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48화 (148/366)

148화 빈테르트 (3)

빈테르트와의 문제.

베르덴이 떠올린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빈테르트와 담판을 지어 문제를 끝맺는 것.

물론 저쪽에게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면 불가능한 방법이나, 이렇게 간부 격 인물들이 직접 찾아왔다.

아마 거래를 제시하거나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겠지. 그런 베르덴의 예상은 보란 듯이 적중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대화가 틀어진다면.’

그렇게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남은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빈테르트를 궤멸시킨다.’

아예 뒤탈이 없을 정도로.

일개 개인이 왕국의 어둠을 지배하는 세력을 무너뜨린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해결책이었으나 베르덴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현재 그가 가진 전력은 아직 본인조차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암흑가의 왕이니 뭐니 해도 결국 로아프라 내에서의 이야기다.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 지하에 틀어박혀 왕 놀이나 하는 놈들 따위에게 위축될 베르덴이 아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긋이 베르덴을 쳐다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유는요?”

“말해야 하나?”

“궁금해서요. 저 노예 둘이 당신 둘에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대체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길래 감히 빈테르트와 적대하려 드는지 말이죠.”

이득이라.

로베르테의 말 속에서 베르덴은 하나를 눈치챘다.

‘빈테르트는 에이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에 특이 형질을 타고난 인간은 극소수.

기존의 마법 체계에서 벗어난, 기형적인 마력과 마력회로를 가진 그들의 가치는 가늠할 수 없다.

존재만으로 마법사의 탐구심을 자극할뿐더러 잘만 키운다면 경우에 따라 타인과 궤를 달리하는 특별한 마법사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특히나 마탑이라면 막대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데려가려고 하겠지.’

물론 코스타 따위가 어쭙잖게 접근했다간 곧장 척살당할 것이다. 그래서 굳이 베르덴에게 소유권을 주며 끌어들이려고 한 것일 테고.

만약 이 사실을 빈테르트가 알고 있었다면 손익에 대해 묻지 않았을 것이다.

빈테르트 정도의 체급을 가지고 있다면 마탑과 암암리에 거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하지만 베르덴이 남매를 도와준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특이 형질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절망을 깨달았던 과거를 떠올리고 에이든이 내민 손을 맞잡았을 뿐이다. 마탑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로베르트의 물음에 베르덴이 침묵으로 답했다.

대화는 결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리 해결책을 전해 들었던 갈리아크가 드레이큰을 노려봤다.

어느새 기운을 끌어모은 둘은 각자의 무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툭 건들기만 해도 서로의 목을 노리고 무기를 휘두를 것이다.

누가 먼저 팽팽해진 긴장감을 끊어 버릴지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좋아요. 특별히 코스타의 재산은 양보해 드리도록 하죠.”

갑자기 로베르트가 수긍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베르덴과 갈리아크가 내심 당황했다.

베르덴은 로베르트의 시선과 마주했다.

일말의 변화조차 없는 표정. 그녀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생각 전환이 빠르군.”

“코스타가 남긴 유산은 코스타의 죽음보다도 가치가 높죠. 죽은 자에게서 더 이상 창출할 수 있는 이득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재산권 하나를 두고 당신 둘을 상대하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 같네요.”

로베르트가 재차 물었다.

“그럼 재산권을 제외한다면 첫 번째 대가는 수락하실 건가요?”

뭔가 꺼림칙하다.

하나 그렇다고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코스타의 장부들을 꺼냈다.

이건 코스타의 재산이 아닌 사업권과 관련이 깊었으니까. 그녀가 요구한 대가를 수락한다는 의미였다.

“고마워요.”

로베르트가 장부를 챙겼다.

“두 번째 대가는 뭐지?”

“간단한 거예요. 달리 뭔가를 지불하라는 건 아니니.”

로베르트가 단호히 말했다.

“애셔, 갈리아크. 위 두 명은 로아프라에서 퇴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영원히.”

이후로 다시는 로아프라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다시 말해 입국 금지와도 같았다.

내년에 열릴 경매를 생각한다면 모를까.

이미 올해의 경매에 참가한 데다가 로아프라에 정착할 계획이 전혀 없는 둘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요구였다.

애초에 내년까지 왕국에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뭐야, 별것도 아니군.”

갈리아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당신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저희가 제시한 대가를 수락했으니, 코스타에 대한 문제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퇴거 기한은 오늘까지. 이후로 다시는 로아프라에서 보는 일은 없길 바랄게요.”

그 말을 남기고 빈테르트의 두 수장이 자리를 떴다.

로아프라의 지배 세력과의 담판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 * *

빈테르트가 떠난 자리.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갈리아크가 와락 표정을 찡그렸다.

“저 새끼들 뭔가 수상한데.”

“일부러 우리를 놓아주려는 것처럼 보이더군.”

빈테르트가 제시한 대가가 너무 가볍다. 심지어 코스타의 재산을 양보하기까지 했다.

물론 코스타의 영역과 사업권을 주긴 했지만 베르덴에게 있어서는 애물단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차피 버릴 거라 굳이 대가로 요구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로베르트는 손익의 문제라며 그럴듯하게 이유를 포장했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게 못 되었다.

‘대체 목적이 뭐지?’

이건 일종의 호의라고 해도 무방했다.

베르덴은 빈테르트와 로아프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기억에서 끄집어낸 뒤, 나름대로 결부해 보았으나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설마 코스타처럼 회유하려 드는 것도 아닐 테고.

생각에 잠겨 있자 갈리아크가 탁상 위에 다리를 올렸다.

“뭘 생각해. 저 새끼들이 그냥 보내 준다는데 그럼 가야지, 뭐. 아님 쳐들어가서 목숨 줄 잡고 이유라도 물어볼 거야?”

“그건 아니지.”

빈테르트가 적대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빈테르트에 쳐들어가야 한다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지금은 넘어갈 수밖에 없나.’

이렇다 할 정보가 없으니 더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베르덴이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는데, 에이든과 샤를로트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샘웰이 말했다.

“그게…… 애셔 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한 모양입니다.”

빈테르트와 대립하면서까지 남매를 버리지 않았다.

외부인인 샘웰조차 울컥할 정도인데 당사자인 에이든과 샤를로트는 어떻겠는가.

물론 베르덴으로선 전혀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일단 앉아라, 할 얘기가 있으니.”

세 명이 당장 소파에 착석했다.

그러자 베르덴이 바닥에 마법진을 새겼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되자 방 전체가 마력으로 밀폐되었다. 이걸로 바깥에서는 내부의 기척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아니, 이 새끼, 마법진은 또 언제 배웠어?”

“기본이지.”

“그게 기본이면 고드는 머저리냐? 진짜 미친놈이네, 이거.”

갈리아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할 말이 뭐야? 빌어먹을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까지 새긴 거면 중요한 거 같은데.”

“처우에 대한 거다. 하지만 그 전에 에이든에 대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지.”

“훌쩍, 어…… 저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진 특이 형질은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특이 형질을 가진 마법사는 마탑에서 주목한다.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니까. 더군다나 한계 위계마저 높다면 마탑주의 직속 제자가 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하나 그런 밝은 미래만이 있는 게 아니다.

자칫하면 베르덴과 비슷한 과거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마탑은 총 10개.

그중에 비공식 실험을 하는 마탑이 보헤미른 마탑 하나만 있을 리는 없다. 어쩌면 모든 마탑이 각자의 이면에서 마법의 광기를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한 에이든의 내력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다행히 그걸 아는 사람은 본인을 포함한 여기 다섯 사람뿐. 코스타 일당이 전멸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갈리아크, 샘웰, 샤를로트. 너희도 마찬가지다.”

“난 또 뭐라고. 내 입이 네 몸뚱이보다 무거우니까 걱정은 마라.”

“저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말할 사람도 없지만요.”

끄덕끄덕.

모두가 수긍했다.

그럼 다음이다.

“잠시 실례하지.”

“으……!”

베르덴이 샤를로트의 목에 손을 갖다 대었다.

섬세한 촉각이 그 내부를 살폈다. 날카롭게 손상된 성대가 오래 방치된 채 굳어 있긴 하나…….

“고칠 수 있겠군.”

그 말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인가요?!”

“포션으로는 무리지만 교회라면 가능할 거다. 시간과 헌금이 좀 필요하긴 할 테지만.”

어떤 대가가 필요하든 에이든은 상관없었다.

눈앞에서 사라졌던 누나의 목소리가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다.

“우으…….”

베르덴이 손을 떼곤 남매를 바라봤다.

“가족은 있나?”

“아, 아뇨. 누나가 전부예요.”

끄덕.

“돌아갈 곳은?”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고아일 수도 있고, 노예 사냥으로 인해 터전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본래 둘이 살던 마을로 보내 줄 생각이었다. 코스타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치료도 하고.

그런데 돌아갈 곳이 없다니.

당연히 대충 아무 마을이나 도시에 버려 두고 갈 순 없는데…… 고민해 봤지만 확실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베르덴이 샘웰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럼 먼저 묻지. 샘웰,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저, 저 말씀입니까?”

“너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샘웰은 대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 지금과 같이 로아프라를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안내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코스타의 살해 등 위험한 일에 휘말려 버렸으니까.

만약 코스타와 친분이 깊은 자가 있다면 아무런 힘도 없는 샘웰은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코스타의 재산을 나눠 줄 테니 돈은 충분할 거다. 그리고 정착하고 싶은 도시나 마을까지 직접 호위도 해 주지. 물론 가고 싶지 않다면 존중하겠다만.”

샘웰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도 생각이 복잡한 모양이다. 주먹을 꽉 쥔 채 신음했다. 곧 결정을 내렸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라인즈로 가도 되겠습니까?”

“라인즈?”

“그게…… 사실 번듯한 가게 하나 갖는 게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러려고 돈도 모으고 있었는데, 이왕이면 제일 살기 좋은 도시에서 여는 게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샘웰은 여전히 바깥이 두려웠다.

하나 눈앞의 마법사가 지켜 준다면 얘기가 다르다. 어릴 적에 들은 이형종과 아인종 따윈 감히 이빨도 들이밀지 못할 테니까.

안심하고 도시를 이동할 수 있다.

“라인즈에서 가게를 연다라. 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들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마침 목돈이 생겨서…….”

샘웰이 갈리아크를 슬쩍 쳐다봤다.

“이 자식, 100만 엘크로 뻐기다가 막판에 룰렛 한 판 돌리더니 대박이 터졌어. 그 자리에서 8천만 엘크를 땄으니.”

“아무래도 로아프라를 떠나라는 계시였나 봅니다, 하하. 그러니까 그래서 말인데…….”

샘웰이 남매에게 고개를 향했다.

“혹시 나랑 같이 갈 생각은 없니?”

“네?”

“……!”

남매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샘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 이상한 뜻은 아니고, 나도 혼자 외딴 도시로 가는 건 외롭고 너희들도 갈 곳이 없으니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샘웰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로아프라 태생이라기엔 너무도 순수한 인물이었다. 겁이 많은 성격이기에 온갖 더러움을 피해 다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베르덴이 생각했다.

‘확실히 나쁘진 않군.’

생활 여건이 매우 좋다.

다른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규모도 커서 샤를로트의 목을 치료하기도 적합하니.

갈 곳 없는 남매가 살아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갈리아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입이 한 명에서 세 명으로 늘면 감당할 수 있겠냐? 그러다 가게 망하면 어쩌려고?”

“그, 그건…….”

“에이든과 샤를로트에게도 코스타의 재산을 나눠 줄 생각이다. 자립하기 전까지의 생활비로는 충분하겠지.”

베르덴의 말에 남매가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베르덴과 갈리아크를 흘긋흘긋 보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샘웰과 마주했다.

“……정말로 따라가도 될까요?”

“그, 그럼, 물론이지!”

샘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리아크가 베르덴을 보며 히죽거렸다.

“올, 이 새끼, 꽤 하는데. 아주 성인이 납셨군.”

“…….”

베르덴은 무시로 답했다.

이렇게 세 명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로아프라를 떠날…….

“잠깐,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냐?”

“내가 왜?

“나도 너 때문에 휘말렸잖아. 그럼 책임은 져야 하는 거 아니냐?”

책임이라.

“내가 원인인 건 인정하지. 그런데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도끼로 코스타의 영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해결책으로 빈테르트를 궤멸시키자고 하니 좋다고 웃은 건 누구였지? 이걸 휘말렸다고 말해야 하나?”

“……이 X새끼,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리고 네가 따라와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페일과 다르게 왕국의 정보상은 나한테 귀속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너에게 줄 의뢰도, 팔 정보도 없────”

“그래, 알았다, 알았어! 어차피 나도 의뢰가 기다리고 있는 몸이라고. 그냥 뭔가 X같아서 말한 거니까 이제 그만!”

싸가지 없는 새끼.

그렇게 툴툴댄 갈리아크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먼저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뭐, 어쨌든 이걸로 더 이상 로아프라에 볼일은 없다.

이제 진정으로 왕국의 암흑가를 떠날 시간이었다.

* * *

로아프라의 회색 왕성.

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알현실엔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방금 로아프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가일의 음성이 알현실에 감돌았다.

빈 왕좌로 이어지는 회색 카펫. 그 양옆에는 로베르트, 드레이큰 그리고 암살 계열의 수장인 슬레이가 도열해 있었다.

여러 수장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이들이었다.

“빈테르트에 해를 끼친 자들을 너무 쉽게 보낸 것 아닌가?”

슬레이.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익숙하지 않는 이들에겐 듣기조차 거북한 목소리였다.

로베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이유는 당신도 잘 알 텐데요. 애셔는 ‘특별한 마법사’임이 분명하니.”

“그럼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놈이 가져간 노예들은 돌려받았어야지.”

“폐하께서 허락하신 제 재량에 따른 결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의 참견을 받을 이유가 있나요?”

“너의 독단이 빈테르트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니 당연하지.”

슬레이가 백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드레이큰에게 향했다.

“그리고 너희 간부가 경매장에서 애셔란 자에게 물품들을 빼앗겼더군.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사로잡은 뒤에 물건을 빼앗고 구속하는 게 너에게 있어 더 나은 판단이 아니었나?”

“내게 결정권은 없다.”

“결정권이 없다라…… 그게 단가?”

“그렇다면?”

슬레이가 눈가를 씰룩였다.

“충성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군. 너희 둘은 항상 그랬다. 네년은 빈테르트에마저 손익을 따지고, 네놈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지.”

색을 잃은 손가락이 드레이큰을 가리켰다.

“특히 드레이큰 네놈은 시키는 일만 하고 스스로 나설 생각 따위는 하지 않지. 뭐,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 네놈은 세상이 무서워 어둠 속에 틀어박힌 ‘타락한 모험가’니까 말이야.”

조롱 섞인 이명에 드레이큰의 이마에 핏대가 불거졌다.

“죽고 싶다는 말을 돌려 하는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둘이 살기를 드러내며 대립했다.

그러던 순간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가일을 포함한 네 사람이 그 즉시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명의 호위를 대동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하게 정리된, 빛 하나 반사되지 않는 어두운 금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가에는 탁한 금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마주한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회색의 왕관이 올려져 있았다.

로아프라의 정점.

빈테르트의 지배자.

암흑가의 왕, 그론드 베일 디 발리다스.

과거, 빈테트르의 수장을 직접 끌어내린 찬탈자이며.

직접 만든 왕위에 오르고 스스로의 이름을 에스티리아 왕가의 것으로 개명한,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 찬 존재.

그의 발걸음 한 번에 알현실이 울렸다.

계단을 오른 그가 빈 왕좌에 몸을 뉘고는 턱을 괴었다. 그론드가 양팔에 착용하고 있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건틀릿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일어서라.”

그론드의 한마디에 모두가 일제히 일어섰다.

왕의 시선이 슬레이에게 향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나 보군.”

“죄송합니다.”

쿵!

슬레이가 힘껏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론드가 고개를 돌렸다.

“로베르트 그리고 드레이큰, 그 애셔란 마법사는 어땠지?”

“일반적인 마법사와 다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로베르트가 애셔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말했다. 그게 상당히 흥미로웠는지 그론드가 흥미를 보였다.

“하, 감히 나의 빈테르트와 적대하려 하다니. 확실히 다르긴 하군.”

“하나 특이 형질인 건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드레이큰의 첨언을 그론드가 일축했다.

“아니, 놈은 특이 형질이 맞을 거다.”

그론드가 손을 까딱이자, 그와 같이 있던 호위들이 종이 뭉치를 각자에게 전달했다.

내용을 읽어 보니 공국의 신문이었는데, 그 안에는 애셔란 이름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이건…….”

“4위계로 그만한 업적이다. 아무리 고위 속성에 적성이 있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남들과 다른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론드가 웃었다.

탐욕에 찌든 사악한 미소였다.

“오랜만에 나타난 특이 형질을 가진 마법사다. ‘에스티리아 왕가’가 마법사의 신변을 우리에게 의뢰를 할 때까지 풀어 주어, 놈 스스로 몸값을 더욱 올리는 걸 기다리는 게 옳다.”

그래야 아주 비싼 값에 팔아 치울 수 있을 테니.

“그때가 되면 슬레이, 너에게 권한을 일임하겠다. 그러니 더 이상 불만을 거론하지 말도록.”

“뜻을 받들겠습니다.”

슬레이가 다시금 머리를 부딪쳤다.

고개를 앞으로 향한 그론드.

왕의 눈동자는 알현실의 창을 넘어, 지상으로 향하는 마력 승강기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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