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침묵의 교구 (2)
“에스티리아 왕국의 성기사단장 글로스 가르시아여, 남쪽으로 내려가 죽음에서 비롯한 사악을 빛으로 멸하라.”
“고귀한 광명으로.”
네비론 주교에게 경례를 한 글로스가 성기사단을 이끌고 남하했다.
왕국 역사상 유례없는 언데드 사태.
보고된 바로는 숫자는 최소 수천에 육박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언데드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사기에 오염되면 새로운 언데드의 탄생을 야기할 터.
손 놓고 좌시하다간 죽음이 만연해질 것이다.
루아스교의 교리와 신명에 따라, 빛을 부정하는 사악한 이형종을 멸하기 위해 성기사들은 기꺼이 검을 들었다.
콰자작! 콰자자자작!
신체와 정신이 신성력으로 강화된 그들은 악마와 언데드의 천적.
앞길을 막아선 수백의 언데드 무리는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빛에 의해 소멸했다. 어둠에 대항하는 성기사단의 진군은 세상을 비추는 태양 빛처럼 거침이 없었다.
도시 웰스리에서 재정비를 한 이들은 다시금 언데드 토벌을 위해 초원을 누볐다.
“글로스 단장, 저기 연기가 보입니다.”
성기사 겔시아의 시선을 따라갔다.
언덕 너머로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규모로 보아 꽤나 큰 화재다.
그리고 불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 경험상 언데드에 습격당한 마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시야에 보이지 않아 생존자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직접 찾아볼 수밖에.
초원을 질주해 큰 언덕을 올랐다.
언덕 아래로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과 그 사이에서 보호받고 있는 시민들이 보였다.
‘저건…….’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소문으로는 몇 번이나 들어 본, 백색 갑옷을 두른 기사들. 더욱 속도를 높인 성기사들이 곧 마을에 당도했다.
글로스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그런 그의 앞에 검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기사가 서 있었다.
글로스가 말 위에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영애.”
글로스가 자신의 갑옷에 새겨진 정십자가에 주먹을 갖다 대었다.
“에스티리아 왕국 성기사단장, 글로스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 * *
네비론 주교가 의심스럽다.
그럴진대 성기사단장마저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이 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루아스교의 성기사라며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니 여기서 진위를 파악한다.
주검의 영광의 손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말이다.
칼리아가 정중히 대화를 요청했다.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마을 회관에서 칼리아와 글로스가 대면했다.
각자의 뒤에는 베르덴과 베스파 그리고 부관인 겔시아가 자리를 잡았다.
글로스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우리는 갈 길이 바쁩니다. 그러니 되도록 용건을 간단히 해 줬으면 좋겠군요.”
오면서 많은 언데드를 토벌했지만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더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놈들을 끊어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도 무엇보다 글로스는 루아스교에 생을 바친 독실한 신자다.
상대가 드높은 위명을 지닌 후작가의 자식이든, 왕가의 혈통이든 하물며 황제든 간에 무엇보다 교회의 명을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의 눈에는 눈앞의 칼리아 일행이 아닌 어딘가 있을 언데드가 담겨 있었다. 막대한 부도, 찬란한 여인도, 막강한 권력도 글로스의 심지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녀가 글로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사령의 보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음? 그야 물론입니다. 에스퍼렌사 영애께서 주검의 영광에게서 확보한 것이니. 그런 영애의 노고와 희생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높게 사고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현재 사령의 보주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야 주교들께서 힙을 합쳐 차츰 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정보가 엇갈렸다.
“그런가요? 저는 사령의 보주를 정화하는 일에 진척이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글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체 반응으로 보아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의 안색을 잠시 살피던 칼리아가 네비론 주교가 보낸 서신을 건넸다.
“네비론 주교께서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죠.”
글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신을 받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펼쳐 문장을 읽어 내렸다. 글귀를 바라보던 글로스의 표정이 점차 복잡하게 변했다.
“이, 이건…….”
사령의 보주에 대한 정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주교급 신성력으로도 정화할 수 없는, 복잡하게 얽힌 죽음의 기운. 모종의 이유로 힘을 소모한 것인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인지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불길하고 거칠었다.
대체 흑마법사들은 이걸로 무슨 짓을 벌이려 했던 걸까.
뭐가 됐든 빛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건 자명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숨겼다.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아예 알려지지 않는 게 최선이니까. 설령 사령의 보주를 건넨 칼리아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사령의 보주에 대한 위치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네 명의 주교 그리고 성기사단장인 글로스 외에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기밀을 발설하다니?’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네비론 주교가 말이다.
그는 자상하고 정의로웠으나 악에 있어 원칙을 고수했으니, 글로스가 알기로 네비론 주교는 원칙을 벗어난 타협을 행한 적이 없었다.
“뭔가 잘못됐습니까?”
칼리아의 물음에 글로스가 답했다.
“이 서신의 글귀는…… 네비론 주교의 필체는 맞지만 이상합니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기밀을 누설할 분이 아니신데…….”
그렇다면 사령의 보주 정화에 실패한 건 진짜라는 뜻.
하지만 아직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사령의 보주의 근간. 그건 실존하는 겁니까?”
글로스가 서신을 마지막까지 읽었다.
이내 편지에서 눈을 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 * *
“근간을 없애라는 임무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겁니까?”
“임무는커녕 근간이라는 것도 생소합니다. 애초에 저를 비롯한 성기사들은 언데드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교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따로 차출된 성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이걸로 확정 났다.
네비론 주교는 배신자다.
대체 언제부터 놈들에게 가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칼리아를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란 건 분명했다.
그러자 글로스와 겔시아가 당황했다.
“에, 에스퍼렌사 영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주교께서 배신자라니?”
칼리아가 영묘에서의 일을 요약해 글로스에게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의문, 네비론 주교의 거짓 서신.
그에 대한 베르덴의 감상은 간단했다.
‘너무 허술하다.’
네비론 주교의 서신은 교구의 성기사에게만 보여 줘도 금방 탄로 날 것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교차 검증을 통해 즉시 드러났으니까.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속임수라고 하기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주검의 영광은 어째서 이런 같잖은 거짓을 꾸민 걸까.
……아니, 잠깐.
‘애초에 완벽하게 속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거짓 서신으로 인해 칼리아와 그녀의 기사단은 영묘에서 함정에 빠졌다.
허술하다 해도 제 역할을 한 셈이다. 만약 베르덴이라는 변수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살아남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곧장 매장을 면했다고 하더라도 2계층 최심부에서 아사했겠지.
‘서신의 용도가 칼리아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해가 된다.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
다음으로 두 번째 의문, 언데드 사태다.
현재 왕국 남쪽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언데드 군세.
귀족이나 모험가 등 너 나 할 것 없이 어떻게든 대처에 힘쓰고 있다. 교구에서 성기사단을 파견할 정도니 왕국의 시선이 여기에 몰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그 순간, 한 생각이 베르덴의 뇌리를 스쳤다.
“잠시 시선을 끄는 게 목적이다……?”
“……시선이라고?”
베르덴의 혼잣말에 모두의 눈동자가 한데 모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정적에 베르덴이 글로스에게 고개를 향했다.
“혹시 지금 교구에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저 말고도 다른 성기사와 성직자들은 각자 파티를 이루어 남쪽 전역에 파견되었습니다. 언데드의 피해가 너무 광범위하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교구의 방위가 가장 약화되었다는 뜻이군요.”
베르덴은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애셔, 그 말은 설마…….”
칼리아를 시작으로, 베르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지나친 결론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즉.
“주검의 영광의 목적은 사령의 보주의 회수입니다.”
칼리아를 함정에 빠뜨린 건 단순한 보복이다.
하나 언데드 군세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 탓에 왕국의 모든 신경이 남쪽으로 몰려 있었으니까. 아까도 말했듯 언데드를 토벌하기 위해 교구의 전력이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약화된 방어 체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마법사가 감히 교구를 습격할 수 있을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러지 못하겠지.
루아스교의 기적은 흑마법에 있어 치명적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주검의 영광은 상식 내에 있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진즉에 보주를 회수하려 했다면 교구로 이송하는 중에 탈취하는 게 나았던 것 아닌가?”
사령의 보주가 교구로 이송된 지 2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주를 회수하려 하다니.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면서까지 중요한 물건을, 루아스교의 교구로 가는 걸 방관했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단순히 사령의 보주에 대한 행방을 뒤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렇가면 이제 와 움직인 이유는 두 가지다.
사령의 보주를 쓰기 위해 모종의 준비를 갖출 시간이 필요했다거나.
사령의 보주를 회수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이 중에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나 뭐가 됐든 이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교구가 위험합니다.”
* * *
칼리아는 부상당한 기사 및 그들을 돌봐 주거나 피난민을 보호할 기사들을 내버려 둔 채 최정예만을 선별하여 교구로 향했다.
글로스도 베르덴의 생각에 설득되었는지, 심각함을 느끼고 언데드 토벌 전력을 제외한 인원을 선별했다.
직후 지휘관 자리를 다른 성기사에게 넘기고 교구로 가는 길에 합류했다.
며칠간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한 결과 5일이 채 지나지 않아 교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특수한 훈련을 거친 강인한 군마조차 숨을 헐떡이며 지면에 다리를 꿇었다.
“고생했다.”
푸르륵.
칼리아의 손길에 군마가 울음소리를 냈다.
이내 말에서 내린 모두가 교구의 성벽에 다가섰다.
글로스가 성문을 일부 살피더니 화색을 띠었다.
“……다행히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고 있는 신성력은 멀쩡합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강제적인 침입이 없었다는 뜻.
그러나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는 대체 어디에 있지?”
성문 앞에 도달했음에도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 고요하고 불길한 정적만이 흘렀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잠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베르덴이 하늘로 솟구쳤다.
신성 장막으로 온종일 보호되고 있는 교구 내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장막을 부수는 수밖에.
<어스 자벨린>
콰앙! 콰아앙!
관통력이 높은 마법으로 장막 한곳에 충격을 집중했다.
확실히 교구를 지키는 보호막답게 단단하긴 하지만, 마법서로 강화된 마법에 같은 곳을 적중당하고도 몇 번이나 버텨 내는 건 어렵다.
정확히 7번째.
대지의 창이 꽂힌 장막에 미세한 금이 새겨졌다.
‘지금이다.’
거대한 대지의 창.
그 후면에 압축된 바람을 터뜨렸다.
콰지지직!
맹렬하게 쏘아져 나간 마법이 결국 신성 장막을 관통했다. 보호막 일부가 무너지며 드디어 감춰져 있던 내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베르덴의 시야에 담긴 침묵의 교구.
그 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양의 피와 시체로 얼룩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