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암흑가 로아프라 (1)
라인즈에서 출발한 지 고작 반나절 만에 아세른에 도착했다.
익숙한 성문과 거리를 지나 페르네의 주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령 블루와 함께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페르네가 보였다.
인기척을 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 어서 오세요, 애셔 님! 칼리아 님과의 일은 잘 끝내셨나요?”
“그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게 표정이 좋아 보이는 걸 보면 어떠한 수확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
베르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아뇨, 그게…… 뭔가 달라진 것 같으셔서요.”
베르덴의 마력 조작 능력은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것이 5위계에 도달하면서 더욱 깊어졌고.
그를 토대로 마력을 갈무리하고 있는 베르덴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마법사라고 눈치채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페르네가 괴리감을 느낀 걸지도 몰랐다.
단순히 익숙함의 차이였다.
그에 비해 블루는 베르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베르덴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덜덜덜.
블루가 미약하게 떨었다. 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푸른 마력의 심연으로 인해 공포에 질린 것이다.
아마 익숙해지려면 한동안 시간이 걸리겠지.
그런 정령과 페르네의 반응을 본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분 탓이겠지.”
“그런가요?”
“그보다 내가 말했던 건 다 준비된 건가?”
베르덴이 화제를 돌렸다.
입 아프게 5위계에 올랐다고 페르네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따위 자랑질보단 경매장이 우선이었다.
페르네가 당당하게 답했다.
“말씀하셨던 현금은 전부 지하실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어요. 바로 확인시켜 드릴까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페르네를 따라 주점 지하로 향했다.
중심에 놓인 기다란 책상.
그 옆에는 커다란 포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틈새로 보니 전부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금괴, 다마스 강철, 미스릴 주괴들은 시세대로 받았고, 의뢰 보수를 포함해 전부 현금화했어요.”
여기에는 바르톨의 도움이 컸다.
대부업자로 활동하는 만큼 현금 마련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르톨에게 2억 2천만 엘크의 현금을 빌렸는데, 기한 넉넉히 주고 이자도 적게 책정할 테니까 무조건 갚아 달라고, 애셔 님께 전해 달래요.”
“빚지고 도망갈 생각은 없다고 전해. 그나저나 올빼미한테서 온 건 없었나?”
“그건 이틀 전에 왔어요. 여기 정산서요.”
흑랑 토렐드의 마법 물품들.
올빼미에게 처리를 맡긴 것들도 전부 정산이 끝나 현금으로 옮겨졌다.
베르덴이 정산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도중에 빼먹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세했으며 충분히 납득할 만한 금액이었다.
베르덴이 질문을 이었다.
“경매장 초청권은?”
페르네가 왼쪽 아래에 깔려 있는 포대를 가리켰다.
“5일 전에 정확히 2억 8,390만 엘크에 팔았어요. 역대 최고가인 3억 엘크를 갱신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비싸게 받은 편이죠. 마침 암흑가에서 정보를 하나 풀었거든요.”
“정보라면…….”
“이번에 아티팩트 하나가 출품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애셔 님께선 이미 알고 계신 사실이겠지만요.”
그렇긴 하다.
그래서 아티팩트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이 많아지든 뭘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다.
[마녀의 가시왕관]
애초에 쓸 수 없는 아티팩트를 구매할 생각도, 그럴 만한 예산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초청권을 비싸게 팔았으니 오히려 좋은 건가.’
다만 정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력무효화의 팔찌는 어떻게 됐지?”
베르덴도 쓸 수 있는 물건이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의 가치였다.
마법진의 마력조차 흩어 버릴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유용했으나, 마법진의 파훼는 베르덴에게 일도 아니었으니.
지금같이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파는 게 이득이었다.
“가격대가 있어서 구매자를 찾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팔렸어요. 모험가 길드를 거쳐서 판매한 터라 구매자가 모험가라는 것 외에는 모르지만…….”
페르네가 가장 큰 포대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불명의 모험가가 보낸 막대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엄청 필요했던 모양인지, 협상할 필요도 없이 시세보다도 높게 받았어요.”
“그거 잘됐군.”
“그렇죠?”
결과적으로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자금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애셔 님이 목표로 하는 금액에 미치진 못해요. 그래서 의뢰를 찾아봤는데 억대가 넘는 의뢰는 전혀…….”
“당장 의뢰는 필요 없다. 자금 문제는 이미 해결됐으니까.”
“네?”
베르덴이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를 건넸다.
정교하게 세공된 에스퍼렌사의 표식. 눈동자에 붉은빛이 반사되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기겁하며 고개를 멀찍이 뒤로 보냈다.
“이, 이, 이건……!”
“그걸로 다이나 은행에서 25억 엘크를 현금으로 대출했다. 비행정까지 동원했으니 늦어도 3일 안에는 아세른으로 옮겨질 예정이라더군.”
꿀꺽.
페르네가 침을 삼켰다.
대체 어떤 의뢰를 했길래 그 칼리아의 신용을 받아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위험한 의뢰였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하나 그녀가 경악한 건 베르덴이 말한 액수였다.
‘아무리 그래도 25억이라니…….’
과거 그녀가 허덕이던 빚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누가 들으면 기절할 정도의 금액이다.
그만한 빚을 졌음에도 베르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갚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히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 합치면…….’
약 51억 엘크.
부유한 상인도, 유서 깊은 귀족 가문도 아닌 개인에게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액수였다.
페르네는 후보로 생각해 놨던 의뢰들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제 암흑가 경매장에 참가하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말해야 할 게 있었다.
“애셔 님, 혹시 빈테르트라는 조직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 * *
빈테르트.
칼리아에게 들은 이름이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집단 말인가?”
“맞아요. 후작가가 섣불리 칼을 들이밀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강력한 세력이죠.”
마약, 살인, 매춘, 밀매, 경비, 불법 노예, 투자, 도박 등 각종 중범죄를 주 수입원으로 삼는 암흑가 로아프라의 지배 세력 빈테르트.
특히 경비나 암살 계통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파티가 아닌 단신으로 미스릴 등급까지 도달했던 전직 모험가 출신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 말에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방주의 후보인 핏빛검 레이라가 차기 미스릴 등급으로 여겨졌는데…… 그와 버금가거나 더 강하다는 뜻인가?
“미스릴 등급 정도의 실력자가 암흑가 따위에 있다니. 믿기 힘든데.”
“그게 다른 나라의 암흑가와 로아프라의 차이죠. 동대륙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니까요. 그리고 모든 계통의 정점이자, ‘암흑가의 왕’이라 불리는 빈테르트의 수장은 그 이상의 괴물이라고 하고요.”
에스티리아 왕가는 양지를 지배하고.
빈테르트는 왕국의 음지를 지배한다.
그야말로 조합과는 결이 다른 세력이다.
귀족처럼 명분이든 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 1왕자의 절대적인 지지 세력이기까지 하니.
그들을 적대한다는 건 하나의 왕가를 상대한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페르네가 나지막이 말했다.
“물론 애셔 님이 알아서 잘하실 테지만…… 로아프라는 엄청 넓은 데다가 그만큼 범죄자들이 많아요. 자칫하면 사건에 휘말리기 십상이죠.”
그러니까.
“전문 안내인을 고용하시는 게 좋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페르네가 돌려 말하긴 했으나 그 뜻을 알아차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빈테르트와 대립하지 말라는 거겠지.’
안내인을 앞세워 가능한 마찰 없이 다녀오라는 뜻이리라.
확실히 미스릴 등급에 준하는 실력자가 다수 존재한다면, 적대했다간 상당히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다만 페르네는 모르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베르덴의 강함은 그저 편린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굳이 적을 만들 생각은 없다.’
물론 저쪽에서 먼저 적의를 드러내거나 사사건건 앞길을 막아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베르덴은 그런 속내를 감추며 답했다.
“안내인이라. 확실히 길을 안내해 줄 사람이 있으면 편하긴 하겠군.”
그러자 페르네가 화색을 띠었다.
“아! 그럼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볼게요!”
“부탁하지.”
용건을 마친 그는 곧바로 주점을 나섰다.
페르네가 베르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확실히 애셔 님과 빈테르트가 서로 마찰을 빚을 만한 일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뭔가 크게 엮일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게 자의로든 타의로든…… 마치 마일드륀에서 조합의 흑마법사와 적대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에이, 설마…….”
페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불안감을 애써 떨쳐 내었다.
* * *
다이나 은행에서 현금이 조달되는 동안 여유가 생긴 베르덴은 마법서에 새로운 5위계 대지 마법을 등록했다.
4위계 이하는 중상급 마석을 소모하나, 5위계 마법은 상급 마석을 재료로 사용해야 하며 등록 가능한 마법도 1개로 축소된다.
재룟값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마일드륀 광산에서 마석들을 가져오길 잘했군.’
덕분에 돈 한 푼 안 들이고 마법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대지 마법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희귀 금속으로 제련된 갑옷이라도 손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후 베르덴은 스스로의 경지에 대해 파악하며 새로운 마법을 터득하는 데 진력을 했다.
라인즈에서 이해하고 해석한 고위계 부여 마법의 구성 방식.
그것을 토대로 베르덴은 새로운 5위계 마법을 깨우치려 했으나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이론과 연산에서 끝나는 원소 마법과 달리, 부여 마법은 육체 또는 사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실제로 마법을 다뤄 가며 그 감각을 온전히 체득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실전에서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4위계 마법 엘레멘탈 인챈트 또한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서야 성공적으로 시전할 수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5위계 부여 마법을 익히려면 더욱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든다.
슬론 숲 중심에 선 베르덴.
그가 까마득한 허공 위로 마력을 집중해 푸른 구체를 형성했다.
이어 한쪽 눈을 감으며 마법을 발동했다.
<마력의 눈>
베르덴의 시야 절반이 구체에 옮겨졌다.
푸른 구체를 천천히 움직이자 그에 따라 시야가 움직였다.
순간 미미한 흔들림은 있었으나 도중에 마력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다.
‘……성공이군.’
마력에 시야를 부여한다.
이처럼 5위계 마법은 4위계 마법보다 위력이 떨어지고 화려하지 않더라도, 더욱 실용적이며 각 계열에 특화된 마법이 산재해 있다.
하나 그만큼 깊기에 마법을 터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덴조차 이 마법 하나를 배우는 데만 며칠이 걸렸으니.
물론 다른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속도였으나, 그의 잣대는 어디까지나 상대성이 아니라 절대성이다.
누구보다 뛰어나다, 누구보다 성의를 다했다 등 그러한 재능과 노력 자체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그것들로부터 발현되는 압도적인 강함만이 베르덴에겐 중요했다.
세상은 약자에게 더없이 잔혹하니까.
“후우…….”
마법을 해제한 베르덴이 바닥에 앉아 나무를 등받이로 삼았다.
수십, 수백 번에 다다른 시행착오에 눈가가 뻐근했다.
그래도 성과를 얻었으니 괜찮다.
이후로도 시간을 들여 더욱 강력한 부여 마법을 깨우친다면 그의 강함은 현격하게 상승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마도에 이른다면.’
……어쩌면 마탑주를 대면할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은 휴식을 즐겼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베르덴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정확히 심장 부근을 향해.
‘그나저나 이건 도저히 알 수가 없군.’
베르덴의 심장엔 마치 마탑의 동력원을 보듯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마력이 담겨 있다.
부여 마법을 터득하면서 스스로 신체 내부를 몇 번이고 관조했으나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다.
역천을 이루면서 갑작스레 바뀐 벽안과 잿빛 머리칼……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 다 이유를 모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러니 베르덴이 취할 태도는 하나뿐이었다.
‘당장 이렇다 할 문제도, 해결책도 보이지 않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단서도 없는데 억지로 짜 맞추며 현상을 이해하려 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렇게 연이어 날짜가 지났다.
경매가 열리기까지 남은 9일.
로아프라로 향할 시간이었다.
* * *
베르덴이 짐을 정리했다.
소울 트리의 줄기, 원소의 숨결, 마력 크리스털, 마법서 등 중요한 물건들을 최우선으로 담고.
그 뒤로 수십 억에 달하는 현금과 포션 그리고 물과 식량을 챙겨 넣었다.
용량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공간가방을 허리춤에 차며 채비를 갖췄다.
옆에서 페르네가 말했다.
“이름은 ‘샘웰’. 주로 암흑가에 방문한 귀족들을 상대하는 전문 안내인이에요. 남쪽 성문에서 눈에 띄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페르네에게 배웅을 받으며 아세른을 떠났다.
<비행주파>
점차 겨울이 지나 봄이 시작되는 계절.
태양이 높이 떠 있는 푸른 하늘길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윽고 석양이 내려앉으며 밤이 찾아왔다.
그때가 되면 베르덴은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얕은 숙면을 취했다.
물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마법진을 깔아 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더없이 자유로운 여행길이었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도시 아우로플(Auroffle).
거대한 성벽과 높게 세워진 건물들. 겉으로 보이는 규모는 라인즈와 필적한다.
‘저 도시 지하에 저것보다 더 거대한 암흑가, 로아프라가 숨어 있다는 건가.’
건축 쪽에는 조예가 없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었겠지.
일반인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조차 힘든 마법 기술 또한 가미되었을 것이다.
만약 도중에 균열이라도 생겼다간 지상의 도시와 지하의 암흑가가 눈 깜짝할 사이에 궤멸해 버릴 테니까.
베르덴이 지상으로 내려갔다.
페르네가 말했던 대로 남쪽 성문을 통과했다. 검문 도중에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샘웰이라는 안내인을 찾아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환영합니다, 고객님!]
그런 문장이 쓰여 있는 팻말.
그 옆에서는 인상 좋은 사내가 작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