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32화 (132/366)

132화 엘더 리치

사르륵.

모래 알갱이가 하나둘씩 굴러떨어지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모래 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래로 천천히 굴러떨어지는 사령의 보주.

이윽고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형상을 가진 것이 보주를 한 손에 쥐었다.

‘저건…….’

어떤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칠흑의 로브.

그 테두리에는, 인간의 언어로 읽을 수 없는 금색의 문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러한 로브를 두른 건 가슴 부근에 붉은 핵을 지닌 회색의 해골이었다.

세간에서 이러한 존재를 명명하길.

“에, 에, 엘더 리치…….”

쿤엘의 목소리가 겁에 질린 듯 흔들렸다.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엘더 리치(Elder Lich).

3위계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 리치의 상위종.

양눈에 담긴 푸른색의 불꽃을 빛내며, 무려 5위계 마법을 다루는 강대한 언데드로 알려져 있다.

모험가 길드가 책정한 엘더 리치의 위험도는 ‘최소’ 미스릴 등급.

‘그런데 듣던 것과는 다르군.’

저 엘더 리치의 두개골 안에는 자색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신체 또한 리치보다 더욱 거대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더 리치가 말했다.’

정확히 사람의 언어로.

어눌하긴 했으나 과거에 본 통곡의 기사보다는 유창했다.

어쩌면 사령의 보주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베르덴이 경계를 극도로 높였다.

상대는 5위계 마법사이기도 하며.

사령의 보주를 지닌, 일반적인 엘더 리치와 달리 지성을 갖춘 특이종이다.

저 언데드가 가진 힘을 모르는 상황에, 섣불리 기습을 하려 움직였다간 불리해질 수도 있다.

‘지금은 판단이 아닌 관찰이 필요할 때.’

베르덴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봤다.

그때, 엘더 리치가 다시 턱뼈를 달싹였다.

[너희는……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왔나?]

소름이 끼치는 무거운 음성.

언데드의 목소리에는 명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흑마법사였다.

“아아…… 아……!”

쿤엘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가 느끼고 있는 사령의 기운은 여태껏 겪어 본 것, 그 이상.

이건 비올라…… 아니, 노사에 필적하는 압박감이었다.

‘사령의 보주를 든 게 하필이면 엘더 리치라니……!’

최악이다, 최악이야.

죽음의 기사보다도 훨씬 강력한 언데드가, 사령의 보주를 손에 넣고 어떠한 진화를 거친 게 분명하다.

흑마법사이기에 알 수 있다.

저 엘더 리치는 세간에 익히 알려진 개체하고는 다르다는 걸.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뿐이었다.

<비행>

화아악.

머리로 결정하는 것보다 빠르게 쿤엘이 날아오르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금 사령의 보주가 문제가 아니다.’

저건 회수가 불가능하다.

노사가 직접 나서야만 해결 가능한 커다란 문제다.

그러나 엘더 리치는 쿤엘의 도주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에스티리아아……!]

엘더 리치가 손에 쥔 사령의 보주에서 빛이 명멸했다.

허공에 나타난 어둠의 형상.

그것이 순식간에 쿤엘을 따라잡더니 단숨에 그의 육신을 움켜잡았다.

우직. 우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악!”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한순간에 잡혀 온 쿤엘이 엘더 리치의 발 앞에 떨어졌다.

“이익……!”

어금니를 깨문 쿤엘이 스태프를 다잡았다.

아무리 두려움에 질렸어도 궁지에 몰린 이상 저항할 기력은 있었다.

<고통의 사슬>

<고통의 절규>

<본 자벨린>

<어둠 채찍>

본능적으로 떠올린 흑마법을 여지없이 쏟아 냈다.

싱글, 더블 캐스팅.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마력회로에 부하가 쌓인다.

점차 숨이 차올랐으나 쿤엘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만 갔다.

5위계 흑마법 <불사자의 장막>.

사령의 보주로 한층 강화된, 엘더 리치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자색의 보호막에는 일절 흠집도 나지 않았다.

특히나 저주에 특화된 쿤엘과는 상성이 맞지 않은 것이다.

언데드에게 저주가 통할 리가 없으니까.

“허억, 허억…….”

이내 마력이 고갈된 쿤엘이 숨을 토해 내며 무릎을 꿇었다.

마력회로에 과부하까지 찾아왔는지 얼굴과 목 부근의 핏줄이 한층 더 도드라졌다.

가느다란 손가락뼈가 쿤엘을 가리켰다.

콰지지지직.

지면 아래에서 솟아난 날카로운 뼈들이 일제히 쿤엘을 관통했다. 부위는 구별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같았으니까.

이어 뼈가 벌어지며 쿤엘의 시체를 아홉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그를 본 엘더 리치가 삐딱하게 턱을 저었다.

[너는…… 에스티리아가…… 아니다…….]

엘더 리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이번엔 베르덴과 시선을 마주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어디에 있지?]

무거운 살의가 공간을 잠식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이란 개념이 연상될 정도로 짙고 강렬한 기운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에스티리아 왕국에 원한이 많은 모양이군.’

어쨌든.

화아아악.

베르덴의 전신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태연하게 언데드의 살기를 받아 낸 그의 벽안이 푸른색으로 명멸했다.

‘5위계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강적.

결코 안일하게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감각이 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없다.

아무리 위계 차이가 있다고 한들, 사체 따위에게 겁먹을 정도로 베르덴은 나약하지 않았다.

쿠웅!

베르덴의 마력과 엘더 리치의 마력이 충돌했다.

모래가 휘몰아치고 중압감이 강하게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엘더 리치였다.

[에스티리아느은! 어디에 있나아!]

증오의 절규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콰아아아아앙!

번쩍이는 섬광.

막대한 충격이 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흑마법사 집단.

주검의 영광 은신처의 토벌.

본래라면 칼리아 본인이 나서야 했었으나 가주에게 근신 처분을 받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직속 기사단도 마찬가지.

그래서 단장 베스파가 비밀리에 뛰어난 기사 몇 명을 데리고 토벌대를 이끌었다.

가문에 반하는 행동이었으나 그들이 충성하는 건 어디까지나 칼리아뿐.

그녀의 명령이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그것이 기사였으니까.

베스파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잘 따라 주는군.’

토벌대의 구성원은 칼리아가 합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고용한 자들이었다.

최소한 검증되기는 한 자들이라 그런지 통솔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루아스교에서 파견된 성기사와 성직자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순조롭다.

그렇게 기민하게 산맥을 질주하던 그때였다.

“저기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빛으로 물든 성기사의 시야에 아주 미약하게 보였다.

산 꼭대기를 감싸고 있는 불투명한 무언가가 말이다.

성직자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추측상 흑마법을 사용한 마법진으로 은폐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군요.”

마법진에 해박한 마법사나, 신성력이 높은 교인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만약 성기사 또한 사전에 흑마법사의 은신처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

“정지.”

베스파가 손을 들자, 토벌대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미 오면서 토벌 계획은 전달했다.

말없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토벌대가 세 분대로 나뉘었다.

각자 워렌스가 말해 준 은신처의 통로를 점거하고 일제히 포위하여 토벌을 개시할 심산이었다.

정면을 맡은 베스파와 성기사. 그리고 소수의 토벌대원들.

각자 기운과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토벌, 시작.

쿠웅!

지시할 필요도 없이 단숨에 흑마법진을 돌파했다.

절벽 위에서 반응한 흑마법사들이 급하게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느껴진다.

하나 그보다도 빠르게 토벌대가 산 정상에 도착했다.

촤아아악!

허공에 잔상을 남긴 베스파의 검기가 흑마법사들을 베어 갈랐다.

사방에서 저주가 날아왔으나 성기사가 방패를 들고 빛의 막을 둘렀으며, 후방에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쏘아 내 놈들의 빈틈을 타격했다.

‘이걸로 바깥에 있던 흑마법사는 전멸.’

베스파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섬뜩한 동굴.

3왕자와 손을 잡은, 사악한 흑마법사의 은신처가 앞에 있었다.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부디 별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건만…….

‘그나저나 그 마법사는 살아 있나 모르겠군.’

베스파가 베르덴을 떠올렸다.

사령의 보주를 찾으러 홀로 금지로 향한 마법사.

덕분에 흑마법사의 토벌에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으나…….

‘솔직히 말해 칼리아 님이 그의 요구를 수락하신 건 도박수에 가까웠다.’

사령의 보주.

회수하러 가자니 전멸의 위험이 컸고, 포기하자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한들, 그렇구나 하며 가문의 힘을 빌려줄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왕국의 금지였으니까.

만약 기사들이 몰살당하면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책임 또한.

그렇기에 감히 보주의 수색을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애셔가 나섰다.’

칼리아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령 실패할 가능성이 아득히 높을지라도. 더군다나 본인이 나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운이 좋아 무사히 보주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런 마찰도 없이.

물론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베스파는 그저 칼리아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스파는 토벌대와 함께 은신처 안으로 들어갔다.

* * *

콰아아아앙!

화염 광선과 부정(不淨) 광선이 충돌했다.

중심에서 일어난 작은 폭발에 휘몰아치는 대기. 베르덴이 마력을 강하게 비틀어 앞으로 내던졌다.

<화염폭풍>

바람의 해일이 불길을 휘감았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흑마법사들의 사체를 소멸시킨 폭풍이 엘더 리치를 집어삼켰다.

언데드의 약점 중 하나인 화염.

과거에 만난, 어둠을 두른 통곡의 기사라고 해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다.

그러나 놈은 달랐다.

불길 사이에서 명멸하는 자색의 빛. 이내 폭풍 자체가 얼어붙으며 산산조각이 났다.

엘더 리치가 손아귀를 뻗었다.

<크라이오>

엘더 리치를 중심으로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공동에 떠다니던 공기, 모래, 먼지까지 전부 얼어붙으며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5위계 마법이라고 하나, 베르덴이 알고 있는 기존의 위력보다 높다.

분명 사령의 보주가 엘더 리치 자체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본래라면 마법의 시전자 또한 죽었을 위력이었으나, 언데드인 엘더 리치는 당연히 논외였다. 냉기에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베르덴에겐 치명적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군.’

그러나 무식한 마법이라면 베르덴도 일가견이 있다.

쿵!

오큘러스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지면 아래로 광활하게 퍼져 나가는 마력.

이번에는 베르덴을 중심으로 공동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붉은 열기가 지면의 틈새를 타고 올라와 어둠을 밝혔다.

<격변>

마치 화산의 폭발.

치솟은 불기둥이 한기를 대번에 뒤엎으며 마법을 완전히 상쇄했다.

얼음과 용암이 부딪치며 수증기를 자아내는 지대, 그 사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엘더 리치가 보였다.

‘확실히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법사와는 다르다.’

사령의 보주로 강화된 엘더 리치의 마법과 저주는 위력적이다.

과거의 기억으로 가늠해 봤을 때 보헤미른 마탑의 5위계 마법사보다도 더욱.

합성 마법과 혼돈 마법이 있다 해도 마법전 자체는 베르덴이 밀리는 게 당연했다.

‘비장의 수단이 있긴 하지만…….’

성신 마법.

유성과 혜성 중 하나만 사용한다고 해도 전황을 단숨에 압도할 수 있다.

‘이번엔 쓰지 않는다.’

간단한 이유다.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으니까.

5위계를 코앞에 둔 베르덴.

벽을 넘어서려는 그에게, 저 엘더 리치는 성장의 제물로 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런데도 하르칸의 마도에 의존하기만 한다면, 베르덴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엘더 리치는 결국 발판일 뿐.

‘그러니 짓밟고 올라선다.’

순수한 마법사로서.

두근.

베르덴의 심장과 마력회로가 맥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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