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비밀 사교장 (1)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이른 아침.
베르덴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마법사의 회한. 그리고 유자의 로브.
회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색감은 차가운 듯한 인상을 주면서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금속을 보는 것처럼.
‘나쁘지 않군.’
베르덴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착용감도 상당히 괜찮았다. 마흐바트의 가죽 장비를 입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내 채비를 갖춘 베르덴이 칼리아의 자택을 나섰다.
어제 샘웰의 주점에서 송별회를 했기에 작별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소란스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경비병의 안내를 따라, 베르덴이 성문을 통과했다.
어느 정도 라인즈와 멀어진 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향을 확인한 후, 구름 위까지 고도를 높이고는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비행주파>
베르덴이 하늘을 질주했다.
휴식은 취할 만큼 취했기에 컨디션은 최상.
전력으로 속도를 높인 베르덴은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세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이 닫히기 전에 말이다.
베르덴이 아세른의 거리를 거닐었다.
‘……뭔가 생소한 기분인데.’
하긴 이곳을 떠난 지 약 한 달 정도가 지났으니.
이번 흑마법사에 대한 토벌은, 베르덴이 해 왔던 일들 중에 가장 긴 의뢰였다. 물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페르네의 주점에 들어섰다.
사람이 없는 걸 보아 오늘은 쉬는 날인 모양.
베르덴이 인기척을 내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정령 블루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블루가 미약하게 반짝였다.
두려운 듯하면서도, 뭔지 모를 반가운 듯한 감정이 느껴지는 불빛이었다.
‘……뭐지?’
두려운 건 이해하지만 반갑다니.
베르덴을 죽이려고 했던 정령을 되살려 주긴 했지만…… 안전과 페르네의 경호를 위해 강제 마법진 콜젼(Coercion)으로 행동을 일부 제약했는데.
어째서 저런 긍정적인 감정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마력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건가?’
정령 블루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건 베르덴의 순수한 마력.
어쩌면 그 영향이 깊을지도 모르겠다. 아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윽고 연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나왔다.
페르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무사하셨네요.”
“오랜만이군.”
“……그리고 태연하신 것도 여전하시고요.”
베르덴이 의자에 앉았다.
바(Bar)를 사이에 두고 페르네와 블루와 마주했다.
음료가 담긴 컵이 둥실 떠올라 베르덴 앞에 안착했다.
정령으로 서빙을 한다라. 그런 주점은 아마 이곳이 유일하겠지.
음료로 목을 축인 베르덴이 물었다.
“겔톤은 어디에 있지?”
“그 모험가는 아세른을 떠났어요. 왕국 남부에서 일어난 언데드 사태 때문에 모험가 길드에서 지원 요청 떨어졌거든요.”
특히나 겔톤은 미스릴 모험가 파티의 일원.
그런 귀중한 전력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론 강의를 미루는 건 불가피했다. 본인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현재 남부 상황은?”
“수백이 뭉친 언데드 무리를 몇 개나 격파하면서, 언데드 군세는 와해를 시키긴 했는데. 그 탓에 언데드가 사방팔방 흩어져서 곤란해진 모양이에요. 뭐, 그래도 토벌이 귀찮아질 뿐이지, 언데드의 숫자가 줄어서 사상자가 확 급증할 일은 없을 거라네요.”
이어 페르네가 서류를 하나 건넸다.
“그리고 이건 유물 탐사단이 보낸 탐사 보고서예요. 일자별로 정리해 뒀으니 보기 편하실 거예요.”
“고맙군.”
베르덴이 보고서를 훑었다.
현재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의 위치는 아르에곤산맥. 실종된 탐사단이 남긴 흔적 덕분에 일찌감치 테인체 구릉 탐색이 끝났는데, 산맥에서도 탐색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아르에곤산맥의 지형은 유적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다라…….’
마도왕의 무덤이 과연 지형에 좌우될지는 의문이지만.
베르덴보다 전문적인 그들의 의견이 더 정답에 가깝겠지.
그런 이유로 탐색자들은 산맥을 통과해 마지막 탐색 장소이자, 왕국의 2대 금지 중 하나인 ‘동부 늪지대’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크게 단축됐다.
잘만 한다면 보다 이른 시기에 마도왕의 무덤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보고서의 내용이 만족스러웠다.
“그것 말고도 외수의 추적도 착착 진행되고 있어요. 진행 속도를 이대로 유지하면, 늦어도 두 달 이내에는 원하시는 정보를 손에 넣게 되실 것으로 보여요.”
“그거 잘됐군.”
소식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이었다.
“그럼 알려 드릴 건 다 알려 드렸으니…… 저도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페르네가 몸을 기울였다.
“왕국 남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 *
베르덴이 주검의 영광과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언데드 군세를 푼 것과 교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흑마도사 등 경청하고 있던 페르네의 얼굴에서 어느새 표정이 사라졌다.
“그 흑마법사 집단이…… 그렇게 강했다고요?”
페르네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3왕자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정도라니. 조합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놈들을 토벌했다니.’
베르덴이 강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이 마도사에게 통용될 정도라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마법사가 이례적인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페르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그런데 주검의 영광이란 자들이 보복하러 오지는 않을까요?”
“그러진 않을 거다. 주검의 영광은 이미 왕국에서 어떤 목적을 이룬 듯했으니 이후로 왕국에 다시 발을 들이지는 않겠지. 적어도 당분간은.”
그 목적이란 게 뭔지 거슬리긴 하지만.
알아낼 수 없는 지금은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였다.
“그럼 다행인데…….”
베르덴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페르네가 안도했다. 이내 긴장을 떨쳐 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애셔 님이 로브 안에 입고 있는 방어구, 전에 못 보던 거네요? 새로 장만하신 건가요? 아니면───”
“보수로 받았다. 칼리아 개인이 아닌, 가문에서 직접 주더군.”
후작가에서 하사하는 보수.
그렇다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터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건 아니었다.
칼리아의 목숨을 구해 준 걸 포함해, 주검의 영광을 토벌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베르덴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후작 본인에게서 의뢰를 받았다.”
“……네?”
페르네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에스퍼렌사 후작이 의뢰를 했다고? 장담하건대 예삿일은 절대로 아닐 터.
“대, 대체 무슨 의뢰를요……?!”
페르네는 베르덴의 정보상.
게다가 칼리아의 비호를 받고 있기에 배신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베르덴만큼이나. 그렇기에 후작 또한 기밀 정보를 페르네를 통해 준다고 했던 거겠지.
즉, 페르네는 의뢰의 내용을 들을 자격이 있다.
다만 무슨 의뢰인지를 베르덴이 직접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자세한 건 듣지 못했다. 그래도 곧 세부 내용이 너에게 전달될 테니,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다.”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들어가지.”
베르덴에겐 할 일이 있었다.
마법사의 회한에 어떤 부여 마법을 등록할지 고민해 봐야 했으니까. 주점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페르네가 눈을 깜빡이며 바라봤다.
그러고는 짝!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래,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야? 당황할 필요는 없어. 안 그래, 블루?”
블루가 은은하게 명멸했다.
페르네는 이미 지금의 삶에 익숙해졌다.
이제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점이 통째로 날아간다고 할지언정 담담하게 바라볼 자신이 있었다.
무슨 의뢰든지 상관없다.
그저 정보상으로서 할 일을 다할 뿐이다. 페르네는 내심 결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옛 왕성 잠입……?”
후작이 보내온 의뢰서는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 * *
“아니, 애셔 님. 이거 맞아요? 잘못 걸리면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의 표적이 될 텐데요? 아무리 에스페런사 후작가라도 왕가를 대놓고 상대할 수는 없어요!”
“안 걸리면 되겠지.”
베르덴이 후작이 보내온 의뢰서, 정확히 말해 ‘옛 왕성 잠입 계획서’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갖가지 기밀 정보가 담겨 있었다.
옛 왕성의 전체 설계도.
그 왕성 내에 있는 마법진의 종류와 배치 병력의 숫자와 위치 또한.
그야말로 왕국 제일의 후작가다운 정보력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쌓아 뒀는지…… 아마 오랜 기간 준비했을 게 분명하겠지.
“그리고 잠입 방법까지 상세하더군.”
베르덴이 손으로 짚은 서류 한 장.
그것을 본 페르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1왕자가 주최하는 ‘비밀 사교장’ 말인가요.”
후작이 고안한 잠입 방법은, 단순히 성벽을 넘어서는 게 아니다.
이용할 건 바로 1왕자가 암암리에 주최하는 비밀 사교장이다.
그 목적은 언데드 사태로 잠시 와해된 세력들을 규합하는 것.
당연하게도 참가자는 그를 지지하는, 로아프라의 ‘빈테르트’를 포함한 갖은 범죄 세력의 수뇌부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 에스퍼렌사 후작의 협력자가 숨어 있다.
그를 통해 사교장에 들어가, 옛 왕성에 침입하는 것이 두터운 성벽과 보호막을 넘어서는 방법이었다.
페르네가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에스퍼렌사 후작이 보낸 정보는 엄청나요. 1왕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발광할 게 뻔할 정도로요. 게다가 설마 ‘이 사람’이 후작과 손을 잡고 있었을 줄이야…….”
협력자는 암흑가와 관계가 깊다.
하물며 페르네와도 친분이 있으며, 베르덴과도 일면식이 있었다. 그와의 거래 덕분에 베르덴이 아주 큰 이득을 보게 되기도 했었다.
페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계획이 허무맹랑하지 않다는 건 분명해요. 후작이 준 ‘기만의 얼굴’이라는 가면을 사용해, 협력자에게 협조를 받으면 잠입 자체는 문제없겠죠. 왕성의 보안도…… 애셔 님이라면 충분히 넘어서는 게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참가자들은 뱃살이 차오른 귀족들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범죄자들이에요. 거기다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가 무엇을 거래했는지도 알 수 없고요.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많은데…… 혹시 잠입 같은 거 해 본 적 있으세요?”
지금과 아예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은 있었다.
마탑의 보물고 및 동력원에 들어갈 때.
그리고 글러트니의 박사로 위장했을 때 말이다.
베르덴이 답했다.
“조금은.”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시니 다행이네요. 크흠, 어쨌든 단 한 번의 실수도 일어나서는 안 돼요. 애셔 님은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이미 알려져 있으니, 얼굴이 발각되면 그 파장은 저뿐만 아니라 후작가에까지 미칠 테니까요. 그러니 만약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을 가로질렀다.
“아시죠, 목격자가 없으면 뭘 해도 암살이고 잠입이라는 거?”
“1왕자에게 발각된다면?”
“그냥 죽이세요.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그 편이 저희가 더 안전할 테니까요.”
페르네가 단호히 말했다.
물론 진짜로 죽이라는 건 아니었고, 절대로 들키지 말라는 필사적인 경고였다.
“명심하지.”
“믿을게요. 그럼 바로 각자 준비를 갖추도록 하죠.”
남은 시간은 그리 여유롭지는 않다.
베르덴은 협력자와 만나기 전, 옛 왕성의 설계도 및 배치 병력을 암기하고 마법진을 어떻게 파훼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뭐, 하루 정도면 충분하겠군.’
암기야 베르덴의 특기 중 하나였고, 마법진 또한 대충 봐도 어떻게 파훼해야 할지 훤히 보였으니. 뭘 어떻게 해도 시간이 부족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후우, 그나저나 나한테까지 의뢰를 할 줄은 몰랐는데.”
페르네 또한 할 일이 있었다.
후작가의 사람들과 공조하여.
비밀 사교회에 참가하는 자들의 행적을 추적 및 감시하는 것.
그렇게 에스티리아 왕국 곳곳에 숨어 있는 범죄 세력의 정보를 파악하는 게 목적이었다. 다시 말해 후작은 비밀 사교장을 통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심산이라는 거겠지
‘이래서 애셔 님에게 직접 준 게 아니라, 나를 통해 기밀 정보를 보낸 건가.’
페르네의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워낙 숫자가 많고 범위가 넓은 데다가, 위험도가 높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특출난 정보원과 장비를 다수 투입해야 하기에 돈이 무지막지하게 들 터.
스케일만 따지자면, 그녀가 해 왔던 정보 추적 중에 단연코 한 손가락 안에 들었다.
후작이 의뢰서를 통해서 보낸 착수금은 17억 엘크.
그 예산 내에서 페르네는 자신의 정보망을 완벽히 가동해야 한다.
‘정보상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어차피 엎질러진 물.
페르네는 곧 각오를 마쳤다.
“블루, 나 좀 도와줄래?”
블루가 번쩍였다.
아주 환한 긍정의 의미.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 협력자와 만나는 당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