제를 위해섭니까?”
왕과 1왕자의 모종의 거래…… 그걸 파악하려 하는 건 이해가 된다.
잘 이용만 한다면 2왕자와 3왕자 둘이 1왕자를 견제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1왕자의 주요 세력들에 대해 파악하는 건 다르다.’
막대한 자금과 페르네의 정보망까지 동원했다.
분명 1왕자가 가진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일 터.
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런 노력을 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자명한 건, 정치적인 싸움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것뿐.
그에 클란드가 답했다.
“……어느 하나의 결과에는 여러 이유가 담겨 있지. 대외적으로 아인종과 짐승으로 인해 버려졌다던, 이 마을의 폐가 곳곳에 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래도 결과는 같네.”
에스티리아 왕국을 위해.
“우리는 단지 그뿐일세.”
* * *
에스티리아 왕국의 전 수도, 에슬라.
현재 수도를 포함한, 왕국의 네 개의 대도시 중 하나인 만큼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에슬라의 중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 위에 세워진 옛 왕성, 아리엔테 내부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밀 사교장.
그것은 병사와 사용인들 사이에서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감히 입을 열어서도 안 되고 실수는 아예 용납되지 않는다.
자존심이 드높은 1왕자 발르그나는 타인에게 창피를 당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니까. 특히나 자신의 위엄을 내세워야 할 세력들 앞에서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없군.’
집사 세누엘이 복도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봤을 때쯤, 병사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세누엘 님, 귀빈들이 오고 계십니다.”
“바로 가지.”
세누엘이 서둘러 성문에 도착했다.
성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다리.
그중 정문과 연결된 다리에서 세 명으로 이뤄진 일행이 걸어오고 있다. 이윽고 성문을 통과하자, 시종일관 히죽이고 있는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킥킥킥킥킥, 이거, 이거, 내가 먼저 온 거 같은데?”
왕국 북부 마약상, 광인 톨라브.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과 피폐한 피붓결의 얼굴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반쯤 이성이 나가 있는 눈동자가 세누엘에게 향했다.
“아리엔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톨라브.”
“킥킥, 아, 세누엘. 비밀 사교장이 재작년에 열렸으니 2년 만인가? 그 샌님 같은 낯짝은 여전하네?”
톨라브의 비아냥에도 세누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두 분은 ‘알’과 ‘엘’이 맞습니까?”
“그런데?”
“확인되셨습니다. 안내를 따라 이동해 주시길. 참고로 사교장이 열리는 곳은 재작년과 같습니다.”
세누엘이 손을 펼쳐 성을 가리켰다.
그 태연한 모습에 톨라브가 어깨를 들썩였다.
“킥. 아─── 사람 개무시하는 것도 여전하네. 너는 입가가 좀 더 찢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럼 왕자님께 내가 죽을 테니 그건 안 되겠지?”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렇지?”
무엇이 웃긴지 낄낄거리는 톨라브.
각종 마약에 중독된 그는 그야말로 광인이 따로 없었다.
톨라브가 세누엘의 어깨를 툭툭 치곤 성안으로 들어갔다.
세누엘이 불쾌한 얼굴로 어깨를 털었다.
‘첫 번째 손님부터가 광인이라.’
왠지 이번 사교장은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혀를 찬 세누엘은 곧바로 표정을 관리하며 다음 손님을 맞이했다.
“배가 고프군.”
동부의 큰손, 거상 다리오.
“비밀 사교장을 여는 건 오랜만인걸?”
공작과 음해의 설계자, 넬리타.
“돈이 되는 일이면 좋겠는데.”
돈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게울 용병단의 단장, 게울.
에스티리아 왕국 전역에서 악명을 떨치는 자들이 측근들을 데리고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암상인 클란드까지.
“건강한 모양이군, 세누엘.”
“피차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클란드.”
세누엘이 클란드의 뒤로 시선을 보냈다.
“재작년과는 다른 분이시군요. ‘말로스’ 맞으십니까?”
베르덴이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신분은 확인되었다. 클란드의 말대로 소지품을 건드는 일도 없었다.
‘간단하군.’
그때, 멀리서 말밥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과 달리 마차에 탑승해 성문을 통과한 자들. 그들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마부를 제외하고, 마차에서 네 사람이 내렸다.
빈테르트의 수장, 로베르트.
그녀를 필두로 암흑가 왕의 비서, 가일. 그리고 경비 부문의 간부인 쌍둥이 마법사, 로바트와 록키가 차례로 하차했다.
“빈테르트를 뵙습니다.”
그들을 마주한 세누엘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이제까지처럼 꼿꼿하게 선 채가 아닌, 마치 왕자 혹은 왕을 대하듯이 말이다.
“신원 확인이 필요한가요?”
“물론 아닙니다.”
빈테르트는 1왕자의 기반이자 기둥.
당연하게도 다른 이들과는 대우 자체가 달랐다.
로베르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를 마주한 클란드가 중절모를 벗었다.
“잘 지내셨소, 로베르트. 이야기는 들었소. 이번 경매장이 아주 호황이었다고.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덕분이죠. 암상인도 꽤나 힘을 써 주셨으니.”
로베르트와 클란드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다.
대부분 암흑가 경매장에 대한 이야기로, 그에 대한 수익 구조와 앞으로의 전망 등에 대해서 말이다.
“아, 이런. 얘기가 길어졌군요. 이후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죠.”
“원하실 때 불러 주시오.”
클란드가 길을 양보했다.
로베르트는 그 배려를 받으며 일행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그 순간 로베르트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확히 말테드로 위장한 베르덴 앞에서 말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응? 왜 그러시오. 말테드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잠시만요.”
로베르트가 클란드를 지나치며 천천히 다가갔다.
베르덴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테드.
클란드의 측근으로서,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으나, 이렇게 실제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묘한 기시감이 든다.
아주 강하게.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