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준비 완료
인간이 가진 세 가지 힘.
그중에서도 마법은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와 신성력과 달리 인간의 생활 수준을 아득히 높였으니까.
과거 오물과 쓰레기로 얼룩진, 비위생적인 도시의 거리는 현대의 빈민간에서조차 보기 힘들 정도다.
마법은 시대를 변화시키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건 우연으로 생겨난 산물 따위가 아니다.
마법은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물.
때때로 마법사 본인조차도 실험 중에 예상 못 한 결과를 맞닥뜨리는 경우는 있으나 그것 또한 필연이다. 그저 미리 알아채지 못했을 뿐.
한마디로 인과관계가 없는 마법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흑마법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로난데르크 주교의 증언에 의문이 생겼다.
‘주교가 반응하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흑마법을 구현하고 워렌스를 조종해 주교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다고?’
주교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막강한 신성력을 갖춘 그들은 성기사만큼이나 민감하다. 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니고 흑마법이 코앞에서 발현되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진즉에 정신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건 논외다.
흑마법이 지속되는 동안 마력은 계속 이어져야 하니까. 그랬다면 진즉에 주교에게 발각되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시전 속도.
그게 걸맞은 수단은 하나뿐이다.
‘마법진.’
미리 워렌스의 몸에 마법진을 새겨 넣는다면 가능하다.
연산 과정 없이, 마력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마법진이 기동할 테니까. 그 증명으로 워렌스의 머리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베르덴이 즉각 마법진을 해석했다.
흑마법에 그리 깊은 지식은 없으나 대강 어떤 마법진인지는 파악이 가능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정신착란과 화상을 입은 듯한 고통을 주는 격화의 저주를 부여하는 마법진까지, 무려 세 개나 되는 마법진이 합쳐져 있었다.
복합 마법진.
흉수는 흑마도사일 뿐만 아니라 마법진에도 조예가 깊다는 뜻이었다.
분명 워렌스는 버티기 어려운 고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자는 왜 이런 흑마법진을 새겼을까.
‘아니, 당연한 건가.’
워렌스는 주검의 영광에게 있어서 배신자나 다름없다.
사령의 보주만 탈취하면 될 걸, 굳이 나서서 교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성격을 보면 배신자를 가만히 놔둘 리 없을 터.
이건 당연한 보복이었다.
덕분에 제 발로 단서를 남긴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워렌스를 다시 눕힌 베르덴이 방으로 돌아갔다.
칼리아가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설마 놈들을 쫓을 단서라도 찾은 건가?”
“찾았습니다.”
“……!”
베르덴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서가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블랙 아워의 나침반.
마력 추적 기능이 있는 인공 아티팩트로 마법진의 마력을 추적하면 된다. 물론 베르덴이 이 같은 사실을 훤히 밝히진 않았다.
혹여 정보라도 퍼지면 블랙 아워가 움직일 테니까.
왕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지금, 블랙 아워와 직접 적대할 때가 아니었다.
“자세한 건 설명드릴 수 없지만 저에겐 주검의 영광을 추적할 수단이 있습니다. 다만 제약이 있어 명확한 위치가 아닌, 특정 범위만을 알아내는 게 전부입니다.”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닌가?”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검의 영광은 언데드로 세간의 시선을 돌리고 사령의 보주를 탈취했다. 거기다 왕국만이 아니라 교구까지 반파시켰다.
고작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대놓고 루아스교를 건드려 놓고 놈들이 느긋하게 움직일 리가 없다. 게다가 사령의 보주를 회수했다고 왕국에서 도망치지도 않겠지.
그랬다면 도둑질당하기 전에 왕국을 나갔을 테니까.
놈들은 근시일에 사령의 보주로 사건을 터뜨릴 것이다. 그게 뭔지 파악은 불가능하나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겠지.
그럴진대 단체로 말을 타고 움직이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 혼자 움직인다.’
베르덴의 <비행주파>는 군마보다도 훨씬 빨랐으니까.
그리고 주검의 영광을 상대할 전력도, 자신감도 갖추고 있었다. 홀로 교구를 엉망으로 만든 흑마도사가 있다고 한들 베르덴이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베르덴이 말하기 전에 칼리아가 선수를 쳤다.
“시간이 없다라. 그렇다면 비행정을 쓰는 수밖에 없겠군.”
“아니, 칼리아 님, 설마…….”
“어쩔 수 없다, 베스파. 상황이 심각하니까.”
“당장 운용 가능한 비행정이 있는 겁니까?”
글로스의 물음에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테리트 백작의 영지가 있습니다. 제 작은아버지 되시는 분으로, 그분께서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비행정 정박장 하나를 영지 내에서 직접 관리하고 계시죠. 거기서 비행정을 얻어 움직이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칼리아 님의 권한으로는 비행정을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작은아버지도 워낙 고지식하시기에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할 테고. 그러니…….”
칼리아가 보란 듯이 선언했다.
“비행정을 탈취한다.”
“본인 가문의 비행정을?”
로난데르크 주교가 난색을 표했다.
“미친 생각인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의 인원이 지형지물에 제약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건 비행정밖에 없으니. 그리고 자고로 허락보단 용서받기가 더 쉬운 법입니다.”
칼리아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비행정을 동원한다면 분명 제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이거라면 되지 않겠나?”
으음…… 베르덴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행정을 쓸 수 있다면 베르덴이 혼자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혼자 간다고 해도 칼리아가 들어 먹을 리도 없을 테고.
어쨌든 이동 수단은 갖춘 셈.
이제 베르덴의 차례였다.
“준비를 할 테니,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 * *
워렌스에게 새겨진 마법진을 파훼하는 건 간단하다.
세 개의 마법진이 얽힌 복합 마법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보헤미른 마탑의 보물고에 있던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난이도였다.
‘하지만 단순히 파훼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목표는 이 흑마법진을 작성한 자의 마력이다.
그러니까 마력이 거의 없는, 비어 있는 마석에 흑마법진을 이식하면 되는 일. 확실히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패할 이유는 없다.
이미 이보다도 어려운 작업을 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글러트니의 조각.
베르덴은 세 개의 마법진을 연계하여 조각에 있던 이질적인 기운을 떼어 내 마석에 결합했다. 그에 비하면 마법진을 이식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다.
베르덴이 워렌스를 방으로 데려와 바닥에 눕혔다.
그의 머리맡에 앉아 손가락 끝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직후 마법진에 실을 침투시켰다.
쩌적…… 쩌저적…….
오래 지나지 않아 바깥과 중간에 있는 마법진의 요추가 박살 났다.
이제 남은 건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진 하나뿐. 이걸 그대로 빈 마석에 이식하면 끝이다.
베르덴이 마력의 실로 마법진과 워렌스가 붙어 있는 부분을 사각사삭 긁어 내었다.
“으으…….”
고통스러운지 워렌스가 신음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내 끝에 다다라 분리되기 직전인 걸 확인한 베르덴이 왼손으로 다른 마법진을 구축했다.
결합의 마법진(The Combination).
연금술 전용 고난이도의 마법진 중 하나. 이건 그 응용이었다.
화아아악!
베르덴이 흑마법진을 분리한 순간에 다른 마법진을 기동했다. 마력의 빛이 방 전체를 비추며 흑마법진이 빈 마석에 강제로 결합되었다.
‘성공이군.’
마석 위에 새겨진 흑마법진이 작게 빛났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이 마법진을 휴대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진 자체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기껏해야 빈 마석이 마법진의 마력으로 물든 게 전부다.
솔직히 말해 이것 자체로는 세간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베르덴에겐 인공 아티팩트가 있다.
블랙 아워의 나침반.
마력을 추적해 마법사를 쫓는 기물.
거리에 한계가 있긴 하나 왕국 끝자락이나 왕국을 벗어난 게 아니라면 주검의 영광은 베르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베르덴이 망설임 없이 나침반 안에 마석을 넣고 기동했다.
그러자 빙글 돌아가는 자침이 멈춰 섰다.
자침의 끝이 가리킨 건 왕국의 북서쪽.
글러트니 때와는 다르게 자침은 정확히 한 방향만을 향하고 있었다.
* * *
한 도시 어딘가에 있는 응접실.
그 안에 세 사람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부신 황금빛 정장을 입은, 갈색 머리의 사내가 최고급 차를 즐기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검은 로브를 두른 노인, 노사가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의 사내.
에스티리아 왕가의 3왕자, ‘에버스 브륀 디 에스티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왕국 남쪽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거래를 지켰을 뿐입니다, 3왕자 전하.”
“뭐,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천의 언데드 군세로 풍족한 대지를 싹 쓸어버리다니. 너무도 예상 범위 밖이라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이거 참, 도저히 미소가 숨겨지지가 않는군.”
에버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었다.
7위계 마법 <망자의 행진>.
굳이 구하기 극히 어려운 스크롤까지 사용한 건 단순히 교구의 시선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3왕자와의 거래가 있었다.
에버스가 남색 눈동자를 빛냈다.
“이 정도 피해라면 형님들도 그냥은 넘어가지 못하겠지.”
언데드로 인해 왕국 곡창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주로 곡창지대의 영지를 다스리는 건 1왕자와 2왕자를 추종하는 귀족들. 그들의 존재는 차기 왕위 계승 경쟁이 있어서 3왕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부숴 버렸다.
그 탓에 내년에는 식량난이 찾아오긴 하겠지만 3왕자는 알 바가 아니었다. 왕국민이 굶어 죽든 말든 본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었으니까.
곡창지대에 언데드를 푼 건 순전히 다른 경쟁자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에버스의 탐욕에는 평민들의 목숨은커녕 왕국의 미래 또한 안중에도 없었다.
“아, 그리고 칼리아 그년은 어떻게 됐지?”
에버스가 주검의 영광의 힘을 빌려 만든 조합과 귀족들의 지지.
거기에 칼리아가 찬물…… 아니, 아예 얼음물을 들이부었다. 덕분에 조합은 반파되었고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까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안 그래도 세력이 부족해서 걱정인데.
에버스의 분노에 노사가 응했다.
“지금쯤이면 지하 밑바닥에 매장되었을 겁니다. 루아스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말입니다.”
“흐음, 가능하면 그 목을 내가 베거나, 성욕에 미친 내 작은 형님에게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죽었으니 기분이 좋긴 좋군.”
“그럼 이제 전하께서도 대가를 지불하실 때입니다.”
“아직 마지막 거래를 이행하지 않았다만?
“지난 2~3년간 보여 주었던 저희의 성의라면 선수금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노사의 진지한 음성에 에버스가 킥킥거렸다.
“장난친 거니 너무 진지해지지는 말라고. 확실히 가져왔으니까.”
에버스가 손짓했다.
그의 뒤에 있던 사내가 직사각형의 기다란 나무 상자를 탁상 위에 올렸다. 노사가 눈을 빛내는 걸 본 3왕자 에버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희가 말한 대로 왕성의 지하에 묻혀 있던 걸 발견한 거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서. 그래서 묻겠는데, 이건 대체 뭐지? 왕가의 기록물을 뒤져 봐도 이와 같은 건 적혀 기록되어 있지 않던데 말이야.”
“그건 거래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듯.
괘씸하긴 하지만 에버스는 이들을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주검의 영광이 가진 힘은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기 충분했으니까.
‘거기다 이 상자에서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든다.’
감히 열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에스티리아의 왕좌였으니까.
에버스가 상자에 관심을 끊고 품속에서 시험관을 노사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3왕자 에버스 본인의 피와 작은 살점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 거래를 위해, 네가 필요하다고 했던 내 피와 살점이다. 엄청나게 아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존경심이라곤 일절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쯧.
혀를 찬 에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가 할 건 더 없으니, 왕성으로 돌아가 그 ‘의식’이 끝나길 기다리겠다. 주인의 명에 따라 죽음을 내리는 강대한 언데드의 힘. 기대하고 있겠다.”
에버스가 호위와 함께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비올라가 나타났다.
“이제 밥맛 떨어지는 왕자님도 안녕이네. 흠, 거래도 끝났는데 이참에 콱 죽여 버릴까?”
* * *
“그만둬라, 비올라. 지금은 저 철딱서니 없는 왕자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그보다 사령의 보주는 가지고 왔나?”
“그야 물론이지.”
비올라가 사령의 보주를 꺼냈다.
전에 봤던 거에 비해 마력과 사기가 소모되어 있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다시 채우면 그만이니까.
노사가 사령의 보주를 받아 챙겼다.
“교구에서의 일은 조용히 끝냈겠지?”
“조용히…… 는 아니고. 좀 날뛰긴 했지.”
“…….”
노사의 살벌한 눈빛에 비올라가 손을 저었다.
“걱정하지 마. 단서가 될 만한 건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아니, 애초에 우리를 추적할 단서 같은 게 존재할 리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거 모르나?”
“모르면 어때. 진짜 기적적으로 걔들이 우리를 추적하면 뭐 어쩔 건데? 그 자리에서 싹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안 그래?”
“너는…….”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데 정신 팔지 말고 상자나 확인하자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비올라가 냉큼 노사의 곁에 앉았다.
노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비친 나무 상자.
이 안에 있는 것이 노사와 비올라가 3왕자와 거래를 한 이유 그 자체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내 둘이 숨을 삼키고는 같이 나무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위대한 주검에 무한한 영광을.>
정확히 한 문장을 동시에 외자 나무 상자가 반응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틈새가 생기더니 쩍 벌어졌다. 노사가 아주 조심스레 틈새를 손가락으로 비집고는 힘을 실었다.
이윽고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사람의 다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비올라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이게 위대한 주검의 신체야? 뭔가 되게 평범하네. 이거 진짜 맞아?”
“말조심해라.”
비올라에게 경고한 노사가 다리를 살폈다.
언뜻 보면 평범하나 그에게는 느껴졌다. 5위계 흑마도사인 둘조차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죽음의 기운이 말이다.
그 사실에 노사가 환희에 젖었다.
“아아…….”
노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주검의 영광.
강대한 흑마법사를 이끄는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진 위대한 주검의 신체 조각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을 거닐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 에스티리아 왕국을 시작으로 남은 신체 조각마저 찾아 위대한 주검을 부활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생명의 개념이 사라지고 죽음만이 남아 있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올 터.
불멸의 세상.
그것이 주검의 영광의 종착지였다.
상자를 닫은 노사가 리마넨을 호출했다.
“너는 이 상자를 갖고, 다른 이들과 함께 당장 본거지로 향해라.”
“두 분께서는 가지 않으십니까?”
“우린 의식장이 제대로 가동되는지 확인한 뒤에 출발할 것이다.”
3왕자와의 약속 따위는 사실 알 바가 아니었다.
주검의 영광이 온 목적 중 하나에 의식의 가동을 확인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3왕자가 과연 강대한 언데드를 가지고 무슨 짓을 벌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예, 노사.”
고개를 숙인 리마넨이 상자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노사와 비올라가 협곡에 숨겨져 있는 고대 의식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원형의 의식장.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고, 의식장 경계에 있는 등잔대들 옆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전신의 푸른 핏줄이 불거지고 피부가 일부 녹아내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자들.
노사가 의식장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부터 ‘그림 리퍼’ 의식을 거행하겠다. 그러니 주변을 잘 지키도록.”
“여기에 대체 누가 온다고. 알았으니까 빨리 시작해.”
비올라의 투정을 무시한 노사가 사령의 보주를 제단 위에 있는 시체의 가슴에 올렸다. 그러곤 죽은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높게 쳐들었다.
마도 <죽음축적>
───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방대한 마력이 퍼져 나가며 경계에 있는 인간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노사의 마도는 다수의 죽음을 산 자에 몸에 가두는 것.
그렇게 하여 모아 둔 죽음의 기운과 사령들을 임의로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거창한 마도는 아니었으나 강대한 언데드를 탄생시키는 데는 강력한 마도였다.
산 자 안에 쌓아 둔 죽음이 빠져나오며 사령의 보주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어 완전해진 사령의 보주를 이용해, 죽음의 수확자 ‘그림 리퍼’를 만들어 내어, 3왕자의 피와 살점으로 계약해 의식을 완성하면 끝.
노사가 서 있는 의식장은 바로 이런 용도를 위해 고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에스티리아 왕국을 떠나는 날이 코앞까지 찾아왔다.
* * *
테리트 백작 영지에 있는 정박장.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총 3척의 소규모 비행정을 관리하는 장소였다. 비행정은 이동 수단을 넘어 전략적 자산이기에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기사 웨이튼은 수년째 정박장의 경비를 맡아 왔다.
지루하기는 했지만 봉급도 많고 자기 개발에 힘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은 터라 딱히 불만은 없었다. 사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그가 비행정의 경비를 담당하는 당직.
웨이트는 밤새 마실 커피와 재밌는 소설책 하나를 들고 당직을 섰다.
이따금씩 순찰을 돌며 각 담당자가 잘 있는지 확인하면 그뿐. 사실상 깨어 있기만 하면 되는 터라 새벽의 여가를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흐흐흐, 아주 좋아.’
밤샘 준비는 완벽하다.
웨이튼은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 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벽.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
스르릉!
기사답게 즉각 반응한 웨이튼이 검을 든 채 뒤로 돌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기사.
“어? 칼리아 님?”
“오랜만이군, 웨이튼.”
태연히 인사를 주고받은 그녀의 모습에 웨이튼은 혼란스러웠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영애가 왜 여기에? 아, 백작 각하의 영지에 잠시 방문하신 건가? 아니, 그런데 이 시간에 정박장에는 왜 오셨지?”
갖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미처 궁금증이 해소되기 전에 칼리아가 미안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작은아버지께 잘 전해 주게. 비행정은 잘 쓰고 돌려주겠다고.”
“네?”
그 순간 칼리아의 뒤에서 베스파와 글로스가 튀어나와 웨이튼을 제압했다. 사지를 포박하고 확실하게 목을 조여 단숨에 의식을 빼앗았다.
웨이튼은 실력을 갖춘 기사.
교전이 벌어지면 조용히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칼리아가 미끼로 나선 것이다.
어쨌든 이걸로 비행정 주변의 병력을 전부 제압한 상황.
칼리아가 명령했다.
“오른쪽 비행정 ‘벨로스’에 탑승하라. 운전은 내가 직접 하지.”
근처에 잠입해 있던 모두가 우르르 비행정에 탑승했다.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본 베르덴은 생각했다.
‘……이게 맞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곧이어 중심의 마석이 기동하며 비행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테리트 백작 영지에 비상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