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사령의 보주 (2)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감 넘치는 반응에 칼리아가 고민했다.
‘금지가 어떤 장소인지 몰라서 그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무지(無知)란 때론 만용이며 오만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문득 칼리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앞의 마법사는 그러한 허세를 부릴 법한 자인가…… 하고. 답을 고민해 봤지만 긍정할 수는 없었다.
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보잘것없는 무용을 대단한 듯 뽐내거나 스스로를 과대 포장 하는 등.
어떻게든 칼리아의 눈에 띄기 위해 멧돼지처럼 멍청한 용맹을 부리는 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이내 생각을 마친 칼리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베르덴은 칼리아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을 보일 이유가 없다.
그건 칼리아 또한 알고 있다. 그랬다면 진즉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그녀의 발밑에서 비위나 맞추고 있었을 테니까.
다시금 찾아온 정적.
그러나 길지 않았다. 이미 원하는 건 생각해 둔 바가 있었으니까.
지금의 고민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것.
“칼리아 님의 신용을 받고 싶습니다.”
“신용?”
그건 추상적인 것이 아닐 터.
확신하건대 물질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세간에서 가장 흔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설마 내 명의로 뭘 빌릴 셈인가?”
다른 의미로는 보증을 서 달라.
베르덴은 부정하지 않았다.
“허…….”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스파의 표정이 멍해졌다.
살다 살다 귀족에게 보증을 요구하다니. 아니, 찾아보면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결코 흔한 건 아니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던 터라 화낼 틈도 없었다.
칼리아도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이 말을 덧붙였다.
“암흑가의 경매장에서 쓸 자금이 필요합니다.”
굳이 이유를 감출 필요는 없다.
어차피 밝혀야 했으니까. 경매에 참가하는 게 죄도 아니고.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의뢰가 부족한 터라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당장 칼리아에게 10억이 넘는 보수를 달라고 할 수도 없다. 당연히 거절할 테니까.
남은 건 대출뿐이다.
하지만 마그누스 은행이나 다이나 은행은 신용이 확실하지 않으면 한 푼도 빌려주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일하는 모험가나 용병 계열은 더더욱.
억대의 돈을 빌리려면 사회에 증명된 인물이 아니라면 무리다.
‘그렇기에 칼리아의 신용이 필요하다.’
은행의 관심은 오로지 원금과 이자의 회수. 그걸 확실하게 대신할 사람만 있다면 대출이 가능하니까.
‘대부업자 바르톨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최솟값이 아닌 기댓값.
그 이상의 자금을 마련하려면 말이다.
베르덴은 목적을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경매장이라…… 벌써 그럴 시기인가. 내 신용을 빌려 달라는 것도 납득이 가는군. 그렇다고 이렇게 면전에서 갑작스레 요구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실례했습니다.”
“실례는 무슨. 생각해 보면 그리 말이 안 되는 보수도 아니거늘.”
“가능한 겁니까?”
“안 될 건 없지.”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사령의 보주를 찾아오는 것.
그건 간단한 게 아니다. 패기 있게 들어간 사람들 중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즉, 이번 의뢰의 보수는 목숨값이나 다름없다.
“내 신용은 곧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신용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목숨을 바친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은 매우 특수하다.”
주검의 영광, 사령의 보주, 3왕자.
이들이 왕국에 가져올 암운이 얼마나 거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사전에 막는 게 최우선이라는 건 분명할 터.
“그러니 사령의 보주를 내게 가져오면 원하는 걸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확답은 받았다.
“그런데 내 신용까지 빌려야 할 정도라니. 경매에 원하는 게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그건 모르지만 여유 자금이 많다면 구할 확률이 더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경매장의 목록.
베르덴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건 그렇지. 뭐, 네가 뭘 구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 애초에 나는 암흑가 근처에 발을 디딘 적이 없기도 하고.”
암흑가에 가 본 적이 없다고?
경매장의 존재만 해도 귀족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그런 의문에 칼리아가 답했다.
“간단한 이유다. 우리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암흑가 로아프라…… 정확히 그 지배 세력인 ‘빈테르트’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이지.”
뭐,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아까 말했다시피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의 입구는 무수히 많다. 크기부터 위치까지 제각각이지. 다만 워렌스가 말했던 쟈이언 숲 중심부에 있는 건 정보가 있다. 모험가가 탐사했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거든.”
칼리아가 손을 까딱이자 베스파가 깨끗한 편지지를 준비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가볍게 글자를 끄적이곤, 반지 인장을 찍어 베르덴에게 넘겼다.
“모험가 길드에게 보여 주면 정보를 열람할 수 있을 거다.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가는 것보단 나을 테지.”
“잘 쓰겠습니다.”
“그래. 미리 보수를 준비해 둘 테니 부디 무사히 의뢰를 완수하고 오도록.”
당연히 그럴 거다.
지금으로서 아주 핵심적인 의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실패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죽는 건 논외고.
“그리고 가기 전에.”
칼리아가 공고문을 하나 베르덴에게 던졌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상당히 뻣뻣했다.
“플리쉬르 백작이 왕가에 구금되었다. 그로 인해 백작이 내걸었던 비행 금지령이 해제됐지. 시기는 바로 지금부터다.”
비행 사용 가능.
그로 인해 더 이상 말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귀찮게 가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며칠 더 생긴 셈인가.’
좋은 상황이다.
베르덴이 칼리아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베르덴이 드높은 상공을 비행하며 아래를 굽어봤다.
울창한 삼림이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광활한 생명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중심부가 이쯤일 텐데.’
고도를 낮추며 마력감지를 펼쳤다.
셀 수 없는 동식물의 존재 그리고 지형지물이 감각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마력을 퍼뜨리며 움직이자 곧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중에 나타난 작은 절벽.
동굴은 그 아래에 숨어 있었다.
쟈이안 숲 중심부에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 외엔 보주가 들어갈 만한 틈새조차 없다. 그러니 여기가 워렌스가 보주를 던진 장소가 맞을 터.
지면에 착지한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어지간한 건물 한 채보다 거대한 입구가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칼리아의 말대로 입구부터 경사가 상당하군.’
발을 헛디딘다면 바로 굴러떨어질 정도.
마력을 넓게 퍼뜨려 봐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도중에 여러 갈래로 길이 갈라지기도 하고.’
잘못하면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니 한가롭게 동굴을 구경할 여유는 없다.
부여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한 베르덴.
한 손에 오큘러스를 든 그가 동굴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사령의 보주, 수색 시작.
* * *
베르덴이 수색을 시작한 그 시각.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의 다른 입구 앞에 세 명의 흑마법사가 모여 있었다.
주검의 영광, 노사의 추적대.
그 책임자를 맡은 못생긴 쿤엘이 지면을 살폈다. 눈을 감고 사령의 목소리에 집중한 그가 눈가를 씰룩였다.
“……그래, 이곳이군. 이곳이 분명해.”
쿤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옆에 있던 흑마법사, 다니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쿤엘 님. 여기는 배신자가 지나온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주변에 인적이 전혀 없다.
적어도 연 단위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들이 쫓고 있던 배신자 워렌스도 마찬가지.
그러자 쿤엘이 눈을 번뜩였다.
“우리의 목적이 뭐지?”
“배신자를 추적해 사령의 보주를…….”
“그래, 맞다! 우린 배신자를 처단하는 게 아니라 사령의 보주를 찾는 게 목적이지! 그것이 노사의 명이시기도 하고!”
쿤엘의 손에 흙이 가득했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무수한 죽음. 그 사체는 자연스레 땅에 잠기는 법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사령이 내지르는 가열찬 비명 소리가 말이다.
“사령들이 온몸을 비틀며 말한다. 이 동굴 아래에 아주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고. 그리고…….”
쿤엘이 코를 씰룩였다.
“느껴지지 않나? 영혼을 자극하는 사기가 동굴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으음!”
“…….”
“…….”
다니엘과 카르잔은 침묵으로 답했다.
흑마법사 쿤엘은 사령과 관계가 깊은 특이 형질 보유자. 통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그러니 따를 수밖에. 여기서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간 저 광기가 그들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해야 했다.
“하지만 노사께서 보주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면 비올라 님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독단으로 움직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올라?”
죽음의 향취를 맡던 쿤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년의 도움은 필요 없다. 나처럼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강하기만 한 여자 따위가 대체 뭐라고!”
쿤엘이 짙은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가 비올라를 혐오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언제나 쿤엘을 못생겼다며 무시하고 비웃었으니까.
“내 경지는 비올라에 미치지 못하지만 마법전은 내가 이긴다. 흑마법의 이해도가 다르니 당연하지! 암! 그렇지!”
그렇게 제멋대로 확신했으나 다른 둘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비올라 님에게 압살당할 것 같은데.’
‘생채기 하나라도 내면 선방한 것 아닌가?’
그게 제삼자가 봤을 때의 생각이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적어도 이 둘은 눈앞의 광기 넘치는 흑마법사를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쿤엘이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우린 시급하게 움직여야 한다. 주검의 영광을 위해서, 노사를 위해서이기도 하나…… 그것이 가져올 위험은 쉬이 가늠할 수 없으니.”
죽음과 마력의 집합체.
생기 넘치는 지면에 박으면 며칠 내에 죽음의 땅으로 변모시키며, 지니는 것만으로도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는 기물이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이거였다.
“그게 자칫 상위 언데드의 손에 들어간다면, 노사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큰 출혈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죽음의 기사가 사령의 보주를 줍는다면 더욱 강대해진다.
그걸 토벌하거나 뜻대로 조종하는 건, 흑마법로서 자부심이 가득한 쿤엘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 그 전에 사령의 보주를 회수해야 한다. 더 이유가 필요한가?”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쿤엘이 해골이 걸린 스태프를 두들기며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들어갔다.
그 뒤를 카르잔과 다니엘이 따랐다.
이윽고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동굴 아래에 있는 잿빛 마법사.
그들과 같은 목적을 가진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말이다.
* * *
사령의 보주.
그것이 주변에 죽음을 흩뿌리며 굴러떨어졌다.
급격한 경사를 넘어 비스듬하게 기운 지면에 다다랐다.
그 소리와 기운에 이끌린 동굴의 거주민들이 손을 내밀었으나 누구도 이를 견디는 존재는 없었다.
죽거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로 변모했다.
그렇게 튕겨 나간 보주는 통로를 벗어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수한 벌레 무리를 넘어 어둠 속에 떨어졌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의 손이 닿을 장소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다시금 굴러간 사령의 보주가 마침내 멈춰 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나지막이 비추는 보라색 빛.
그 앞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사령의 보주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이미 죽어 있으니까.
전신을 휩싸는 죽음의 기운.
텅 빈 두개골 안에서 보라색 빛이 명멸했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티…… 리아…… 왕국…….]
그 음성에는 짙은 증오심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