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35화 (135/366)
  • 135화 은행 대출

    쟈이안 숲과 대도시 라인즈의 거리는 일반적으로 약 13일.

    거의 쉬지 않고 말을 갈아타며 이동하면 7일, 끊임없이 비행을 쓴다면 3~4일 정도의 거리다.

    일절 잠을 안 자고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 해도 왕복에 6일에서 8일은 걸린다는 뜻.

    그리고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여긴 목숨 자체가 위험한 금지이기에 함부로 기간을 예측할 수는 없다. 대신 늦어도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으면 죽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갑갑한 어둠 속에서 그 이상으로, 더군다나 혼자서 살아남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고작 13일이라고?’

    운 좋게 사령의 보주가 동굴 입구에 걸려 있기라도 했던 건가? 아니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다.

    베르덴과 칼리아가 마주 앉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먼저, 무사히 와서 기쁘다.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그런데 우리가 예상한 시간과 차이가 크군.”

    돌려 말하긴 했으나 뜻은 같았다.

    정말로 사령의 보주를 가져왔냐는 의미일 터. 확실히 베르덴이 생각해도 너무 빨리 오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해 가며 움직일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사령의 보주를 꺼냈다.

    희미한 자색의 빛이 칼리아와 베스파의 시야에 비쳤다.

    “그건…….”

    “사령의 보주입니다.”

    베르덴이 마력으로 보주를 자극해 억압된 기운을 끌어내자, 죽음의 기운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엘더 리치가 사용한 이후로 상당히 약해진 상태이긴 했으나, 진짜임을 증명하기엔 충분하다.

    마력을 거두자 기운이 사라졌다.

    내려앉은 침묵.

    칼리아와 베르덴의 시선이 교차했다.

    “의뢰는 어땠지?”

    “쉽지는 않았습니다.”

    “쉽지는 않았다라.”

    칼리아가 입가를 비틀었다.

    ‘내 생각이 틀렸군.’

    눈앞의 마법사는 운이 좋은 게 아니었다.

    단순히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을 돌파하여 사령의 보주를 회수한 것이다.

    이제 보니 그의 로브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로브 끝자락이 부식되어 있는 등 마법의 흔적까지도.

    “방해가 있었나 보군. 주검의 영광인가?”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마주쳤습니다.”

    “설마 금지까지 쫓아올 정도라니. 이 보주가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의미겠지. 그나저나 네 모습을 보니 상당히 강한 흑마법사였나 본데.”

    강하긴 했다.

    물론 흑마법사가 아니라 엘더 리치를 말하는 거지만.

    베르덴은 의뢰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노력에 금칠을 해 봤자 보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힘든 척하며 추가 보수를 요구할 수도 있긴 하지만 베르덴은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의뢰의 보수인 칼리아의 신용.

    엘더 리치를 상대한 걸 감안한다 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적어도 베르덴에겐 그러했다.

    “아주 고생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군. 놈들의 은신처까지 토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뭐, 워렌스가 말했던 노인과 여성이 없는 걸 보아, 배신자가 생긴 시점에서 은신처를 옮긴 것 같긴 하다만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되려던 사람들은 구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과지.”

    그리고.

    “비밀리에 관련자들을 추적해 주검의 영광의 흔적을 쫓고 있다. 그리고 놈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사령의 보주를 빼앗는 데도 성공했으니, 잘하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칼리아는 왕국을 위할 뿐, 왕가에 충성하지 않는다.

    3왕자와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왕국을 위협한다면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보상에 대해 논하는 게 먼저겠지.”

    칼리아가 붉은 주머니를 건넸다.

    “열어 보도록.”

    그러자 에스퍼렌사의 상징이 새겨진 검붉은 인장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원하던 내 신용이다. 그걸 보여 준다면 에스티리아 왕국 어디를 가도 귀족에 필적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신용이 필요한 문제에선 더더욱.

    하지만 그렇기에 조심해야 한다.

    귀족의 신용, 특히나 에스퍼렌사의 명성을 더럽히는 파렴치한 짓을 벌인다면 가문에서 신용을 회수하러 올 것이다.

    당연히 대가는 죽음으로.

    “물론 너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위력으로 약자에게 기생한다든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그 빚을 내게 떠넘긴다든가 말이야.”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마법사로서 부끄러운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칼리아의 신용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니.

    베르덴이 단언하자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그리고 암흑가의 경매장에서 필요한 자금을 구한다고 했었지? 그 인장으로는 최대 25억 엘크까지 빌릴 수 있다.”

    귀족은 사회에서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그건 은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칼리아의 명의를 빌렸기에 무려 반년간 이자는 면제된다.

    그 이후 연 1.8%로 금리가 고정된다. 일반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조건이었다.

    “의뢰 보수로 내 신용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도 그렇지만 네가 목숨을 걸고 금지에서 사령의 보주를 찾아왔기에 흔쾌히 준 것이지. 그래도 노파심에 한 번만 더 말하겠다.”

    칼리아가 검붉은 눈빛을 번뜩였다.

    “내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선에서 목걸이는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하지만 만약 돈을 빌리고 도망친다면…….”

    그 정도 금액은 후작가의 독녀인 칼리아에게도 아찔한 정도다.

    당연히 가세가 기울 정도는 결코 아니나, 그녀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증을 섰다가 덤터기 쓴 귀족이라고.

    백강이라 불리는 칼리아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자 모욕이었다.

    “그러니 꼭 갚아라.”

    “알겠습니다.”

    “죽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반드시.”

    알겠다고.

    베르덴은 속으로 답했다.

    * * *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베르덴은 당장 라인즈를 떠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바로 경매장에서 사용할 현금이다.

    그야 대외적으로 열리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기에 계좌 이체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수십억에 달하는 현금을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그누스 은행이든 다이나 은행이든.

    어떤 지점에 가든 25억 엘크를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절반만 있어도 다행이지.

    그래서 각 지점들이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럴 만한 권한을 가진 자는 대개 대도시의 은행을 담당하는 지점장이고.’

    여기 라인즈 말이다.

    베르덴이 가진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

    더군다나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직접 다스리는 라인즈이기에 힘들게 설득하지 않아도 지점장은 도와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고위 귀족의 신용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라인즈의 다이나 은행 지점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마법이다.

    ‘5위계에 도달한 지금, 그에 걸맞은 마법을 익혀야 하는 법이니.’

    엘리먼 학파의 보헤미른 마탑.

    베르덴은 약 10년 전, 마탑의 연구원으로서 그에게 열람이 허가된 수많은 서적을 섭렵했다.

    그것뿐만이 아닌, 마탑의 비공식 실험체로 살아오기까지 했다.

    너무도 증오스러운 과거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지식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베르덴이기에 5위계 원소 마법은 머릿속에 담겨져 있다.

    당장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5위계 부여 마법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다.’

    그렇기에 수도나 그에 필적하는 도시에 위치한 대도서관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여러 마탑에서 발행한 다양한 마법 서적이 있었으니까.

    국가 차원에서 해마다 마탑들에게 일정 금액을 주고 유치한 것인데, 단순히 그들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계 개선이나 유지에 돈은 최고의 수단 중 하나였으니까.

    그 외의 실용적인 가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귀족이 아닌 이상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깊은 지식이 없으면 문장 하나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마법 서적들을 누가 찾겠는가.

    대중들에겐 그저 값비싼 관상용 예술품 취급일 뿐이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5위계 부여 마법 서적을 찾을 생각이었다.

    대출만 성공적으로 한다면 필요한 자금은 전부 준비되는 셈이니, 투자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일단 다이나 은행부터 간다.’

    그게 먼저였다.

    우선순위를 정한 베르덴이 라인즈의 거리에 발을 디뎠다.

    * * *

    다이나 은행.

    대도시 라인즈 지점.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지점장님!”

    은행의 지점장을 맡고 있는 드렐프가 부하 직원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날마다 같은 하루 일과의 시작.

    인자한 인상을 가진 드렐프가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누였다.

    사라락. 사락.

    그 후 어제 직원들이 올린 투자 보고서를 쭈욱 읽어 봤다. 달리 트집 잡을 것도 없었다. 드렐프가 주도했던 투자 사업은 명확히 상승 곡선을 보였다.

    “으하하하하. 역시 내 안목은 아주 탁월해. 음!”

    드렐프는 오랫동안 중립적인 상회들에게 투자를 감행했다.

    지인들이 조합에 투자하라며 꼬드겼고, 조합으로 인해 손해를 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돈을 거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합의 어둠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몰라도 이 바닥에서 소문이 좋지 않은 귀족들은 죄다 조합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왕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라인즈에서 살아온 드렐프는 조합을 가까이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라인즈를 다스리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드렐프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거절했다.

    당장 이득이 눈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불안하고 더러운 투자처에 손대는 건 질 게 뻔한 도박이나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조합의 부정이 드러나며 다른 상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렐프의 이익도 마찬가지.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올해 왕국 지점장 중에서 실적이 가장 높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잘하면 은행 본점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드렐프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히죽거렸다.

    그러던 때였다.

    “지, 지점장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직원이 조심스레 양손을 폈다.

    드렐프의 시야에 비친 검붉은 인장 목걸이. 바로 후작가의 독녀, 백강 칼리아의 표식이었다.

    눈을 부릅뜬 드렐프가 벌떡 일어섰다.

    “서, 서둘러 안내를…… 아니, 당장 여기로 모시세요! 오면서 차하고 과자도 내오고! 최고급으로!”

    “네, 네!”

    직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베르덴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저는 이곳의 지점장을 맡고 있는 드렐프 컬리엔. 귀하신 분께서 다이나 은행 라인즈 지점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자 자, 여기 앉으시지요.”

    드렐프가 아주 공손하게 안내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내줬다.

    이윽고 다과가 준비되었다.

    능숙하게 귀족에게나 할 법한 거창한 환영을 마친 드렐프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다이나 은행엔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대출을 받으러 왔습니다. 현금으로.”

    “아, 그러시군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희 지점은 다른 지점보다도 현금 보유량이 많아 이용하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혹시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7억? 8억?

    드렐프는 경험상 그렇게 예상했다.

    “25억 엘크.”

    “……네?”

    드렐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25억 엘크라고?

    잠시 기다려 봤으나 대답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진짜?’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라면 최대 대출 한도가 25억 엘크라는 건 알고 있다.

    물론 저 이상의 금액을 대출하는 고위 귀족도 있긴 했지만…… 결코 흔하지는 않았다.

    귀족은 자신의 재산 사정에 대해 타인이 알게 되는 걸 굉장히 꺼렸으니까.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대출을 이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편이었다.

    ‘현금은 더더욱.’

    어쨌든 이 지점만으로는 현금이 부족하다.

    다이나 은행은 보통 예금액의 태반 이상을 투자에 사용하고 있으니까.

    억지로 현금을 만들려면 투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드렐프 혼자서는 무리다.

    최소 네 개의 지점이 협조해야 넉넉하게 마련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번거로워진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일이 많아진다.

    ‘일단 고객의 마음을 돌리는 게 우선이야……!’

    다이나 은행의 지점장으로서.

    드렐프가 화려한 언변으로 크게 돌려 말하며, 어떻게든 베르덴의 마음을 바꾸려 애를 쓰고 또 애를 썼다.

    턱을 비롯한 얼굴 근육이 뻐근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통할 리가 없었다.

    “25억 엘크. 현금으로 부탁합니다.”

    “…….”

    일말의 여지도 없는 단호함.

    이미 결정을 마친 베르덴에겐 협상 따위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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