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후폭풍 (1)
칼리아는 계속해서 베르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돕고 싶어도 부상이 너무 심해 검을 들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볼 수 있었다.
그림 리퍼가 소멸하는 광경.
전력을 낸 칼리아와 글로스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강대한 언데드를.
설령 백결 기사단과 성기사단이 전부 힘을 합친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한 마법사가 단신으로 토벌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영묘에서 느꼈던 그 이상의 마력량.
그림 리퍼를 단숨에 집어삼킨 은하수의 격류와 화염 마법으로 만들어 낸 초열의 지옥.
어느 것 하나 감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칼리아가 고용했던 마법사가 보란 듯이 승리를 쟁취했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가 범상치 않은 마법사인 건 알고 있었다.
적어도 백결 기사단 내에 있는 마법사들은 감히 상대도 못 할 만큼이란 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이 정도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건 선을 넘었다.’
칼리아가 눈으로 경험한 강함.
그 힘은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수호하는 마도사를 웃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왕국의 정점에 비견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만한 존재가 그레이에서 의뢰를 받고 있는 거지?
어디에 속하건 간에 마법을 증명하기만 하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 돈도, 드높은 권력도, 사후에도 전해질 영광마저 거머쥘 수 있을 텐데.
의중을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미지는 곧 두려움으로 찾아왔다.
혹시라도 저 힘이 후작가로,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향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렇기에 칼리아는 물어야만 했다.
너는 누구냐고.
‘음, 너무 본질적인 질문인데.’
베르덴이 턱을 쓸었다.
잠시 생각해 봤지만 스스로를 말로써 정의하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베르덴은 말 몇 마디로 표현될 만한 느긋한 일생을 살아오지 않았다. 복수자, 실험체, 연구자 등 갖가지 삶이 겹쳤으니.
‘하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생각을 끝낸 베르덴이 답했다.
“저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라니.
분명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칼리아는 순간 조롱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베르덴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장난이 아닌 진심. 칼리아는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전신을 옥죄고 있던 긴장감이 녹아내렸다.
“그래, 당신은 마법사였…… 죠. 아주 특별한. 본의 아니게 실례를───”
“존대는 그만두시죠.”
칼리아가 반색했다.
“아, 그래도 되나? 내가 봐도 많이 어색했는데 고맙군. 그럼 그러도록 하지.”
작게 헛기침을 한 칼리아가 말했다.
“크흠, 어쨌든 구해 줘서 고맙다, 애셔. 정말로. 영묘에 이어 목숨을 구원받은지가 벌써 두 번째군”
“의뢰의 일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다. 추후 보수뿐만 아니라 사례도 톡톡히 치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래. 기대해도 좋을 거야.”
칼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칼리아 님!”
“글로스 단장님!”
백결 기사단장 베스파와 성기사 켈시아.
통로에서 나타난 둘이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팔 한쪽이 축 늘어져 있거나 다리를 절뚝거리는 게, 그들도 상당히 엉망진창이었지만 죽음의 기사에게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칼리아는 머리를 벽에 기대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떠날 시간인가.’
쿠구구……!
그 순간 천장에서 돌조각과 먼지가 떨어졌다.
미약하게 떨리는 진동은 영묘에서 느꼈던 불안감과 거의 흡사했다.
“……아무래도 더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은데.”
“동감입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원, 서둘러 탑승하라!”
주검의 영광 토벌대가 전부 비행선 벨로스에 올라탔다.
부상자들까지 전부 실은 걸 확인하고는 칼리아가 비행선의 시동을 켰다. 동력을 담당하는 마석에 마력이 명멸하며 비행선이 부유했다.
그렇게 협곡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쿠구구구구구!
탑승자들이 뒤를 바라봤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방금까지 있었던 협곡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절벽에서 분리되어 낙하하는 거대한 암석을 본 토벌대원들이 중얼거렸다.
“저기에 맞았으면 비행선째로 추락했겠는데.”
“하마터면 언데드하고 같이 묻힐 뻔했어.”
이윽고 의식장이 있었던 협곡이 완전히 무너졌다.
비행선의 고도가 높아지며 안정권에 다다랐다.
그렇게 생매장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토벌대원들이 하나둘씩 기절하기 시작했다. 고된 전투로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환자는 이쪽으로!”
성기사들은 제 몸도 멀쩡하지 않았음에도 위급한 부상자들을 우선시했다.
비행정 내부.
칼리아는 중상자로서 최우선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치유의 기적을 받아 상처를 일부 회복하고, 비행선에 있는 응급 도구로 전신에 붕대를 둘렀다. 그리고 오른쪽 골반 끝에 금이 간 터라 묵발을 써야만 불편하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저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을 부탁합니다.”
성기사의 제지에도 칼리아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다.
글로스, 베스파, 겔시아 등 곯아떨어진 토벌대원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신성력의 힘에 기댄다고 해도 최소 2주에서 길게 한 달간은 정양해야 할 수준의 부상들.
그러나 다행히도 사망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로난데르크 주교.
그가 장담했듯이 언데드 집단에게서 토벌대원들을 지켜 낸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주교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신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부상자들 틈에서 의식을 잃고 있었다. 듣자 하니 며칠은 깨어나기 힘들 거라고.
‘나중에 루아스교에 크게 헌금을 해야겠군.”
칼리아가 부상자들을 일별하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가로질러 비행정의 조종실로 들어서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베르덴.
그가 칼리아에게 고개를 향했다.
“벌써 움직이셔도 되는 겁니까?”
“혹시 몰라 너에게 비상 착륙 방법은 간단하게 알려 주긴 했지만 제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잠을 자도 조종실에서 자야지. 그런데 너는 따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건가?”
“저는 문제없습니다.”
베르덴은 거의 찰과상밖에 입지 않았다.
그마저도 리커버리 팔찌로 전부 치유했기에 딱히 신성력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기적으로 치유가 될지도 의문이지만.’
주교의 기적이 통하지 않는 걸 확인했기에, 성기사의 치유 또한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으나 나중에 알아봐도 될 일이다.
베르덴도 상당히 피곤했기에 지금으로선 괜히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 그만한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이렇다 할 상처 하나 없다니. 내 꼴이 한심해질 지경이로군. 뭐, 어쨌든. 애셔,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칼리아는 조종실에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너와 그 늙은 흑마법사의 얘기를 들었다. 불멸의 세상이라…… 듣자 하니 국가 단위를 넘어 세계 단위로 암약하는 조직인 것 같은데. 교구를 반파시킨 흑마도사나 강대한 언데드와 계약한 늙은 흑마법사. 이 둘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 같나?”
“기껏해야 간부 격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은 분명 강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불멸의 세상’이라는 말을 거론하기에는 부족하다. 세상에 군림하는 강자들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으니까.
역시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늙은 흑마법사가 그러더군.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이미 왕국을 떠났을 거라고. 거기다 언데드 외에 다른 흑마법사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는 건…….”
“이미 왕국에서 어떤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겠군요.”
“그게 정론이겠지. 그리고 그건 더 이상 왕국에 볼일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풀썩. 칼리아가 침상에 몸을 누였다.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이고 싶어 하는 흑마법사 집단이라. 일개 후작가 자식이 감당할 스케일이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우리가 한 일이 의미가 있었을까? 결국 놈들은 목표를 달성했는데?”
“적어도 흑마도사와 그림 리퍼는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마저 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지. 애초에 교구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못했을 거고.”
“절 고용한 건 칼리아 님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칼리아의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슬슬 잠이 오는군. 하긴 영묘부터 시작해 주검의 영광만 상대한 지 거의 20일이나 흘렀으니 당연한 건가……. 너나 나나 당분간은 푹 쉬어…… 야…….”
칼리아의 의식이 단번에 떨어졌다.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베르덴이 가볍게 염력을 펼쳤다. 근처에 있던 담요가 칼리아 위에 내려앉았다.
‘나도 잠 좀 잘까.’
베르덴이 눈가를 어루만졌다.
상처만 없다 뿐이지 지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나른한 몸을 이끌고 조종실을 나선 그가 빈방에 자리를 잡았다. 곧장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베르덴은 오랜만에 깊은 수면을 취했다.
* * *
에스티리아 왕국 국경.
흑마법사 리마넨은 절벽 위에 서서 왕국을 바라봤다. 하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바뀌는 건 없었다.
노사와 비올라.
둘 다 소식이 없었다.
“리마넨 님, 지금이라도 의식장을 확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두 분은 이미 죽었을 테니.”
사인(死因)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림 리퍼 의식이 끝났음이 분명한 시간에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추적대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누가 그 둘을 죽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리마넨에겐 사명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이대로 복귀한다.”
위대한 주검.
그 첫 번째 신체를 마침내 손에 넣었으니. 도중에 죽는다고 해도, 언데드로 되살아나 그 신체를 ‘첫 번째 하인’에게 전달해야 한다.
오랜 세월 꿈꿔 온 숙원을 위해서.
리마넨과 흑마법사들이 왕국을 뒤로했다.
지난 2~3년간 지내 왔고, 비올라와 노사를 포함한 다수의 흑마법사가 사망했지만 미련은 없었다.
의식장이 제대로 가동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들로서는 왕국에 돌아올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주검’이 부활하시는 날.
그때가 되면 다시 이 땅을 밟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새로운 세상을 선사하리라.
죽음만이 존재하는 불멸의 세상을.
* * *
다음 날, 베르덴이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니, 날이 밝은 걸 보아 하루를 내리 잠든 모양이었다. 방에 붙어 있는 화장실에서 씻은 베르덴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어제 느꼈던 나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개운함만이 느껴졌다.
‘마력도 상당히 회복했고.’
컨디션은 상당히 좋다.
그대로 문밖으로 나서자 팔에 부목을 댄 백결 기사가 보였다. 지나쳐 가려고 하자 백결 기사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애셔 님.”
“예……? 아, 예.”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뭐지? 왜 갑자기 인사를…….’
멀어져 가는 기사의 등을 보며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 마주치는 사람마다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심지어 성기사까지.
그렇게 나아가던 끝에 조종실 문을 두들겼다.
“애셔인가? 들어와라.”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섰다.
조종실에는 칼리아뿐만이 아니라 베스파도 있었다.
“크흠, 좋은 아침이다.”
베스파가 말했다.
이 사람도 뭔가 호의적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베르덴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칼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다른 기사들에게도 비슷한 인사를 받았나 보군. 어떤가? 준귀족들에게 존대를 받는 건.”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너에겐 갑작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딱히 이상할 건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생명의 은인인데. 나와 베스파 그리고 백결 기사단 전체와 성기사단을 포함해서 말이야.”
……음,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군.
‘인정을 받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입으로 꺼내자니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았다. 대충 납득한 베르덴이 화제를 돌렸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단은 교구로 갈 생각이다. 지금쯤이면 교구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퍼졌을 테니까. 왕국에 남아 있는 성직자, 성기사 그리고 주교가 돌아왔을 테니, 부상자들을 돌보기에는 적합한 환경이겠지. 그리고 테리트 영지에 들러 비행정을 반납하면 끝. 간단하지 않나?”
……간단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은 주검의 영광에 대해 모르고, 칼리아가 비행정을 훔친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 갑자기 바깥에서 기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카, 칼리아 님!”
갑판 쪽이다.
서로 눈을 마주친 세 사람이 당장 바깥으로 나갔다. 모두가 하나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들자 칼리아가 크게 눈을 떴다.
“저건……!”
비행정 벨로스를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
하늘을 점거하고 있는 대규모 비행정 한 대와 그 양옆을 호위하고 있는 소규모 비행정 둘. 그들에게는 각기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본대(本隊).
그때, 중앙 비행정에서 누군가 날아왔다.
후작가의 상징이 새겨진 로브를 두른,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녹색 금속 스태프를 든 마법사가 벨로스의 갑판에 내려섰다.
“오랜만입니다, 칼리아 아가씨.”
에드몬 로드리너.
‘역풍(逆風)’이란 이명을 소유하고 있는,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수호하는 마도사.
“에드몬 할아범……!”
“네, 접니다.”
에드몬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아 아가씨가 사고뭉치인 건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테리트 백작 각하에게서 비행정을 훔치실 줄이야. 이 늙은이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적잖게 놀랐답니다. 그리고…….”
에드몬의 눈이 부상당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허허, 이번에는 아주 대형 사고를 치신 모양입니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 근데…….”
칼리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화가 많이 나셨나?”
“허허허허허!”
에드몬이 껄껄 웃었다.
어느 순간 뚝 웃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엄청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