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망자의 행진 (4)
영묘의 지하 1계층은 여러 부분으로 분류되어 있다.
대량의 시신이 안치된 1계층-1의 일자형 복도를 지나면 1계층-2로 나아가는 통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통로의 바닥에는 양옆으로 계단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비스름한 경사면이 있었다. 쉽게 관을 옮기기 위한 구조였다.
그리고 벽면에 난 틈새에는 석재로 된 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좁은 통로.
칼리아의 1분대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척후를 맡은 기사가 슬쩍 벽 너머를 확인하더니 검을 들었다.
적이 있다는 뜻.
이어 수신호를 보냈다.
흑마법사 두 명.
스켈레톤 계열 언데드 여덟.
물론 생포는 없다.
주검의 영광에 속한 흑마법사는 의식을 잃거나 임의로 자멸이 가능하니까. 그건 베르덴의 증언과 베스파가 놈들의 은신처를 토벌하면서 미리 확인한 바였다.
이곳에 있는 흑마법사는 다를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불확실한 확률에 기대어 손대중을 할 여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임무의 목적은 사령의 보주의 근간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니.
터벅.
선두는 베르덴이 맡았다.
통로로 몸을 드러냄과 동시에 마력을 일으켰다.
흑마법사들이 마력의 기색을 느끼고 곧장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마법은 시전되었다.
더블 캐스팅.
<락 페이탈>
콰직! 콰직!
“끄어어…….”
“끅!”
음속을 넘어선 석편에 폐가 관통당했다.
숨을 껄떡인 두 흑마법사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사역하던 언데드가 녹슨 무기들을 휘두르며 다가왔고, 전면에 방패를 세운 기사가 돌진했다.
콰앙!
타격에 약한 스켈레톤들이 그대로 박살 나 흩어졌다.
직후, 기사 뒤에 붙어 있던 척후와 칼리아가 거의 동시에 흑마법사의 목을 베었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벌써 이렇게 적을 마주하고 처리하기를 다섯 번째. 그 과정에서 1분대의 어느 누구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임무의 진행 상황은 너무도 순조로웠다.
‘그래도 불편하긴 하군.’
물론 칼리아의 방식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만큼 무작정 돌파했다가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니. 변수에 맞서 조용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란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베르덴 혼자였다면 이미 2계층에 도착했을 것이다.
어떤 위험이든 함정이든 압도할 수 있는 실력과 자신감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파티의 마법사 중 한 명으로서 움직이면 여러모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지만…….’
경계를 서고 있는 흑마법사와 언데드.
그 숫자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세 개의 통로 중 하나만 해도 이 정도니, 전체를 다 합치면 규모는 놈들의 은거지라고 해도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하나 그렇기에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종합했을 때, 주검의 영광은 결코 평범한 집단이 아니었으니까. 주교들조차 정화하지 못하는 사령의 보주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럴진대 보주의 근간이 있는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틀에 맞춘 듯 예상 범위 내였다.
즉.
‘너무 평범하다.’
오히려 이상함이 느껴질 정도로.
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 낸 칼리아.
그녀가 베르덴의 얼굴을 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애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어쩌면 2계층에 놈들의 주 병력이 포진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1계층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니,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아직 일렀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눈치 보지 말고 바로 말하도록. 내버려 뒀다간 자칫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질지도 모르니.”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1분대를 바라봤다.
“이제 곧 2계층에 진입할 예정이다. 격전이 예상되니 긴장을 풀지 말도록.”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수색을 계속하지.”
* * *
2계층의 풍경은 1계층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통로가 더욱 넓어졌으며 보관되어 있는 관의 숫자가 많은 정도.
그런데 묘하게 고요했다.
비교적 작은 1계층보다도 흑마법사나 언데드의 숫자가 많아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평범한 스켈레톤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내 기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르덴이 주변을 살폈다.
룬의 반지로 강화된 감각으로도, 마법사로서도 마법적인 함정이 있다든지 언데드가 숨어 있다든지 하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저었다.
하나 당연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조용하다는 건 전보다 더 교묘하고 위험한 함정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칼리아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대신 더욱 사주경계에 힘썼다.
기이한 정적은 중심부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
아직 다른 분대는 도착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없었다.
묘지에 사용되는, 석재로 조각된 루아스교의 장식물들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2분대와 3분대를 기다렸다.
물론 경계는 세운 채로.
칼리아는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당장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탐색을 전부 마친 게 아니니까. 섣부른 판단은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릴 뿐이다.
그때,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척이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왼쪽 통로에서 베스파가 있는 2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마찬가지다, 베스파.”
이후 오른쪽 통로에서 3분대가 나타났다.
전부 전투의 흔적은 있었으나 눈에 띄는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간략하게 보고를 받으니 별 특이 사항도 없었고.
전력은 온전하다.
꽤나 지하 깊이 내려오긴 했지만 고작 이 정도로 지칠 기사들이 아니었다. 칼리아의 지휘 아래 마법사 또한 필수적으로 체력 훈련을 하기도 했으니.
‘이제 남은 건 2계층의 가장 깊은 방인가.’
오로지 중심부에서만 갈 수 있는 방.
영묘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최심부다.
어딘가 숨겨져 있는 곳이 없다면.
사령의 보주의 근간은 최심부에 보관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칼리아가 베르덴과 백결 기사단을 이끌고 마지막 통로로 향했다. 여전히 기분 나쁜 고요함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m가량 높이의 철문이 나타났다. 손댄 흔적은 없이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있군.”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숨길 생각이 없는지 호흡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숫자는 하나.
백색의 기운을 끌어모은 칼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문 가운데의 틈새를 가로지른 칼날이 잠금장치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 단면은 거칠기는커녕 아주 매끄러웠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영묘의 최심부.
그 중심에는 흑마법사 하나가 서 있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가 칼리아를 바라보곤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오호호홋. 손님들이 오셨군요.”
* * *
‘……손님?’
칼리아는 사령의 보주를 없애기 위해 영묘를 급습한 상황. 그런데 흑마법사는 당황하기는커녕 어서 오라며 환영하기까지 했다.
저게 허세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베르덴이 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지휘관은 어디까지나 칼리아였으니까.
‘게다가 사령의 보주의 근간으로 보이는 것도 없다.’
여기에 있는 건 오로지 저 괴악한 웃음소리를 내는 흑마법사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대상은 저 흑마법사뿐. 섣불리 무력화했다가 자폭한다면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칼리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는지, 주위를 살펴보던 그녀가 흑마법사에게 물었다.
“사령의 보주의 근간은 어디에 있지?”
“오호홋. 그러시겠죠. 그게 궁금하시겠죠. 다짜고짜 검과 마법을 들이미는 것보다는 그게 상황에 적절한 질문이겠죠.”
흑마법사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칼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놈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죽일 듯이 쳐다보지 마시죠. 안 그래도 말해 드리려던 참이니까요.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문제?”
“그럼요. 아주 중요한 문제죠. 안타깝게도 저는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쿤엘 님처럼 사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이 형질은 타고나지 못했답니다.”
그러니까, 즉.
“곧 죽을 당신들에게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럼으로 결렬.
그 순간 영묘의 바닥이 일렁이더니 다수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떠한 기척도, 마력 반응도 없이 말이다. 기사들이 당황하고 있자 흑마법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오호호홋! 저리 다급한 꼴이란! 흑마법의 본질도 모르니 그런 꼴을 당하는…….”
“애셔!”
칼리아의 신호에 베르덴이 마력을 방출했다.
<뇌천>
한 줄기 전격이 흑마법사의 다리로 향했다. 일단은 제압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바닥에서 불쑥 솟아난, 푸른빛의 좀비가 마법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본래라면 꿰뚫었어야 정상이나 언데드는 마법에 직격당했음에도 비교적 멀쩡했다.
뒤이어 붉은 화염에 휩싸이거나, 몸체가 단단하거나, 서늘한 냉기를 뿜어 대는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좀비들이 튀어나왔다.
“엘레멘탈 가스트(Elemental Ghast). 제각기 원소 면역을 가진 언데드죠. 아무리 원소 마법사가 화력이 좋다 한들 이들을 몰살할 수는 없을걸요? 오호홋.”
“네놈…….”
“그토록 원하시는 사령의 보주의 근간은 언데드가 되어서 찾으시는 게 좋겠군요. 그럼 안녕히.”
흑마법사가 언데드가 나왔던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아무래도 어딘가의 통로로 이어져 있는 모양. 당장 쫓으려 했지만 좀비의 숫자가 너무 많다.
하나하나 베었다간 흑마법사를 놓칠 게 분명할 터.
‘어떻게 하면…….”
칼리아가 고민하고 있자 베르덴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뭐?”
베르덴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마력.
이내 스태프를 휘둘러 마력을 비틀었다. 물론 영묘가 무너지지 않도록 위력은 조절했다.
<볼텍스>
작은 중력의 소용돌이가 앞선 언데드 무리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아무리 원소에 면역이 있다 한들 물리력에도 완전 내성이 있는 건 아닐 테니.
그렇게 길을 만든 베르덴이 비행을 쓰고는 단숨에 구덩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광경에 칼리아가 검을 강하게 쥐었다.
“무모해……! 베스파, 너는 대형을 지켜 언데드를 상대해라! 나는 애셔를 따라가겠다!”
“위험합니다, 칼리아 님!”
베스파가 만류했지만 칼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앞의 좀비들을 베어 넘긴 그녀가 뒤이어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 * *
“오호호호홋!”
흑마법사가 비행을 쓴 채, 스켈레톤들이 잔뜩 서성거리는 어두운 통로 안을 날아갔다.
‘노사께서 계획하신 대로 됐어!’
예상보다 저들의 도착 시간이 빠르긴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저들은 언데드 무리에 파묻힐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통로를 빠져나가 바깥으로 도달한 순간이 계획의 마지막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마법사…… 애셔라고 했었나?’
칼리아를 도와 조합을 엉망으로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던 마법사. 그자까지 이곳에 온다고는 듣지 못했지만…….
‘변수는 없겠지.’
전격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다고는 들었지만 어차피 원소 마법이었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무려 세 자릿수가 넘는 엘레멘탈 가스트에게 덮쳐져 씹어 먹힐 운명인 것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흑마법사가 고개를 돌리자.
콰앙! 콰아앙!
잿빛 머리의 마법사가 스태프로 스켈레톤을 박살 내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뭣?!”
흑마법사가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베르덴의 속도는 그 이상.
어느새 흑마법사의 뒤를 잡은 베르덴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어억!”
등을 강타당한 흑마법사가 지면에 부딪혔다.
비행의 속도 탓에 한참을 바닥에 굴렀다. 밑에 있는 작은 돌조각들로 인해 몸 곳곳이 찢어지고 부러져 피가 흘러내렸다.
“끄으윽…… 이, 이게 대체 뭔…….”
흑마법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능숙한 기동으로 방향을 역으로 뒤바꾼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흑마법에게 겨냥했다.
트리플 캐스팅.
<다중 빙결 화살>
15발의 냉기 화살이 흑마법사를 덮쳤다.
곧장 마력방벽을 펼쳤으나, 베르덴에게 있어서는 두부보다 못한 방어력이었다.
“……!”
여지없이 방벽이 깨지며 마력회로가 과부화됐고, 뒤이은 화살이 흑마법사의 사지를 꿰뚫었다. 혹한의 반지로 강화된 냉기가 팔과 다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중심을 잃은 흑마법사가 기우뚱하다 바닥에 쓰러졌다.
즉각 다가온 베르덴이 오큘러스로 놈의 목을 짓눌렀다.
서서히 틀어막히는 숨통.
흑마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끄윽…… 끅……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근간은 어디에 있지?”
힘을 실었다.
흑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고통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역시 놈은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말하면 죽기라도 하는 것인지 삶을 갈망하는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비웃음이 느껴졌다.
‘대체 뭐지?’
뭔가 놓친 게 있다.
교구에서 온 정보.
사령의 보주의 근간.
교회에서 빌린 신성 장비.
그리고 영묘를 지키고 있는 흑마법사와 언데드의 숫자.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흑마법사의 태도.
마지막으로 사령의 보주를 이루는 근간의 부재.
온갖 정보가 복잡하게 얽혔다.
대체 숨겨져 있는 게 무엇인가.
베르덴이 흑마법사를 제압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칼리아가 스켈레톤을 베어 넘기며 통로에서 나타났다.
“애셔, 무사했군!”
그와 동시에 흑마법사의 시선이 칼리아에게 향했다. 본능적인 움직임.
그걸 본 순간 베르덴은 직감했다.
<분쇄>
흑마법사의 목에 침투한 대지의 파편.
곧 폭발하며 놈의 머리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칼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뭐 하는…….”
“칼리아 님.”
베르덴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이건 함정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가득한 스켈레톤의 사체에서 미증유의 마력이 부풀었다. 영묘의 최심부에서 엘레멘탈 가스트들이 나타났을 때와 같이 갑작스럽게.
어떻게 전조도 없이 흑마법을 구현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 마법이 뭔지는 알고 있다.
즉시 기동한 베르덴이 칼리아를 감싼 순간.
<대규모 시체 폭발>
콰아아아아앙!
저주가 담긴 폭발이 통로 전체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