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69화 (169/366)

169화 그림 리퍼 (2)

노사는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봉인되어 마력을 감지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도 보일 정도의, 높은 밀도를 가진 마력의 소용돌이가 잿빛 머리의 마법사의 주위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억으로 판단했을 때 최소 5위계 이상의 출력.

그리고 직전의 전격 마법과 더불어 약관(弱冠)을 조금 넘어선 젊은 외모. 칼리아가 부른 ‘애셔’라는 이름까지.

‘칼리아 밑에서 일한다던 그 마법사인가.’

노사는 그 정체를 곧바로 간파했다.

분명 소문에 의하면 4위계라고 들었었는데…… 의도적으로 경지를 숨기고 있었던 건가?

‘저 나이에 5위계라니. 아주 대단한 재능이군.’

하나 노사의 반응은 비교적 담담했다.

이 드넓은 세상에는,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초월자가 버젓이 세상에 군림하고 있는 마당에 저 정도야 놀랍기만 할 뿐, 경악할 거리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4위계든 5위계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노사와 계약을 맺은 고위 언데드, 그림 리퍼에게는 거기서 거기였으니.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가축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 의문이 있었다.

저 잿빛 머리의 마법사가 나타난 통로는 분명 비올라가 지키고 있었다.

그 성격 파탄자가 곱상한 외모에 홀려 그냥 보내 줄 리는 없다. 깔끔하게 급소를 찔러 죽인 뒤, 골격을 벗겨 시체 껍질을 보관한다면 또 모를까.

그렇다는 건…….

어?

‘비올라가 당했다?’

순간 화들짝 놀란 노사가 고개를 들자, 거대한 암석창이 날아왔다.

신형이 흐릿해지며 실체를 숨긴 그림 리퍼.

그 탓에 무방비한 상태인 노사에게 마법이 직격했다.

찢겨 나가는 상체.

의식장 위로 피와 살점이 흩뿌려졌다. 인간이라면 여지없이 즉사였다. 그러자 시체가 연기로 변하더니 본래의 몸을 되찾았다.

노사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네놈, 비올라는 어디에 있지?”

콰아아앙!

이번엔 화염구가 날아와 폭발했다.

전신을 휘감은 불길.

살과 근육이 타오르고 피가 끓었다.

‘어른이 묻는데 대답 대신 마법을 날리다니. 버릇이 없군.’

노사가 다시금 몸을 수복했다.

그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얼룩졌을 뿐,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계약이 유지되는 한, 노사는 불사이며 고통 또한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내 노사가 베르덴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기저기 찢긴 로브.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려 나간, 눈에 익은 흔적이었다.

‘비올라와 마법전을 벌인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비올라는 사람을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살인자다.

특히나 높은 살상력을 지닌 그녀의 마도 <백색 죽음>은 상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상대가 전사라면 거리를 유지한 채 멀리서 백골을 쏘아 보내고, 상대가 마법사라면 근접전을 유도하니까.

그리고 그 힘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백골의 거미줄을 형성하여 위를 장악하고 아래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전투 방식. 그건 노사 본인이라고 할지언정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비올라를 큰 상처도 없이 죽이고 내려왔다라…….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겠지.

희귀한 마법 물품이나 아티팩트로 비올라를 무력화했거나. 순수한 실력으로 마법전에서 비올라를 찍어 눌렀거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가능성이 있는 건 전자밖에 없었다.

‘아무리 재능이 높다고 해도, 실질적인 경지는 비올라가 더 높았으니까.’

더군다나 살아온 세월이 차원이 다르기에 마법전의 경험은 비교조차 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비올라는 마도사.

그런 그녀가 마법사에게 실력으로 패배한 것보다는, 모종의 수단에 의해 허를 찔렸다는 가정이 훨씬 설득력이 높았다.

‘쯧, 그러게 안일하게 살지 말라니깐.’

노사가 혀를 차며 비올라의 한심함에 한탄했다.

뭐, 그래도 무슨 수단을 썼던 간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비실체화를 사용하는 그림 리퍼는 거의 무적이었으며, 그 힘은 비올라와 노사를 합친 것보다 더욱 강하니.

변수는 없다.

노사가 명령했다.

“그림 리퍼여, 저 마법사의 영혼을 수확해라.”

* * *

베르덴은 가볍게 날린 마법을 통해 노사를 관찰했다.

박살이 난 육신이 연기로 변하고, 그림 리퍼를 통해 부활하는 광경.

‘재생 계열은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분신의 일종인가.’

본체는 그림 리퍼…… 정확히 말하자면 사령의 보주가 근원으로 보인다.

놈의 몸이 연기로 변할 때마다 그림 리퍼가 두른 누더기, 그 안의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사령의 보주가 가진 빛이 명멸했으니까.

즉, 불사를 적용하는 주체는 그림 리퍼.

그렇기에 노사라고 불린 흑마법사의 불사를 막고 죽인다고 해도 저 언데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했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죽여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군.’

노사는 베르덴의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불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반응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이다. 어쩌면 그림 리퍼를 불러내며 자신이 가진 힘을 희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중요한 건 그림 리퍼다.

놈을 토벌하는 것이 곧 결착으로 이어질 터. 베르덴은 확신했다.

그때, 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 리퍼여, 저 마법사의 영혼을 수확해라.”

그림 리퍼가 낫을 높이 들어 올렸다.

불길한 기운이 집약된 칼날. 이내 아래로 휘두르자 수십 개의 죽음의 칼날이 쇄도했다.

<중력 장막>

암자색의 장막이 베르덴을 보호했다.

십수 개의 칼날을 튕겨 낸 장막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호오, 중력 마법이라. 전격 계열과 더불어 고위 속성을 두 가지나 다룰 줄이야. 재능 하나는 끝내주는군.”

하나 이거라면 어떨까.

죽음의 칼날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림 리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햇빛에 비친 그림자처럼 쭈욱 뻗어 나간 그림 리퍼가 낫을 다잡고는 크게 휘둘렀다.

사아아아아악!

대기가 갈라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막기에는 애매하군.’

<육체증폭>

<비행>

콰앙!

베르덴이 바닥을 차 하늘로 솟았다.

물론 마냥 도망친 건 아니었다. 허공을 베어 가른 그림 리퍼, 그 아래에 있던 지면에서 마법이 쇄도했다.

<어스본>

콰자자작.

대지의 가시가 그림 리퍼의 품을 파고들었다.

칼리아가 말한 대로 공격 도중에는 비실체화를 사용할 수 없는 모양.

베르덴이 그림 리퍼를 주시했다.

그러자 놈이 낫을 휘둘러 가시들을 부숴 버렸다. 3위계 대지 마법으로는 적중해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는다는 뜻.

노사가 박수를 쳤다.

“대단해. 그 찰나의 틈에 반격할 줄이야. 자칫하면 몸이 그대로 두 동강 날 텐데 아주 강심장이로군.”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과 동시에 그림 리퍼가 베르덴을 추격했다.

3미터나 되는 거대한 낫이 휘둘러지며 죽음의 칼날들이 그의 목숨을 노렸다.

베르덴이 곡예를 펼치며 피해 냈다.

그러곤 순간적으로 방향을 반대로 바꾸며 그림 리퍼에게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지나치는 칼날.

베르덴이 마력을 방출했다.

<염열파동>

화염의 파동이 그림 리퍼를 덮쳤다.

이어 트리플 캐스팅을 펼쳐 얼음과 번개 그리고 중력 마법으로 실체를 타격했다. 놈에게서 벗어난 베르덴이 그림 리퍼를 주시했다.

[…….]

당연하게도 이 정도 마법으로 그림 리퍼가 소멸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반응이 있다.’

물리적인 충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 대신 화염과 전격 마법에 맞은 부위가 약간 흐릿해지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열이 약점인가 보군.’

기본적인 언데드의 특성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마법을 버틸 수 있는 한계치가 엘더 리치보다 아득히 높다는 게 문제.

지금처럼 실체화되기를 기다리며 약점을 노릴 수는 있으나, 베르덴은 전투를 그렇게까지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노사도 마찬가지겠지.’

어떠한 대가도 없이 저런 언데드를 다룰 리는 없을 테니까.

베르덴이 노사의 표정을 슬쩍 봤다.

놈은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열심히 그림 리퍼를 좇고 있었다.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베르덴은 그림 리퍼의 능력을 얼추 파악했다.

방금의 반응으로 놈을 토벌할 계책까지 완성됐다.

이제 남은 건 기회뿐.

그리고 그 기회는 베르덴이 아닌, 노사가 직접 만들 것이다.

* * *

마법사의 기본은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눈앞에서 날붙이가 휘둘러지는 걸 경험한 마법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기에 단련되지 않은 반사 신경과 미숙한 대처 능력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런데 저놈은 기이하다.

아슬아슬하게 그림 리퍼의 공격을 피해 내는 움직임.

실체화를 할 때마다 틈틈이 마법을 때려 박는 끈질김까지.

게다가 그림 리퍼의 <절망의 오라>에도 칼리아나 글로스처럼 공포에 질리는 기색도 없었다.

의도한 건지, 아니면 방법이 없어서 발버둥을 치는 건지는 모르겠다.

비올라를 무력화한 수단도 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쓰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나 뭐가 됐든 노사의 심사를 뒤틀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감히 잔재주를……!’

예상대로라면 진즉에 끝났어야 했는데.

노사는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베르덴의 예상대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림 리퍼의 힘을 다룰 때마다 갈취당하는 영혼.

계약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돌연사할 리는 없을 테지만, 그렇다 해도 소모가 너무 극심했으니까.

‘어떻게 하지?’

조금 더 힘을 끌어내야 할까. 아니면 저놈의 마력이 떨어지길 기다려야 할까.

뭐가 더 효율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 베르덴이 지면에 착지했다.

노사를 바라보는 눈동자.

뭔지 모를 여유가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노사가 작게 볼 안쪽을 씹었다.

‘어쩔 수 없나.’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간 오히려 손해가 더 클 수도 있다.

그림 리퍼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져갈지 모르겠지만…… 감수하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노사가 베르덴을 보며 말했다.

“……상당한 비행 실력이군. 아주 하늘을 나는 쥐새끼를 보는 것 같아.”

“방금까지는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나?”

“닥쳐라! 그 지루한 재롱도, 시건방진 시간 끌기도 여기까지다!”

그림 리퍼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한차례 호흡을 내쉰 노사가 속삭였다.

“그림 리퍼, 놈의 정신과 육신을 정지시켜라.”

그 순간, 그림 리퍼의 누더기에서 푸른 불꽃의 눈이 타올랐다.

죽음의 수확자의 눈.

그와 마주하면 정신계가 마비된다.

푸른 불꽃과 마주한 베르덴의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

순간 베르덴의 몸이 움찔거렸다.

뒤이어 그림 리퍼의 낫에 죽음의 기운이 명멸했다. 하지만 죽음이 코앞에 있음에도 베르덴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그 모습에 노사가 히죽였다.

“진즉에 쓸 걸 그랬군.”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낫이 휘둘러졌다.

거대한 죽음의 참격.

이것으로 죽음은 확정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어……?”

베르덴의 주위로 마력이 일었다.

지금까지 봐 왔던 것보다 더욱 농밀하고 방대한 마력이.

그 광경에 노사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정신과 몸이 마비되었는데 마력을…… 아니, 애초에 이만한 마력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었다.

‘눈에 마법진이라고……?’

베르덴의 오른쪽 눈에 떠오른 역천의 마법진.

이내 마안이 발동되며 그의 손에 맺힌 회색의 마력이 별자리를 그렸다.

자그만한 빛들이 수놓인 어둠의 구체.

노사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 그림 리퍼! 당장 <아스트랄화>를 써라!”

노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혜성, 라레니아(Rarenia).

휘몰아치는 마력.

은하수의 격류가 참격을 찢어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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