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54화 (154/366)
  • 154화 망자의 행진 (1)

    칼리아의 백결 기사단이 인파 속에 숨어 페르네의 주점을 호위했다.

    주점 안에는 칼리아와 베르덴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페르네가 따뜻한 커피를 가져와 차례대로 대령했다.

    “잘 마시지. 그나저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페르네.”

    “죄송합니다, 칼리아 님. 미리 찾아뵀어야…….”

    “괜찮다. 내가 한 의뢰를 통해 애셔를 보낸 것만으로도 인사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칼리아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했다.

    하나 당연하게도 페르네는 편하지 않았다.

    작위를 수여받지 않았을지라도 칼리아는 이미 스스로의 입지를 다진 귀족. 썩어 빠지고 무능한 왕국 귀족의 자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레이에서 오래 활동한 페르네라고 해도 긴장해야 할 상대였다.

    “감사합니다, 칼리아 님.”

    페르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의뢰길래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아, 그건…….”

    칼리아가 페르네에게 시선을 보냈다.

    민감한 사안이니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는 뜻이었다.

    페르네가 냉큼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주점에 둘만 남게 되자 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네비론 주교를 통해 사령의 보주를 교구로 운송한 이후, 나는 조합의 운영자와 주검의 영광을 추적하는 데 주력했다. 근신이 끝나고 난 뒤에는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움직이기도 했지.”

    “성과는 있었습니까?”

    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베켄이 잡히고 난 이후 다른 조합의 운영자 두 명은 곧장 종적을 감췄다. 그에 더해서 주검의 영광은커녕 흑마법사 하나조차 찾지 못했지. 결국 성과는 없었다.”

    가문의 힘을 빌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놈들의 뒤에 있는 3왕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위세가 대단하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가의 피를 이은 자와 대놓고 칼을 맞대긴 어려웠다.

    1왕자나 2왕자가 도와준다면 가능은 하겠지.

    하지만 왕자들은 서로를 왕위의 경쟁자라고 여기면서도 왕가의 절대적인 권위를 중시하는 자들이다.

    본인들의 손에 피를 묻힐지언정, 정적을 없애기 위해 감히 귀족들이 왕가에 이빨을 들이대는 걸 좌시할 리가 없었다.

    “페르네와 네가 준 명분으로 조합과 몇몇 귀족을 크게 압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위에 있는 3왕자, 공작, 후작급의 존재들은 건들지도 못했지. 저마다 가차 없이 꼬리를 잘라, 우리 후작가가 개입할 명분을 없애 버리니까.”

    칼리아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쓴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정치란 필수적인 요소지. 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 정치가 치부와 탐욕을 숨기는 데 사용되니…… 왕국의 정치에 환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더군. 차라리 홀로 군대를 상대하는 게 나을 정도야.”

    뭐, 어쨌든.

    “그런 짜증 나는 나날들을 보내던 중 교구에서 연락이 왔다. 그에 대해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어 보고 싶나?”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그게 더 궁금하니까.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쁜 소식이다. 교구에서 사령의 보주를 정화하는 데 실패했다.”

    * * *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주교가 직접 나섰는데도 말입니까?”

    “교구에 모인 4명의 주교가 직접 정화를 시도했지만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는군. 네비론 주교가 직접 편지를 보낸 것이니 사실임이 분명하겠지.”

    네비론 주교의 편지에 적혀 있길.

    사령의 보주는 단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외적인 무언가를 근간으로 삼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대주교 이상의 신성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단번에 완전 정화가 가능할 터지만, 주교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대주교 정도 되는 존재를 왕국으로 불러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니 수개월은 걸리겠지. 그렇다고 해외로 보내자니, 주검의 영광이 급습할 위험이 크고. 그렇기에 신성력으로 억지로 정화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 교구의 판단이다.”

    신성력으로는 무리라는 건…….

    “그 말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게 바로 좋은 소식이지. 다행히 그 근간들을 찾아낼 수단을 확보했다고 하더군.”

    네비론 주교가 편지와 함께 보낸 목걸이.

    언데드나 흑마법과 같은 사기(死氣)에 반응하는 물건인데, 사령의 보주에 오염된 신성력을 활용하여, 특정 사기에 반응하도록 개량했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반응이 강해지는 구조였다.

    “근간으로 특정된 것은 총 세 개. 그중 하나는 내가 맡고, 나머지 두 곳은 교구의 성기사단이 처리하기로 결정됐다. 이미 베스파에게 목걸이를 전달해, 근간이 위치한 장소를 특정하고 있지.”

    올빼미와 같은 외부인을 쓸 수는 없었다.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는 그야말로 극비였으니까.

    “세 곳이라. 성기사의 숫자는 충분한 겁니까?”

    “당연히 부족하지.”

    루아스교는 세계 종교다.

    그 영향력은 동대륙, 서대륙, 중앙 대륙 할 것 없이 강력하다.

    왕권을 중요시하는 에스티리아 왕가로서 달가울 리가 없었다.

    여러모로 내정에 간섭할지도 몰랐으니까. 왕족이나 귀족이나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다.

    그 결과물이 루아스교에 대한 헌금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국가와 달리 교구가 수도 멀리에 지어지기도 했고, 헌금이 적은 만큼 루아스교가 할애하는 성직자나 성기사의 숫자 또한 최소화되었다.

    “이것 또한 정치적인 이유지. 그래도 각 교회에서 신성 장비를 빌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니 불만은 없다. 솔직히 말해 신성력만 제외한다면, 내 기사단으로도 성기사의 빈자리는 채우고도 남을 테니.”

    그리고.

    “애셔, 너도 있지 않나?”

    왕국의 금지에서 사령의 보주를 회수한 마법사.

    그 강함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칼리아는 그를 단신으로 미스릴 등급에 준하는 실력자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자들을 구할 바에 이 잿빛 머리의 마법사 하나를 고용하는 게 훨씬 더 나을 터.

    “보수는 기본 4억 엘크. 그리고 활약에 따라 추가금으로 최대 4억 엘크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

    “상당한 액수군요.”

    “주검의 영광이 가진 저력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럴진대, 너와 같은 마법사를 고용하는 데 가성비를 따지는 건 멍청한 판단이지. 그래서 대답은?”

    의뢰를 수락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언제쯤 출발할 예정입니까?”

    “6일 뒤에 도시 카베른에서 베스파 일행과 합류할 생각이다. 그러니 늦어도 이틀 내로는 출발하는 게 좋겠지. 달리 바쁜 일이라도 있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겔톤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잠시 장비를 맡겨야 합니다.”

    “장비?”

    그러자 칼리아가 베르덴의 옷을 바라봤다.

    “확실히 전에 본 적 없는 옷이로군. 장비가 손상이라도 된 건가?”

    “그게 아니라 너무 더러워져서 말입니다.”

    “갑옷이나 무기가 더러워지는 건 항상 있는 일이지. 그런데 대체 얼마나 더럽길래?”

    말하는 것보단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장비들을 꺼냈다. 이형종의 체액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엉망인 상태에 칼리아가 재빠르게 상체를 뒤로 당겼다.

    그녀가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애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지?”

    뭐, 이것저것?

    * * *

    카베른으로 출발하기 전날, 베르덴은 겔톤을 찾아갔다.

    베르덴이 아세른을 떠나 있는 동안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술에 찌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으니.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겔톤의 상태는 베르덴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후욱! 후욱!”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을 달리고 있는 겔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체력 단련에 집중하고 있는 충실한 모험가가 되어 있었다.

    연무장을 한 바퀴 돌던 겔톤이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아, 애셔 님!”

    겔톤이 곧장 다가왔다.

    그 활기 넘치는 모습에 베르덴이 물었다.

    “술은 이제 안 드시는 겁니까?”

    “그게…… 숙취를 몇 번 겪었더니 도저히 술이 넘어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겔톤이 멋쩍게 웃었다.

    주점에도 가지 않게 된 그는 며칠 동안 멍하니 방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술도 끊었겠다, 당장 마법 이론을 공부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러다 마법이라도 연습할까 해서 연무장으로 나왔습니다. 근데 머리가 멍하니 마법 연산이 잘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대충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린 모험가들이 들어왔습니다.”

    등급이 가장 낮은 백결 등급 모험가들.

    고블린도 사냥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새파랗게 어린 그들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기초 체력은 모험가의 기본 중 기본이었으니까.

    겔톤은 멍하니 모험가들의 훈련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들을 따라 가볍게 뜀걸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찌뿌둥한 몸을 푸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몸을 격하게 움직이다 보니 상당히 힘이 들었다. 호흡을 조절하는 것조차 벅찰 정도였으니.

    마법사의 체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겔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를 혹사하면 상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때부터 그냥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근육통이 심하긴 했지만 오히려 마법 생각도 안 나고 잠도 잘 오더군요.”

    몸이 건강해지자 정신도 다시 건강해졌다. 처음의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아직도 베르덴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지긴 했지만…… 전과 달리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여력은 있었다.

    베르덴이 생각했다.

    ‘설마 운동으로 우울증을 극복할 줄이야.’

    마탑 출신 마법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저 술에 기대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베르덴이 간략히 답했다.

    급한 의뢰가 생기는 바람에 이론 강의를 더 미뤄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겔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지금은…….”

    한차례 망설인 겔톤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준비가 되면 애셔 님께 직접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겔톤은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에 봤을 때와는 현격하게 달라졌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

    겔톤이 스스로 틀을 부수는 데 말이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겔톤의 말을 존중했다.

    * * *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 그리고 베르덴이 왕국 남쪽으로 남하했다.

    목적지는 도시 카베른.

    잘 훈련된 군마를 이용한 터라 이동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합류하기로 한 당일 새벽에 도착하여, 성벽 근처에서 야영을 한 뒤 아침에 돼서야 카베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작은데 성벽은 상당하군.’

    거기다 도시 곳곳에 작은 요새들이 세워져 있었다.

    성벽 바깥에 논밭이 있는 걸 보아, 전시 상황에 다수의 농민과 곡식들을 지키기 위한 요충지인 모양이었다.

    “이쪽이다.”

    베르덴이 칼리아와 기사단을 따라 외곽으로 향했다.

    인적이 없는 골목길.

    낡은 건물에 들어가자 한 나무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칼리아가 문을 정확히 네 번 두들겼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아 님.”

    베스파와 그 수색대들이 칼리아를 맞이했다.

    “다행히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나 보군.”

    “말씀하신 대로 위치만 파악한 뒤 바로 후퇴했습니다.”

    “잘했다.”

    주검의 영광에 소속된 흑마법사는 위험하다.

    아무리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섣불리 정보를 캐내려다가 발각되어 죽거나 부상을 입는다면 크나큰 손실이었다. 기습의 기회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할 바에 차라리 일찌감치 물러서는 게 나은 판단이었다.

    칼리아가 낡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놈들은 어디에 숨어 있지?”

    베스파가 지도를 가져와 책상 위에 펼쳤다.

    카베른의 주변 지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베스파가 지도 오른쪽 구석에 있는 무덤 그림을 가리켰다.

    “이곳, 에스티리아 왕국 국립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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