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5위계
누구에게나 초행길은 어려운 법이다.
낯선 풍경,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 미혹, 그 두려움.
언제 목적지에 다다를지 알 수 없는. 그리고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미지.
누군가는 도중에 무너져 주저앉으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 이는 망설이고, 준비되지 않은 자는 포기와 함께 스스로 길을 되돌아간다.
가본 적 없는 길이란 그런 것이다.
단 한 걸음을 내딛는 데 많은 용기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과정을 견디는 자만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을 이미 걸었던 자라면 어떨까.
한순간에 불과할지라도 목적지에 도달했다면?
그리고 그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될 만한 역경과 고난을 견딘 자라면? 완벽을 넘어 완전하게 준비를 갖춘 사람이라면?
두려움이 생길 이유가 없고, 굳이 용기를 가질 이유도 없다.
그저 움직이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자연스레 길을 인도할 테니.
────쉬이익!
녹색의 구체가 스치듯 옆을 지나쳤다.
끝자락이 부식되어 손상된 유자의 로브. 만약 신체에 직격당한다면 즉사 혹은 그 부위를 절단해야 할 터.
즉각적으로 회피 기동을 펼친 베르덴이 오큘러스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등 뒤로 위력적인 흑마법과 저주가 쏘아졌다.
이내 머리로 뻗어 오는 사슬을 피해 낸 베르덴이 역으로 엘더 리치를 향해 육박했다.
<어스 크랙>
마안을 이용한 트리플 캐스팅.
총 세 방향에서 날아온 거대한 암석 파편들이 엘더 리치를 덮쳤다.
놈은 항상 그랬듯 <불사자의 장막>으로 마법을 막아 냈으나, 베르덴의 대지 마법은 마법서로 강화된 위력을 품고 있다.
쩌적.
성벽과 다름없는 장벽에 미세한 금이 생겼다.
그것을 본 베르덴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허공에 흩날린 수많은 파편이 날카로운 가시로 변화되어 다시금 장막을 타격했다.
‘장막을 유지하는 동안 엘더 리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 명확한 빈틈을 노린 베르덴이 지척에 다가갔다.
전력으로 휘두른 오큘러스.
충격파에 직격당한 장막에서 소리가 나더니 이내 수백 갈래로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필요한 건 관통력.
거대한 암석의 창에 불길을 심었다. 그리고 후면에 압축된 공기를 폭발시켜 위력을 극대화했다.
쩌어어엉!
불사자의 장막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덴의 마법은 엘더 리치의 왼쪽 갈비뼈 두 개를 앗아 갔다.
엘더 리치의 급소는 다름 아닌 가슴 안에 숨겨진 붉은 핵.
급소에 스치듯 비껴 나간 충격에 주춤거린 엘더 리치, 놈의 두개골 안에 있는 자색 불꽃이 강하게 흔들렸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격분한 엘더 리치의 손에서 사령의 보주가 명멸했다.
<부정폭발>
콰아아아앙!
부정한 폭발이 베르덴을 덮쳤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다. 순간 뇌진탕이 일며 시야가 흔들릴 정도의 위력.
콰드드드드득.
멀리 나가떨어진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땅에 박아 제동을 걸었다.
숨을 토하며 충격을 버텨 낸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조금 더.’
시전 속도를 극적으로 단축하고 마법을 합성했다.
마안에서 통증이 느껴졌으나 여력은 충분하다.
글러트니의 송곳니, 루펠을 상대했을 때에 비하면 부담이라고 할 것도 없다.
<용암격창>
시뻘건 용암의 창이 엘더 리치의 몸통을 노렸다.
그러자 엘더 리치가 손을 휘저었다.
사방에 칠흑의 안개가 내려앉더니 그에 휩싸인 용암의 창이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 안개 속에서 나타난 합성 마법이 시전자인 베르덴을 향해 쏘아졌다.
‘설마 공간 마법인가?’
……자세히 보니 아니다.
저건 마법에 내재된 마력을 혼동시켜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도 어려운 마법이나, 고위 속성 중에서도 최고위에 속하는 공간 마법에 비할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혹한의 반지(모조품)를 전력으로 활성화하여 빙결의 뇌격을 던졌다.
자욱해진 수중기.
정확히 서로의 위력만을 상쇄한 마법이 그대로 조각나 사라졌다.
그때, 베르덴의 주위에서 스켈레톤들이 솟아올랐다.
흑마법사 쿤엘에 의해 저주를 받은 땅.
지형조작이 불가능한 지면을 엘더 리치가 불사자의 영역으로 만든 것이다.
모래 더미에서 솟아난 수십 마리의 언데드가 턱뼈를 딱딱거리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열뢰>
베르덴이 붉은 번개를 내리꽂았다.
저급한 언데드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잿더미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더 리치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불사의 화염>
검붉은 불길이 스켈레톤 무리를 휘감았다.
일시적으로 화염에 면역을 갖춘 놈들이 다시금 앞길을 막아섰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저 묵묵히 마력을 전개한 베르덴이 작게 호흡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오큘러스에 화염을 부여한 베르덴이 원소 마법과 함께 전장을 휩쓸었다.
격전에 다다른 마법전. 같은 언데드의 안위를 도외시한 엘더 리치의 흑마법이 연이어 빈틈을 노렸으나, 그럴수록 베르덴은 고양감이 치솟았다.
두근.
혈류가 가속화되며 심장이 뛴다.
대량의 마력을 소모했음에도 아직도 가득 들어찬 마력이 마력회로를 맥동시킨다.
원소 마법사의 본의는 파괴.
어느 순간 잡념은 지워지고 그러한 일념으로 좁혀진다.
과거에 경험했던 그 감각이 더욱 명확해졌다.
흐릿하게 보이던 벽이 분명히 보였으며 어느새 그 너머에 가까워지고 있다.
[……!]
줄곤 살의와 증오에 휩싸여 있던 엘더 리치가 멈칫거렸다.
언데드는 죽음에서 태어난 이형종.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베르덴의 모습에 위협을 느낀 엘더 리치가 본능적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자신의 마력과 사령의 보주에 담긴 마력을 대거 소모했다.
엘더 리치의 눈이 베르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베르덴이 멈춰 섰다. 엘더 리치에게 점지된 것이다.
일순간 충돌한 서로의 마력.
이어진 정신계에 두 존재만이 남았다.
이곳은 시전자인 엘더 리치가 곧 주인. 피시전자인 베르덴보다 수십 배 거대해진 엘더 리치가 손을 뻗었다.
뼈의 손아귀로 베르덴을 강하게 움켜쥔 엘더 리치가 저주를 펼쳤다.
<정신파괴>
쩌저저적.
손안에서 영혼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저주에 당한 자는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흑마법 중에서도 현격하게 위험한, 사령의 보주가 없었다면 엘더 리치라고 해도 펼칠 수 없는 고난도의 저주였다.
엘더 리치가 주먹을 꿈틀거렸다.
잘게 짓이겨진 영혼의 잔재가 느껴진다. 산 자의 죽음을 갈망하는 언데드의 본능이 기분 좋게 자극되었다.
그때였다.
[……!]
정신계 안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엘더 리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끝을 모를 바다가 존재했다. 깊이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푸른 어둠.
이내 심연의 해일이 엘더 리치를 잠식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했다.
인간을 벗어난,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마력을.
그 순간.
화아아아악!
정신계에서 엘더 리치가 추방되었다. 완전히 폐허가 된 공동으로 돌아온 그의 두개골에 커다란 금이 갔다.
스스로 내건 저주가 실패하며 시전자에게 돌아온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막대한 격통이 영혼까지 전해졌다.
절규하며 머리를 부여잡은 엘더 리치가 주춤거리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정신적 시체가 되어 있어야 할 마법사가 있었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넘어섰군.”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벽안.
푸른 심연을 담은 시선이 엘더 리치를 향했다.
* * *
역천을 이루어 1위계에서 2위계.
마력회로 확장제와 마법전을 계기로 2위계에서 3위계.
하르칸이 마도로 빚어낸 포션을 복용하고 3위계에서 4위계.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과 지금의 계기로 4위계에서 마침내 5위계까지.
보헤미른 마탑을 벗어난 지 328일 18시간 32분 19초가 지난 시점.
베르덴은 단언하건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성장 속도로 5위계에 도달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군.’
동력원의 마력을 견뎌 내기 위해 억지로 육체를 부숴 가며 올라섰던 5위계.
당시와 비슷한 감각이긴 했으나 실제로는 확연히 달랐다.
베르덴은 스스로를 관조했다.
그의 육체는 어떠한 무리도 없이 5위계의 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위계를 아득히 벗어나 있던 마력량이 더욱 깊고 방대해지며 전신에 충만감이 감돌았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건…….’
마력의 근원이 담긴 심장.
그 안에 미지의 마력이 잠들어 있는 게 느껴진다. 베르덴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다.
이건…… 그래, 마치 마탑의 동력원을 마주한 듯한 기분과 흡사했다.
‘역천을 이루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긴 건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나 이게 역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위계가 성장할수록 심장 안에 담겨 있는 마력이 해금된다고 볼 수 있었다.
마치 베르덴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마력량만큼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이 비정상적인 마력량 또한 이해가 가는데…….’
역천의 이론을 창시한 베르덴조차 원인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뭐, 어쨌든.
그건 나중에 알아낼 일이고.
‘사령의 보주부터 회수한다.’
엘더 리치는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지금의 베르덴이라면 토벌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덕분에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5위계에 올랐으니…….
‘한 번에 보내 주는 게 좋겠군.’
베르덴이 마력을 일으켰다.
그에 반응한 엘더 리치가 다시 사령의 보주를 이용해 마법을 구현했으나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속성으로 변환되는 마력.
오큘러스를 중심으로 마법의 화염의 고리를 형성했다. 그 여파만으로도 근처에 있는 대지가 녹아내렸다.
‘3위계 마법은 계열의 바탕이 되며, 4위계 마법은 다양성을 가진다.’
그리고 5위계 마법은 분명하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거나 광범위하지 않더라도 보다 마법의 계열에 특화되어 그 성질을 오롯이 드러낸다.
원소 마법의 본의는 파괴.
베르덴이 구현하고 있는 마법은 정확히 단일 개체만을 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미넌스>
<활염>
<스파이럴>
세 가지의 마법이 조화를 이룬다.
5위계 합성 마법은커녕 5위계 마법조차 다뤄 본 적이 없었으나 베르덴의 마력은 일절 흔들리지 않았다.
이론은 옛적부터 완전했으니까.
화염의 고리가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나선 형태로 풀어헤쳐진 그것들이 다시금 모여 주먹만 한 홍염의 구체를 만들었다.
일반적인 화염구보다도 작아 보이나, 그 안에 담긴 마력은 가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엘더 리치가 필사적으로 마법을 쏘아 냈다.
그러나 전과 달리 위력적이지 않다.
아무리 언데드라고 할지언정 정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이상, 제대로 된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와 더해서 베르덴의 마법은 이미 완성되었다.
현재 그가 구현할 수 있는 원소 마법 중에서도, 가장 범위가 국한되어 있으나 또한 가장 위력적인 마법.
쿠웅!
반작용으로 인해 베르덴의 몸이 뒤로 밀리며, 홍염의 구체가 사출되었다.
앞길을 막는 빙결 마법을 단번에 지워 버린 마법.
음속을 넘어선 그 속도는 느릿한 언데드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엘더 리치가 마력방벽을 둘렀으나 당연하게도 막아 낼 리가 없었다.
콰직.
일직선으로 마력방벽을 꿰뚫고 엘더 리치에게 도달했다.
정확히 놈의 급소인 새빨간 핵에 착탄한 마법. 이윽고 쩌저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5위계 합성 마법.
<적광赤光>
내부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오직 엘더 리치만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