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39화 (139/366)

139화 예상치 못한 재회

예상치 못한 재회였다.

왜 도살자 갈리아크가 로아프라에 있는 걸까. 어쩌면 베르덴과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백금 등급 모험가 정도면 암흑가 경매장에 관심을 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갈리아크는 모험가면서 그레이에서 의뢰를 받아 활동하기도 하니.’

애초에 베르덴에게 페일을 소개해 준 것도 도살자였다. 낭비벽이 심한 게 아니라면 최소 수억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갈리아크가 성큼 다가왔다.

“이야, 갑자기 아는 얼굴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갈리아크가 흘끗 샘웰을 바라봤다.

섬뜩한 시선에 샘웰이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딸꾹질을 했다.

“안내인인가? 보아하니 방금 전에 로아프라에 온 거 같은데, 너도 경매장에 참가하러 온 거냐?”

“너도 마찬가지인가 보군.”

“그 싸가지 없는 말투는 여전하구만. 그나저나 네 소식은 들었다. 공국에서나 왕국에서나 한창 날뛰고 있다던데……. 흠, 확실히 전과 달라지기는 했군.”

갈리아크는 통곡의 기사를 토벌한 이후에 여기저기 쏘다니며 많은 전투를 벌였다.

도중에 강대한 이형종을 만나 치명상을 입기도 했으나 결국 승리한 건 갈리아크의 파티였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전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새로운 기예를 익히기도 했고.

그런데.

‘……이 새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갈리아크는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속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앞에 있는 잿빛 마법사는 통곡의 기사를 상대로 격전을 벌였던 그놈이 아니었다. 뭘 잘못 처먹기라도 했는지 수준이 가늠되지 않았다.

‘소울 트리니, 후작가니 뭐니 소문은 들었는데.’

하기야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무리 여타 3위계 마법사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한들 결국 3위계다. 그 정도로는 위 소문에 해당하는 사건들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건 4위계……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만 5위계일 가능성도 있다.

‘근데 그게 말이 되나?’

고작 1년도 안 지났는데.

그것도 다름 아닌 마법사가 이 정도의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건 갈리아크의 기준에서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갈리아크가 물었다, 아주 직설적으로.

“너 지금 몇 위계냐?”

베르덴이 미친놈 쳐다보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에게 위계를 묻는 건 실례인 걸 모르나?”

“그건 그렇지. 안 알려 줄 거면 됐다.”

갈리아크가 흉악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암흑가의 시선이 한데 모여 있었다. 방금 전에 날려 버린 사기꾼은 잔해 더미에 묻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충 힘 조절을 했기에 죽진 않았겠지만.

“……흥이 깨졌군. 야, 애셔. 밥은 먹었냐?”

“그건 왜 묻지?”

“왜 묻긴. 밥 처먹으려고 묻지. 네가 밥 사라.”

베르덴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긴 했지만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심지어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갑자기 밥을 사 달라는 요구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갈리아크가 핏대를 세우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이…… 내가 너한테 페일 소개해 준 거 기억 안 나? 내가 X발, 네가 그레이에서 얼마를 벌었는지 대충 아는데. 그런데도 밥 한 번 안 사겠다고? 양심은 있냐?”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베르덴은 갈리아크에게 빚진 게 있었다.

만약 페일을 소개받지 않았더라면 여러모로 번거로웠을 것이다. 성장도 더뎠을 것이고. 거창하게 은혜라고 할 건 아니었지만 도움을 받은 건 분명했다.

소개비로 밥 한 끼 사 주는 건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오히려 값싼 대가였다.

‘어차피 곧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생각을 마친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인정은 하네. 그럼 따라와라. 괜찮은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지.”

갈리아크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카지노를 지키는 경비들이 무기를 든 채 길목을 막고 있었다. 도살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죄송하지만 손님, 수리비는 지불하고 가셔야 합니다.”

경비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코등이가 없는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나름대로 자세가 잡혀 있는 걸 보아 대인전에 익숙해 보였다.

갈리아크가 기절한 사기꾼을 가리켰다.

“그딴 건 저 사기꾼한테 받아. 애새끼들 손 하나 관리 못 하는 새끼들이 뭐가 당당하다고. 뒈지기 싫으면 닥치고 비켜.”

“손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나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접으며 팔을 휘둘렀다.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였다. 쾅! 속절없이 광대에 주먹이 꽂힌 책임자가 벽을 부수고 카지노 안쪽으로 사라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아 그대로 기절한 게 분명했다.

갈리아크가 남은 경비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안 꺼져?”

“시, 실례했습니다.”

경비들이 길을 텄다.

바닥에 침을 뱉은 갈리아크가 발걸음을 옮겼고 베르덴이 그 뒤를 따랐다. 안내인 샘웰은 어쩌다 보니 그 둘 사이에 끼어서 식사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그들 일행이 떠나자 곧 소란이 가라앉았다.

익숙한 듯 구경꾼들이 흩어지고 카지노 경비들이 수습에 나섰다. 먼저 기절한 사기꾼을 끌고 카지노 안으로 들였다.

경비 책임자를 단숨에 날려 버린 갈리아크를 대신해 수리비를 받아 낼 셈이었다.

힘이 곧 규칙이다.

이곳은 로아프라였다.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구경꾼 중 하나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애셔…… 애셔라면 설마…….”

그 이름을 되뇐 구경꾼이 서둘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은은한 어둠이 만연한 레스토랑에서 갈리아크, 베르덴 그리고 샘웰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왜 여깄지?’

분명 고객을 안내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샘웰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둘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야금야금 맛 좋은 음식을 썰어 먹었다.

벌컥벌컥.

갈리아크가 머리통만 한 나무 잔에 위스키 한 통을 때려 붓고는 단번에 들이켰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그가 스테이크를 반쯤 잘라 통째로 입에 넣고 씹어 넘겼다. 그렇게 요리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야 좀 간에 기별이 가는군.”

“…….”

베르덴은 아직 식기조차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식사 예절을 보니 입맛이 별로 없었다. 와인으로 간단히 목을 축인 그가 갈리아크의 목 부근을 바라봤다.

모험가 플레이트는 없고 웬 큰 흉터만이 남아 있었다.

“모험가는 그만둔 건가?”

“응? 아, 이거. 그만둔 건 아니고 징계 좀 먹었다. 일 년간 모험가 자격을 박탈당했지.”

백금 등급의 실력자가 그 정도의 징계를 받는 건 흔치 않다.

그리고 도살자는 준귀족인 기사를 흠씬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도 구두 경고만 받은 일화가 있었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박탈당했다니.

“귀족이라도 건드렸나 보군.”

“그건 아니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비슷하지. 근데 처맞은 건 나지만.”

“……뭐?”

“핏빛검 레이라라고 잘 알고 있을 거다. 듣자 하니 너하고 소울 트리란 이형종을 토벌했다고 하던데.”

갈리아크가 술을 더 주문하고는 말을 이었다.

“작년 겨울 중순쯤에 모험가 길드에서 우연히 핏빛검하고 마주쳤지. 미스릴 등급으로 승급한다고, 해외에 있는 모험가 길드 본부로 향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말했지. 나랑 한판 붙자고.”

갈리아크는 강자다.

그의 가장 큰 욕망은 힘 그 자체이며, 그 근간은 열성적인 투쟁심이다. 강자를 짓밟고 위로 올라서고자 하는 걸 즐기는 존재다.

그런 갈리아크이기에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백금 등급 모험가인 그와 미스릴 등급 모험가의 간극이 얼마나 되는지 말이다.

“그런데 뭐라고 했는지 아냐? 시간 낭비라며 거절하더군.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물러설 수가 있나. 곧장 도끼 들고 핏빛검한테 달려들었지.”

“길드 내부에서?”

“바깥보다 안이 더 낫지. 주위에 모험가밖에 없으니 칼부림하기 딱인데. 뭐, 그랬더니 핏빛검이란 이명과 어울리는 붉은 검으로 대응하더군.”

갈리아크가 목덜미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당신의 전투를 떠올렸다.

핏빛검 레이라와 도살자 갈리아크는 체구가 달랐다. 적어도 근력 하나만큼은 갈리아크가 확실히 우위였다.

그러나 그녀는 갈리아크의 도끼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검으로 흘려 냈다.

흘려 나간 도끼의 날이 모험가 길드의 바닥과 벽 그리고 탁상을 부숴 버렸다. 마치 물을 베는 듯한 감각이었다.

기대 이상의 검술과 검속에 갈리아크가 히죽 웃으며 주저 없이 기예를 사용했다.

파쇄破碎.

수직으로 내리찍은 도끼가 레이라의 정수리를 노렸다.

거대한 암석마저 단번에 쪼개 버릴 듯한 기세와 예리함이 담긴 일격이었다.

그러자 레이라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핏빛의 기운을 드러냈다.

레이라의 검끝에서 붉은 실이 흩날리더니, 미세한 바람과 함께 어느새 그녀가 갈리아크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갈리아크의 동체 시력으로도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목표물을 잃은 도끼가 바닥에 처박혔다. 큰 진동과 함께 길드의 바닥 전체가 두 동강이 났으며 천장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붉은 실이 갈리아크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혈사血絲.

촤아아아악!

백금의 플레이트가 잘려 나가며 혈흔이 흩뿌려졌다. 충격에 한쪽 무릎을 꿇은 갈리아크가 곧장 손으로 쥐어짜듯 상처를 막아 지혈했다.

갈리아크는 백금 등급 모험가 중에서도 실력만 따지면 상위에 속했다.

상대는 차기…… 아니, 미스릴 등급 이상의 강자. 지금의 충돌로 세간의 위명에 걸맞는 실력자임이 분명해졌다.

다만 갈리아크는 아직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즐거운 듯 웃은 그가 투쟁심을 불태우며 도끼를 쥐고 일어섰다.

“그렇게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 모험가 길드장이 나서서 전투를 중단시켰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징계를 받았다. X발, 제대로 싸워 보긴커녕 한 대 때리지도 못하고 일 년간 모험가 자격 박탈이라니.”

자업자득이긴 하나 갈리아크만 맞고 끝나 버렸다.

더군다나 레이라의 핏빛 기운에는 살기가 가득해 어지간한 신성력으로는 상처가 회복될지언정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다.

상당히 아쉬웠던 건지 갈리아크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모험가 습격에, 길드 기물 파손까지. 완전히 미친놈이군. 모험가 자격을 아예 박탈당하지 않은 게 신기한데.”

“닥쳐. 그래서 내 파티는 잠시 해산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빡빡하게 사냥을 해 가지고 네리엔과 고드에게 불만이 좀 있었거든. 이참에 휴가를 보내 버렸지. 그리고 무직이 된 나는 그레이에 의뢰를 받으러 갔는데…… 문제가 생겼더군.”

“문제?”

베르덴의 물음에 갈리아크가 눈을 희번득 떴다.

“어떤 새끼가 라비슈른 후작가하고 어깨동무하고 가드란인지 뭔지 하는 후작가를 멸문시켰거든. 그 탓에 공국이 발칵 뒤집혔고 그레이도 난장판이 됐지, 의뢰도 싹 사라졌고. 거기다 그 와중에 페일 그놈은 이참에 영역 좀 넓히겠다고 잠적하기까지.”

“…….”

“대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베르덴이 말없이 와인을 머금었다.

한바탕 불만을 쏟아 낸 갈리아크가 혀를 차며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뭐,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넘어왔다. 여긴 일거리가 넘치니까. 그런데 여기서도 네 이름이 들려오대? 어디 후작 자식 끌어들여서 조합하고 한바탕 했다며? 3왕자가 조합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냐?”

“…….”

“이 새끼, 알고도 저질렀구만. 왕가하고도 대립하는 놈이 누구보고 미친놈이라는 건지…….”

물론 이유가 있었지만 결과만 보면 사실이었다.

베르덴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곤 대충 흘려 넘겼다.

그때였다.

콰앙!

레스토랑 문이 거칠게 열렸다. 통일된 무장을 갖춘 자들이 대거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장악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손님과 직원들이 패닉에 빠졌다.

그들의 시선들이 베르덴이 있는 테이블에 향했다.

갈리아크가 이를 드러냈다.

“하, 카지논지 그 사기꾼인지 모르겠는데, 보복이라도 하러 온 모양인가? 식사 도중에 간단한 몸풀기로는 딱이겠어.”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갈리아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울어진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가볍게 목 근육을 당긴 갈리아크가 손을 이리저리 풀었다.

딱히 도끼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맨주먹으로 상대할 모양인 것 같았다.

‘알아서 하겠지.’

어디까지나 갈리아크의 일이다.

베르덴은 식기를 들고 스테이크를 잘랐다. 옆에 있던 샘웰은 식탁 아래로 몸을 낮추고 상황을 지켜봤다. 침착한 상황 판단은 겁 많은 안내인의 덕목이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걸어 나오더니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 애셔라는 자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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