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다녀왔습니다
그는 에스티리아 왕가에 충성하는 궁정 마법사였다.
왕가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일이었다.
공화국과의 전쟁 도중 반란 혐의를 받고 있는 자국의 병사들을 생매장하는 일이든.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구한 마을 사람들을 구속해 신임 재상에게 인계하는 것이든.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고이든 간에 그저 충성심 하나로 견뎌 왔다.
왕국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불순분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실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인체 실험.
왕가의 명으로 행해진 끔찍한 결과물이,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잔혹한 끝을 맞이한, 저주받은 장소를 목격했다.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병사들이 매장되었어야 했는지, 끌려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또한.
이건 왕가의 이면에 숨겨진 끔찍한 그림자였다.
그 직후 한 사내가 찾아왔다.
궁정 마법사의 정점이자 위인으로서 존경해 마지않던 마도사.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한테서 배반 혐의가 의심되네.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리비안트 공작과 내통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연히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공작은커녕 공작의 영지조차 가 본 적 없는데 어찌 첩자질을 할 수 있겠는가.
이건 단순한 입막음일 뿐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왕가의 명을 받아 수많은 사람을 해친 것과 같은.
[에스…… 티리…… 아…….]
저항은 했으나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5위계, 그것도 마도를 깨달은 마도사는 너무도 강대했다.
함께 왕가의 임무를 행하던 동료들의 목숨을 방패 삼아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망쳤으나,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래서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고통.
필사적으로 동굴 내부를 뚫었으나, 까마득한 구렁 아래로 떨어진 건 두개골 하나와 뼛조각 몇 개뿐이었다.
[에스티리…… 아……!]
하지만 언데드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운 좋게 엘더 리치가 된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어둠 속을 방황했다.
그 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사령의 보주를 얻어 과거의 기억과 지성을 서서히 되찾았다.
이윽고 새로운 목적마저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개처럼 충성하던 자신을 죽인, 왕가에 대한 복수를.
그랬어야 했는데.
[왕가는…… 어디에…….]
엘더 리치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핵 내부부터 완전히 파괴된 터라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손끝부터 시작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푸스스스스.
잿더미로 화하기 시작하는 엘더 리치의 육신.
허공에 녹아내린 검은 로브마저 자취를 감추고 난 자리에는, 오직 사령의 보주만이 남아 있었다.
* * *
“끝났군.”
엘더 리치는 완전히 소멸했다.
후우. 베르덴이 무릎에 손을 얹었다.
전투의 흥분을 서서히 가라앉히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야 당연했다.
며칠 동안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수많은 이형종과 아인종을 상대했으니까.
스스로 치열한 나날을 보내 왔다고 자부하긴 하나, 그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전투 밀도가 높았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개운했다.
역천을 이룬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5위계에 올라섰으니.
그야말로 베르덴이 살아온 일생이기에 기적적으로 이룩하게 된 성장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경험했던 경지였으니까.
설령 마력조차 움직일 수 없었던, 그저 마력회로만을 5위계의 격으로 억지로 상승시킨 것이나 그럼에도 길은 길이다.
이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고, 베르덴의 육체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들과 다르게 별다른 장애물 없이 5위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 애써 전율할 필요도, 감탄할 필요도 없다.
그저 기뻐해라.
마침내 초월자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섰음을.
저벅.
베르덴은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 더미 위에 놓인 사령의 보주. 처음 봤을 때보다 빛이 더욱 약해져 있었다.
엘더 리치로 인해 상당한 양의 마력과 사기를 소모한 모양이다.
베르덴이 팔을 뻗었다.
흑마법사 워렌스가 결코 손을 대면 안 된다고 경고했으나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이내 보주에 닿자 손끝을 타고 죽음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같잖군.’
화아아악.
베르덴의 마력이 사령의 보주를 억눌렀다.
부정한 기운이 날뛰며 반발했으나 5위계에 오른 그에게는 하찮은 반항이었다.
억지로 힘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하자 곧 잠잠해졌다.
“……!”
그때였다.
사령의 보주 내부에서 사념이 느껴졌다.
익숙한 감각. 이건 다름 아닌 엘더 리치가 남긴 증오의 기억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 놀랄 것도 없지.’
통곡의 기사의 기억.
정령의 기억.
그리고 엘더 리치의 기억까지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베르덴이 마력을 억누르며 기억의 전송을 받아들였다.
언데드의 분노에 집어삼켜지거나 정신적 충격이 발생할 일은 없다.
이건 확신이었다.
얼마 안 가 누군가의 죽음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통곡의 기사 때와는 다르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에 전보다 많은 기억의 장면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베르덴이 언데드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생전에 궁정 마법사로 지내 온 엘더 리치.
왕가의 명령을 받고 국민들을 숙청하거나 조달하던 중 인체 실험에 대해 깨닫고 입막음을 당하다, 정도인가?
‘사연 있는 결말이군.’
물론 베르덴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엘더 리치가 겪은 배신감 따위야 전혀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주목할 건 있다.’
첫째, 인체 실험.
이걸 보는 순간 누가 벌인 짓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분명 과거의 글러트니가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리스너가 말하길, 신임 재상뿐만이 아니라 그가 데려온 마법사들이 글러트니의 일원이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왕가의 허락하에 대규모의 인체 실험을 벌여 만 단위의 희생자를 냈으며.
결국 방주에서 직접 나서서 재상을 포함한 글러트니를 전멸하고 실험체까지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즉, 이 기억은 약 30년 전의 것이라는 뜻이군.’
대충 배경은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였다.
생전에 엘더 리치가 몸담고 있던 집단을 결과적으로 혼자서 몰살한 마도사.
그 얼굴을 베르덴이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간접적으로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숲의 정령과 함께 있던 엘프를 납치한 중년의 사내.’
세월이 다른 탓에 젊어 보이긴 했으나 동일인이 틀림없었다.
‘저 마도사가 왕가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인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어째서 엘프를 데려간 거지?
글리트니와 관련된 건가? 방주에게 척살당하지 않은 걸 보면 직접적으로 연결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다만 에스티리아 왕가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사실 베르덴도 왕가와 관계가 있긴 하다.
주검의 영광을 포함해 조합의 일각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즉, 현재 3왕자와 대립하고 있다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러다가 왕가 전체와 적대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뭐, 설마 그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겠지.’
한 나라의 왕가와 적대하면 곧 반란이자 반역이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왕가에서 베르덴을 죽이려고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지금 상황에서는 쓸데없는 상상일 뿐이다.
‘그보다는 사령의 보주를 칼리아에게 전달하는 게 최우선이다.’
등을 돌린 베르덴.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커어어억!”
칼끝이 흑마법사의 복부를 관통했다.
칼날을 비튼 뒤 옆으로 긁어 내듯 휘두르자 흑마법사는 즉시 절명했다.
토벌대원이 가쁜 호흡을 내쉬며 바닥에 무릎 꿇었다.
마비의 저주에 적중당해 호흡이 너무도 힘겨웠다.
그러자 뒤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주를 완화했습니다. 완전히 해주하긴 어려우나 당장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토벌대원을 향해 성직자가 빙긋 웃었다.
지금까지 사악한 흑마법사의 토벌은 별탈 없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성직자들에게 지원을 받는 토벌대는 흑마법사에게 있어 천적 그 자체.
도중에 은신처에 잡혀 있던 여성 또한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성직자가 어깨에 걸친 로브를 벗어 여성에게 건넸다.
“보온 효과를 지닌 것이니 추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고, 고맙습니다, 성직자님……!”
여성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위험에 빠진 어린양을 구하는 건 그의 보람이었다.
“그, 근데 성직자님. 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야 물론입니다. 루아스 신의 맹세하건대 반드시 안전히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먼저 도시 라인즈에서 건강을 되찾으신 뒤 말이죠.”
성직자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라인즈라면…… 그 훌륭하신 에스퍼렌사 후작 각하께서 다스리는 대도시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왕국의 평화를 위해 진심을 다하는 분들이지요. 당신을 구해 낸 것에도 그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 모든 게 루아스 신의 인도겠지요.”
“아하…… 그분들이…….”
여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성직자의 등 뒤로 한 발자국 다가서더니 작게 속삭였다.
“감히 누가 여길 쳐들어왔나 했더니 에스퍼렌사였구나? 배신자의 행방을 놓쳤다고 들었는데, 그쪽으로 간 건가?”
“네? 지금 무슨…….”
“알려 줘서 고마워. 그럼 잘 가.”
핏.
바늘보다 얇은 뼈의 가시가 성직자의 척수와 뇌를 관통했다.
일격에 성직자를 즉사시킨 여성, 비올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사, 걔도 참 깐깐한 척은 다 하더니 기껏 만든 은신처까지 털렸네? 뭐, 어차피 여기 남은 건 잔챙이뿐이었지만.”
배신자가 생긴 시점에서 은신처를 옮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
그나저나.
“배신자가 에스퍼렌사 쪽에 붙었다면…… 사령의 보주도 거기 있으려나?”
잠시 고민한 비올라가 결단을 내렸다.
왕국에서 이미 질릴 만큼 시간을 보낸 그녀는 하루빨리 3왕자와의 거래를 끝내고 싶었다.
비올라의 시선이 시체가 된 성직자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인형극이나 해 볼까?”
* * *
……시간이 지나 세 개로 나뉘었던 토벌대가 한곳에 모였다.
부상자는 있었으나 성직자들 덕분에 희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은신처 내부에 잡혀 있던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몸 안에 새겨진 저주 탓에 포로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흑마법사의 진상에 더 가까워지면 될 터.
“다행히 도망친 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남은 잔당이 없는지 철저하게 확인한 성기사가 말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결과였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흑마법사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칼리아 님이 기뻐하시겠군.’
베스파가 내심 웃으며 토벌대의 귀환을 이끌었다.
그러나 성기사도 성직자도 그 어떤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성직자 한 명이 죽었으며.
그 껍질을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남아 있다는 것을.
* * *
“고생했다, 베스파.”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칼리아 님.”
칼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충실한 기사단장에게 실망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칼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애셔는 무사한지 모르겠군.”
그동안 칼리아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아무리 그가 스스로 나서겠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사지로 보낸 셈이니까.
무거운 짐을 떠넘긴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 간단히 당할 사내는 아니었으니 걱정 마시지요. 그리고 아직 돌아오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테니, 그를 믿고 소식을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긍정보다는 부정이 앞선다.
칼리아가 달콤한 차를 마시며 씁쓸한 입맛을 달랬다.
그러던 그때, 사용인이 문을 두들겼다. 손님이 왔다는 뜻이었다.
‘아마 네비론 주교겠지.’
며칠 전, 워렌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의논할 게 있다고 했었으니까.
뭐라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칼리아가 손을 저었다. 직접 배웅을 나선 베스파가 잠시 후 돌아왔다.
칼리아가 손님을 반기려던 찰나.
“어……?”
“다녀왔습니다.”
주교가 아니라 베르덴.
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채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