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침묵의 교구 (1)
에스티리아 왕국 남쪽에는 곡창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넓고 비옥한 토지인 만큼 다양한 식량 작물이 재배되고 있는 이 일대에는 언제나 자연의 생기가 넘쳐 흘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서 이쪽으로!”
은 등급 모험가 제리가 농민들을 피신시켰다.
건물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가 횃불을 마른 짚 위에 던지곤 사람들의 뒤를 쫓아 마을 회관에 도착했다. 그 앞에는 동료가 세운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돌아왔군, 제리!”
같은 은 등급 모험가 바게스가 제리를 반겼다.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느라 체력이 한계였던 제리가 숨을 헐떡였다.
바게스가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꿀꺽꿀꺽.
“하아, 이제야 살겠네.”
“누가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마시라고.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은 이걸로 다 대피시킨 건가?”
“아마도. 어디 숨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럴 거야.”
제리와 바게스가 대화를 나누며 주변을 바라봤다.
고블린조차 잘 나타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은 더 이상 없었다. 농민들의 삶이 묻어 있는 목조 건물들은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 불을 낸 건 제리 본인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언데드의 침입을 막으려면 말이다.
바게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데드 사태라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군.”
언데드 사태가 처음으로 보고된 지 벌써 4일째.
그 짧은 시간 동안 왕국 남쪽 일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속도는 느리지만 체력에 한계가 없는 무수한 언데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니 대처는 불가능. 피해 규모는 날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갔다.
도대체 놈들이 어디서 나타났을까.
아직 밝혀진 건 없었다.
애초에 자연적인지 인위적인지도 모른다.
하나 모험가가 해야 할 건 분명했다.
강한 힘을 가진 고위 모험가들은 언데드 토벌에 나서고, 약한 모험가들은 언데드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성벽이 높은 도시로 피난하도록 권고를 내리는 것이다.
제리와 바게스도 모험가 길드의 의뢰로, 마을 사람들을 피난시키러 이렇게 찾아왔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고립될 줄이야.”
“누가 아니래.”
마을 바깥으로 나가면 바로 언데드투성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사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하급 언데드 몇 정도야 은 등급 모험가인 그들로서도 충분히 토벌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숫자는 최소 100마리는 넘을 터. 게다가 언데드 기수와 같은 강한 언데드까지 있다.
기껏 타고 온 말은 언데드나 날아온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저 힘껏 달리는 것으로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마을 사람까지 데리고 간다면 말이다.
“하아…….”
“후우…….”
둘은 자신들의 처지에 한숨을 내쉬었다.
모험가가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니 무서웠다. 너무도.
그래도 비관하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있었으니까.
교구의 성기사들.
의뢰에 나서기 직전, 언데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 그들이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이 시각.
불타는 마을은 멀리서도 훤히 잘 보인다.
운이 좋다면 교구의 성기사들이 구원하러 올 것이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마을을 불태워 언데드의 침입을 막고, 어떻게든 재료를 긁어모아 바리케이드까지 세웠으니. 둘에게 믿을 구석은 성기사의 도움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오긴 올까?”
“…….”
모른다.
제리는 말없이 물을 들이켰다.
그러던 중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둘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같은 방향으로 틀었다.
화르르륵.
불타고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인간의 형체가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두른 언데드.
“리, 리치……?!”
불길을 아랑곳하지 않는 걸 보아, 스스로의 마법으로 화염 저항을 두른 모양. 리치가 바게스와 제리를 보더니 손을 길게 뻗었다.
노리는 것은 바리케이드.
이윽고 마력이 모이며 원소로 변환되었다.
<화염구>
“엎드려어어!”
제리와 바게스가 각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화염구가 폭발하며 바리케이드를 단숨에 부숴 버렸다.
그 충격에 날아간 파편이 회관의 벽을 일부 훼손했다. 산 자의 대한 증오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리치의 시선이 마을 사람들에게 닿았다.
“꺄, 꺄아아아악!”
“엄마! 엄마아아아!”
생생한 비명 소리다.
리치는 그에 화답하듯 다시금 마력을 일으켰다. 손끝에 불덩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젠장……!”
바게스가 재를 털고 무기를 빼 들었다.
하지만 제리는 일어나지 못했다. 날카로운 나무 파편이 그의 왼쪽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제리, 괜찮나?!”
“크윽…… 일어설 수가……!”
제리는 전투 불능.
리치를 상대할 사람은 바게스밖에 없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둘이 동시에 덤벼도 순살당할 정도로 리치의 강함은 너무도 현격했다.
바게스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살기 위해 피하면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할 것이고, 막아 내자니 죽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리치는 기다리지 않았다.
거의 완성 직전인 <화염구>.
눈을 부릅뜬 바게스가 다급하게 남은 바리케이드 잔해를 들어 방패로 삼았다. 당연히 화염구를 막아 낼 수는 없지만 그 외에 방법은 없다. 이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였다.
───콰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암석이 리치를 뭉개 버렸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는지 앞으로 내민 한쪽 팔뼈 이외에 나머지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어……?”
바게스가 눈을 깜빡였다.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제리조차 아픔을 잊고 리치의 사체를 바라봤다. 당황해하는 그들의 귓가에 여성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데드를 남김없이 토벌해라!
말을 탄 백색의 기사들이 마을을 둘러싼 언데드 무리를 급습했다.
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언데드들이 속수무책으로 썰려 나가며 토벌당했다. 죽음의 기병인 언데드 기수조차 창 한 번 뻗지 못하고 백색의 검에 두개골이 박살 났다.
바게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떴다.
“저, 저 사람들은…….”
“누, 누군지 알아?”
알다마다.
한 도시에서만 살아온 제리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여러 도시를 여행해 본 적이 있는 바게스는 갖은 소문에 능했다.
하얀 갑옷을 착용하고 왕국의 범죄자를 척결하는 존재들.
‘백강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
어째서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관계없는 이곳에 그들이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하나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아무래도 하늘이 우릴 버리진 않은 모양이야.”
콰아아앙!
그에 대답하듯 하늘에서 날아온 화염구가 언데드 무리에 떨어졌다.
* * *
결과적으로 마을은 궤멸했다.
언데드가 내뿜는 죽음의 기운으로 인해 밭은 검게 죽어 버렸고, 화재로 인해 마을의 절반가량이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죽어 버린 땅은 오랜 시간이 지나거나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회복될 것이며, 무너진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건 하나밖에 없는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수십 명의 마을 사람이 두 명의 모험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칼리아와 베르덴의 구원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전부 죽었겠지만, 구원받을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둘은 최선을 다한 셈이다.
마을 회관에서 나온 농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우리 마을이…….”
절망과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들.
그래도 대놓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말로만 듣던 언데드가 얼마나 위험한지 어렴풋이 깨달았으니까.
게다가 준귀족인 기사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자살 희망자가 아니고서야 불만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으으…….”
부상당한 제리는 멀쩡한 건물로 옮겨졌다.
영묘에서 시체 폭발에 화상을 입은 기사들과 함께 말이다.
“나, 살아남은 건가…….”
다시금 현실을 자각한 바게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긴장했더니 다리에서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게스가 고개를 들었다.
칼리아를 필두로 베르덴 그리고 기사단장 베스파가 서 있었다.
그걸 인지한 바게스가 곧장 확 허리를 굽히며 소리쳤다.
“은 등급 모험가 바게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님을 뵙습니다!”
“호, 나를 아는가?”
“물론입니다!”
상대는 후작가의 독녀.
그녀의 명성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았다.
그야말로 바게스와는 격이 다른 존재.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동료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다 해도 함부로 대할 귀족이 아니었다.
“칼리아라고 불러라. 그만 고개를 들도록.”
“넵, 칼리아 님!”
바게스가 냉큼 기립했다.
검붉은 눈동자가 그를 주시했다.
칼리아의 외모는 여느 귀족 영애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바게스는 그 미모를 보고 쉬이 감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묻겠다, 바게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는 걸 빠짐없이 말하도록.”
칼리아 본인이 가진 특유의 위압감.
덜덜 떨며 한 차례 침을 삼킨 바게스가 지난 며칠 사이 일어났던 모든 것에 대해 설명했다.
* * *
마을의 빈집.
바게스로부터 언데드 사태에 들은 칼리아의 표정은 심각했다.
“…….”
왕국 남쪽에서 발호한 언데드 군세.
두서없이 뻗어 나가는 놈들의 행진에 이미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이 괴멸되었고, 각 도시는 피난민들로 북적거리고 있다고 한다. 이미 사상자는 수백을 가뿐히 넘은 상황.
“분명 주검의 영광이 벌인 짓이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언데드를 다룰 수 있는 조직은 놈들밖에 없었으니까.
‘수천의 언데드라.’
베르덴도 칼리아 못지않게 심각했다.
언데드 군세를 왕국에 온 뒤로부터 쭉 준비해 왔던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흑마법으로 일으킨 현상인지 알 수 없었다. 전자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후자라면 굉장히 위험하다.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이라면 6위계 혹은 7위계에 근접할 테니까.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베르덴이 글러트니를 떠올렸다.
섭식을 통해 인간의 진화를 꾀하며, 구인류라고 칭한 현재의 인류를 멸절시키고 신인류를 탄생시키겠다는 집단.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지만 그래도 목적 하나는 분명했다.
‘그에 반해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흑마법사로 이루어진 집단이란 것도 알겠고, 예상 이상의 전력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당최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정보를 캐낼 것도 없이 무력화하면 죄다 자멸했으니까.
그렇기에 경각심은 더욱 컸다.
놈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이 불가능했으니까.
베스파가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놈들은 이만한 숫자의 언데드를 왕국에 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또한 의문이다. 눈엣가시인 나를 산 채로 매장하려 한 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어째서 이런 테러를 일으켰는지는 도저히 모르겠군.”
칼리아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하다못해 영묘에서 있었던 일과 어떻게든 엮어 보려 했지만 확 와닿는 게 없는데. 애셔, 너는 어떻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열쇠는 교구의 네비론 주교가 쥐고 있다.
교구에 가야 내막의 편린이라도 알아낼 수 있지만…… 그저 심증일 뿐,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루아스교와의 마찰을 감수하고 무작정 교구로 가서 네비론 주교를 찾아내는 게 계획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다행인 건 교구의 성기사단장이 직접 성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남하했다는 거다.”
네비론 주교의 편지에 쓰여 있길.
나머지 사령의 보주의 근간 두 곳을 교구에서 전담한다고 했다. 당연히 성기사단장 또한 나섰을 터.
그를 만난다면 정보의 진실, 즉 근거를 얻을 수있다.
그리고 만약 성기사단장이 그 정보를 부정한다면…… 네비론 주교는 명확히 주검의 영광에 가담했다는 뜻이 된다.
“솔직히 말해 내가 아는 네비론 주교는 그런 악한 인물이 아니었다. 약자에게 선하고 언제나 정의로웠지. 물론 그게 가면일 수도 있겠지만……. 후우, 어쨌든 확실한 건 성기사단장을 만나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칼리아가 베르덴과 베스파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러니 남쪽에 파견된 성기사단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가 있다면 교구에도 쉽게 진입할 수 있을 테니. 바게스가 말하길,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도시 웰스리에서 봤다고 했으니 잘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애셔는 하늘에서, 베스파는 지상에서 수색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예, 칼리아 님.”
결정을 내린 그들이 바깥으로 나섰다.
그때, 백결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칼리아 님, 동쪽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흙먼지?”
칼리아 일행이 기사가 말한 장소에 시선을 던졌다.
동이 트기 시작하며 내리쬐는 햇빛.
언덕 너머로 흙먼지가 올라오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백색 갑옷, 그 중심에 박힌 금색의 정십자가.
교구의 성기사단.
그들이 정확히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다.
칼리아가 피식 웃었다.
“마침 직접 찾아와 주다니. 이거 참 운이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