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61화 (161/366)

161화 침묵의 교구 (3)

“흐흐흠.”

주검의 영광, 백골의 비올라.

투명화를 쓴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비행했다. 시선을 살짝 아래로 향하자 검게 죽어 버린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7위계 마법 <망자의 행진>으로 탄생한 언데드들이 만든 악몽이었다.

비올라가 히죽 웃었다.

“예쁘네.”

생명은 온데간데없이 죽음만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죽음의 기사나 엘더 리치와 같은 강력한 언데드는 없고, 하위종 언데드가 대부분이라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사망자 2~3천 명 언저리 정도가 최선이겠지.

뭐, 한꺼번에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 군세를 탄생시킨 것만으로도 7위계 마법다운 압도적인 위력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 그나저나 짜증 나네. 교구에 있는 위선자들을 죄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비올라는 지난 2개월간 교구에 잠입해 있던 터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성직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빛의 신 루아스한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배신자 워렌스를 가지고 놀며 짜증을 풀긴 했으나 며칠 반복하니 질릴 대로 질렸다.

그렇게 한계점에 다다르던 중 지시가 떨어졌다.

대규모 언데드 출몰로 인해 교구에서는 대부분의 병력을 왕국 남쪽으로 파견했다.

노사의 계획대로 교구의 방위가 가장 약해진 상황. 여기서 비올라가 주교 하나를 암살하고 그 탈을 뒤집어쓴 뒤, 사령의 보주를 탈취하면 끝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최소한의 보상은 받아야지?’

그래서 비올라는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

떠나기 전에 교구에 남아 있는 위선자들을 죄다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주교 하나가 목숨까지 내걸고 발악하는 탓에 그 계획은 절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면에서 다수의 주교를 상대하는 건 상처 하나 없이는 불가능했으니까. 자칫하면 사령의 보주 운반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고.

비올라는 주검의 영광을 위해 쾌락을 포기했다.

그래도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앞에서 학살자를 놓쳤다는 것에 위선자들은 더욱 분노할 테니까.

“아, 그래도 성기사들 반응 못 보고 가는 건 좀 아쉽긴 하네.”

열심히 언데드를 토벌하고 교구로 돌아갔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절망하거나 분노하겠지.

웃기는 일이다.

루아스교의 경전에 적혀 있길, 삶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과정이라고 적혀 있다.

더러움을 씻어 내지 못하고 악에 물들어 타락한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깨끗해진 자는 빛의 신 루아스의 곁으로 간다고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차피 죽어서 만날 테니 왜 그리 삶에 집착할까. 죄다 죽어서 그 잘난 루아스 곁으로 가면 될 텐데.

참으로 모순된 자들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피로 물든 위선자들을 루아스가 깨끗하다며 받아 줄지 말이야.”

깔깔깔.

비올라는 루아스교를 비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사령의 보주를 챙기고, 노사와 약속한 장소로 향해서.

* * *

에스티리아 왕국에 세워진 교구는 작은 성채 도시와 같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루아스교의 성직자, 성기사 그리고 견습 신자들뿐. 일반 시민은 주거가 허락되지 않아 인구수는 고작해야 세 자릿수를 조금 넘어설 정도다.

하나 그렇다 해도 이곳을 함락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신성 보호막이 상시적으로 교구 전체를 지키고 있으며 고도로 훈련된 성기사는 일반적인 기사보다도 실력이 뛰어났으니까.

게다가 루아스교는 세계 종교다.

설령 다른 국가와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교구에 해가 되는 일은 없다. 뇌에 상식이 박힌 인간이라면 세계 종교와 적대하겠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교구에 일어난 참사는 도저히 믿기가 어려웠다.

“교, 교구가…….”

글로스가 멍하니 거리를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기와 신실함이 가득했던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미소 띤 신자들 대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저마다 작은 피 웅덩이에 잠긴 그들에게서는 조금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 글로스가 무릎을 꿇더니, 엎어져 있는 시신 하나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견습 성직자, 벨.

약 13일 전 교구에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던 사내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글로스가 교구에 파견되고 난 후 몇 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침음에 잠긴 글로스가 사망자들의 안식을 기원했다.

“……루아스의 빛이 그대들에게 닿기를.”

그러곤 손을 뻗어 빛을 잃은 벨의 눈을 조용히 감겼다.

성기사들은 이를 악다문 채 글로스의 작은 기도를 다시금 가슴속으로 되뇌며 빌었다.

그러는 동안 베르덴과 칼리아 일행은 말없이 시신들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 모를 생존자가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주변에 숨이 붙어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거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루아스교의 신자들은 전부 과다 출혈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 외상이 일절 없었다. 전투는커녕 어떤 날붙이에 베여 옷이 찢어진 흔적조차도.

‘겉은 멀쩡한데 출혈이 심하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걸 보면 독에 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음?’

베르덴의 시선이 늙은 성직자의 시체에 멈춰 섰다.

그의 배에서 기이한, 하얀 무언가가 솟아올라 있었고 상처 주위가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몸속에서 외부로 관통한 흔적. 정황상 이게 직접적인 사인이 된 건 분명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자, 성직자의 뱃가죽을 뚫고 나온 건 다름 아닌 새하얀 뼈였다.

흑마법에는 시체, 즉 골격과 관련된 마법도 있다.

그러니 이것 또한 흑마법이 분명할 터.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몸속에 뼈를 심어 동시다발적으로 학살을 일으키는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설마 마도사인가?’

타당한 추측이었다.

아니면 베르덴이 잘 알지 못하는 5위계 이상의 흑마법 중에 이러한 종류의 마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든가.

뭐가 됐든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교구의 성직자들에게 몰래 흑마법을 심어 내부에서 터뜨렸다는 뜻이니.

그때, 글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 앞에 놓인 벨의 시신을 잠시 바라본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말하면 믿지 않았습니다.”

그 네비론 주교가 사악한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니. 무리한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정황 증거가 있긴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신의 필체는 누군가 위조했으며 주교들과 자신만이 아는 기밀도 모종의 이유로 새어 나간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교구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직자와 성기사단 등 주력 부대가 교구를 떠난 시점에서, 외부 침입의 흔적 없이 내부에서 시작된 학살. 이건 주교급 인사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교차점에는 네비론 주교가 있다.

흉수가 네비론 주교든 뭐든.

글로스는 과거의 기억들을 잠시 버려 둔 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스르릉.

검을 든 글로스가 전열에 나섰다.

목적지는 교구의 중심에 있는 성채 교회.

다름 아닌 사령의 보주가 정화되고 있는 장소다.

모두가 조용히 글로스를 뒤따르며 침묵의 교구를 거닐었다.

* * *

교구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시체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이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각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성채 교회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교회가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

여기는 지금까지와의 풍경과 달랐다.

광장 중심에 놓인, 정십자가 동상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지면은 크게 손상되어 금이 가 있었고, 건물 중 일부는 층 자체가 날아가 주저앉아 있었다. 분명한 전투의 흔적.

심지어 성채 교회의 문마저 거의 반파되어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과 같은 폐허.

구름이 햇빛을 가리자, 그림자가 드리운 교구의 정경은 그야말로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희망은 남아 있었다.

성채 교회의 정상.

그 위에 떠 있는 빛의 형상이 그림자를 걷어 냈다.

따스한 빛이 피부를 다독였다.

고개를 든 글로스와 성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저 존재는……!”

스턴 가디언(Stern Guardian).

상위 주교 이상의 존재만이 소환할 수 있는, 몰려드는 어둠을 가로막는 루아스의 하인. 강력한 전투력과 더불어 일정 범위 내에 치유의 기적을 상시적으로 일으키고, 저주와 죽음의 기운을 차츰 약화시키고 지우는 빛의 수호자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저 존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건 소환자가 살아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스턴 가디언이 일행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빛이 흩어지며 가디언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당장 모두가 성채 교회 안으로 향했다.

대리석 바닥을 지나 교회의 본당으로 들어서자 따스한 광채가 그들을 반겼다.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내리쬔 햇빛이 천장의 유리를 관통했다.

벽을 장식한 거대한 정십자가가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 빛이 바로 아래 있는 루아스의 조각상을 비추었다.

로브로 얼굴을 포함한 전신을 가린 석재 조형물.

남자인지 여자인지, 하다못해 어떻게 생겼는지 외모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고대에서부터 여신으로 여겨졌으며, 유일하게 로브 바깥으로 드러난 두 개의 가녀린 팔이 뒷받침하는 것이 근거였다.

찬란한 태양 아래에 서 있는 조각상.

유일하게 루아스교를 신앙하지 않은 베르덴을 제외하고,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경건함과 신실함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런 루아스 조각상 앞에 수십 명의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루아스교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가슴이 주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아 교구의 생존자들임이 분명했다.

그중에는 조각상에 기대어 햇빛을 맞고 있는 한 노인도 있었다.

스턴 가디언을 소환한 장본인.

노인을 본 글로스가 소리쳤다.

“로난데르크 주교!”

그 목소리에 그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글로스…… 예정보다 일찍 오셔서 기쁘구려.”

그것이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듯.

로난데르크의 주교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 * *

신성력을 품은 존재는 기본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성기사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쓰러져 있는 생존자들의 안위를 살피며 상태를 파악했고, 백결 기사들은 성기사들을 도와 구호에 힘썼다.

칼리아, 베스파, 베르덴.

그리고 로난데르크 주교, 글로스, 켈시아 위 여섯은 본당 안에 있는 작은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로난데르크 주교, 교구에서 대체 무슨 일어난 겁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냐라…… 의문에 답하기 전에 하나 묻겠네. 언데드 사태는 어떻게 되었소?”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칼리아가 나서서 지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비론 주교의 거짓 서신.

영묘의 함정.

그리고 교구에 찾아오기까지.

설명을 들은 로난데르크 주교가 신음했다.

“네비론 주교, 역시 그자가 이 사태의 원인으로 보이오.”

“그렇다는 건 교구에서의 일도…….”

“하지만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은 우리가 알던 네비론 주교가 아닌 게 분명하오.”

“네? 그게 무슨 뜻이죠?”

모두의 의문에 주교가 교구에서 일어났던 참사에 대해 말했다.

“왕국 남쪽에 병력을 파견한 뒤, 우리 4인의 주교는 사령의 보주를 정화할 방책을 모색 중이었소. 이미 우리들의 힘으로서는 무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 네비론 주교가 의견을 제시했소. 다크워튼의 흑마법사 워렌스의 지식을 이용해, 사령의 보주를 재해석해 보자고 말이오.”

흑마법사와 성직자의 합작이라.

뭔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해 보지 못한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안 그래도 워렌스의 건강 상태가 많이 회복되기도 했고 말이다.

어차피 실패해도 본전이니 한번 실험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주교 모두가 동의했다.

“네비론 주교가 낸 의견이니, 정화 과정은 네비론 주교에게 주도권을 일임했소.”

성채 교회의 비밀 장소.

먼저 그의 지시에 따라 사령의 보주를 둘러싼 뒤, 각자의 신성력으로 사기를 최대한 억눌렀다.

그러곤 네비론 주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기 위해 신경이 팔린 순간, 주교들은 일제히 마력을 느꼈다.

흑마법사 워렌스가 아니라 네비론 주교에게서.

“그러자 워렌스가 갑자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바이델르 주교의 등에 꽂아 넣더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교들이 당황했다.

네비론 주교에게서 느낀 마력이 아닌 바이델르 주교의 몸에 박힌 단검에 순간 신경이 쏠리고 말았다.

아차.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버렸다.

푸욱.

네비론 주교의 손에서 뻗어 나온 뼈바늘이 정확히 펠다른 주교의 미간을 관통했다. 아무리 고위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 주교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생각할 것도 없는 즉사였다.

───계획성공이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린 로난데르크 주교가 덜덜 떨었다.

“네비론 주교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소. 그걸 듣는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소. 저건 네비론 주교의 껍질을 뒤집어쓴 흑마법사라고.”

‘여성?’

베르덴의 뇌리에 기억이 하나 스쳤다.

워렌스가 말하길, 주검의 영광의 수뇌부에는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노인이 있다고 했다.

교구에 잠입해 주교의 껍질을 뒤집어쓰는 등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을 쓰는 걸 보아 그 수뇌부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숨을 삼킨 로난데르크 주교가 이내 말을 이었다.

“직후 전투가 벌어졌고 멀쩡한 나와 부상을 당한 바이델르 주교가 힘을 합쳐 대항했소. 하지만 여자는 강했으며 단순히 주교들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소. 혹시 바깥에 있는 신자들을 확인해 보셨소?”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위장 부근에서 솟아난 뼈가 장기를 관통한 걸 봤습니다.”

“그 흉수가 직접 말하더군. 자신의 뼛가루를 식사 시간마다 들키지 않게 조금씩 집어넣었다고. 그와 동시에 불길한 마력이 퍼져 나가면서 교구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소.”

장기에 붙어 있던 뼛가루가 뭉쳐 내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건 다름 아닌 주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복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신경을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흉수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뼈는 저주의 일종으로 취급되는 탓에 신성력으로 억누르거나 제거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은 로난데르크 주교는 바이델르 주교에게 시간 벌이를 부탁한 뒤 스턴 가디언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그자는 도망쳤소. 무리하게 움직인 바이델르 주교는 중상을 입어 쓰러졌고, 나는 언제 다시 그자가 습격해 올까 두려워 몇 날 며칠을 깨어 있었소. 하나 다행히도 먼저 나타난 건 글로스, 자네들이더군.”

허탈한 웃음을 지은 주교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안하오. 사령의 보주는커녕 교구의 모두를 지키지 못해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니, 내 잘못이오. 흉수를 잡았다면 적어도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막아 낼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없소.”

주교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령의 보주는 탈취당했고.

주검의 영광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으며.

교구와 왕국 남부가 입은 피해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놈들을 찾고 싶어도 단서조차 없다.

주검의 영광이 사령의 보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는 수밖에…….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워렌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워렌스는…….”

눈물을 훔친 로난데르크 주교가 문밖을 가리켰다.

“저 구석에 있소. 하지만 상태가 매우 심각하오. 내가 소환한 스턴 가디언의 능력으로도 회복시키는 게 불가능했을 정도로. 어떻게 손을 써도 우리로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베르덴이 밖으로 나서 웨렌스를 찾았다.

바닥에 누워서 멍하니 눈을 뜬 채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영혼마저 사라진 듯했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을 살폈다.

심장 부근이나 머리 쪽을 말이다.

‘……역시.’

이내 베르덴이 워렌스의 머리칼 사이로 새겨진 마력을 찾아냈다.

정신을 조작하는 흑마법진.

흉수의 마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단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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