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령의 보주 (1)
칼리아에게 용건이 있다는 건 아마 의뢰겠지.
서둘러 와 달라고 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고액의 의뢰라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베르덴은 곧장 채비를 마쳤다.
장소는 칼리아의 저택이 아닌 라인즈의 교회.
신분 검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칼리아를 찾았다. 기사단장 베스페와 함께 있던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았을 텐데 벌써 왔나?”
“그리 먼 거리는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이틀 만에 올 거리는 아닌데.
연락이 닿자마자 출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 그래. 다른 게 아니라 너와 올빼미가 데려온 그 마법사에 대한 얘기다. 며칠 전 그자가 깨어났거든.”
루아스교의 주교와 여러 성직자가 갖은 노력을 한 끝에 겨우 살려 냈다.
감염이나 염증은 쉽게 치료할 수 있었지만 몸을 썩게 하는 저주를 풀어 내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마저도 완전히 해주하지 못하고 신성력으로 저주의 증상을 완화했을 뿐이었다.
“그 탓에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더군.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픽 기절해 버리니.”
그래도 시간을 들인 결과, 중요한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저번에 네가 그랬었지, 저 마법사는 뭔지 모를 흑마법사 집단의 배신자라고. 그런데 배신자 같은 게 아니었더군.”
칼리아가 베르덴의 눈을 바라봤다.
“마법사. 아니, 저 흑마법사는 마탑의 일원이다. 다크워튼에서 파견된 사람이지.”
다크워튼, 흑마법사의 마탑.
그걸 듣는 순간 베르덴이 정보를 조합했다.
다크워튼과 조합의 흑마법사와의 관계.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흑마법사가 마탑의 첩자라는 뜻입니까?”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그의 이름은 워렌스.
3위계 하위의 흑마법사로, 그가 맡은 임무는 각종 범죄에 가담하는 흑마법사에 대한 조사.
그 후 마탑에 보고하여 그들을 처단토록 하는 것이다.
‘들어 본 적이 있다.’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은 옛날보다 나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긍정으로 돌아선 건 아니다.
흑마법 특성도 그렇지만 조합의 흑마법사만 봐도 그들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다수 산재해 있었으니까.
그걸 없애기 위해 다크워튼에서 직접 사악한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토벌한다고.
“거짓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당장 마탑에 직접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정황상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내게 준 정보가 꽤나 신빙성이 있었거든.”
워렌스는 며칠에 걸쳐 칼리아에게 조합, 정확히 3왕자와 손을 잡은 흑마법사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집단의 이름까지도.
“이름?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렇다더군. 확실히 흑마법사 모임 같은 건 아닌 모양이야. 워렌스가 말하길, 스스로를 ‘주검의 영광’이라 부른다고 하던데.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나?”
주검의 영광.
베르덴의 뇌리에 한 기억이 스쳤다.
──위대한 주검에 무한한 영광을!
마일드륀의 흑마법사가 죽기 직전 외쳤던 문장. 여기서 곁가지를 떼 내면 주검의 영광이 된다.
당연히 우연일 리가 없다.
다만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정체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었으니까.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입니다.”
“나도 그렇다. 어쩌면 해외에서 기어 들어온 놈들일지도 모르지. 뭐, 어쨌든.”
칼리아가 가볍게 손을 풀었다.
“중요한 건 이거다. 워렌스를 통해, 주검의 영광이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를 알아냈다는 것.”
은신처?
“네가 말했던 사령의 보주가 만들어진 장소라더군. 그래서 나는 놈들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너를 부른 이유가 바로 그거지.”
“토벌대에 합류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나는 돈이 아깝다고 쓸 수 있는 전력을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거든.”
명확한 의뢰다.
보수가 상당하겠지. 칼리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었다.
주검의 영광이 가진 목적.
사령의 보주의 정체 그리고 위치까지.
그런 베르덴의 물음에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모른다. 아직 묻지 못했으니까.”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칼리아 님, 그자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마침 시간이 맞았군.
미소를 지은 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따라와라, 애셔.”
* * *
새하얀 침상에 누워 있는 흑마법사, 워렌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손목과 발목이 신성력이 깃든 족쇄로 묶여 있었는데, 그의 두 눈은 초점이 맞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본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가 가능한 겁니까?”
“아직은. 기상 직후에는 항상 이렇거든. 조금 있으면 말이 통할 정도로 정신을 차릴 거다.”
그만큼 저주가 강력했다는 뜻이다.
육신이 썩어 가는 건 막았어도 그 반작용으로 반시체가 되니.
대체 누가 저주를 걸었길래 주교급 인사가 해주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저주가 모종의 마법 물품이 아닌, 흑마법사로부터 기인했다면 절대 얕볼 상대는 아니라는 것.
잠시 후, 칼리아의 말대로 워렌스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얕은 기침을 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덴과 시선을 마주치자, 워렌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모, 못 보던 분이시군요.”
“마법사 애셔. 너를 구해 교회에 데려다준 장본인이지. 말 그대로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겠군.”
아, 워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좋지 않다.
침에 뒤섞인 핏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워렌스가 수건으로 간신히 입가를 닦아 냈다.
상체를 일으킨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혈기가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저주로 인해 장기 일부가 손상되어 이렇습니다. 다행히 제 목숨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요.”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이제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칼리아가 저번에 다 하지 못한 질문을 연장해서 물었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바라 본론으로 들어가지. 저번에 했던 대화에 대해 기억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니까요.”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묻겠다. 주검의 영광의 목적은 뭐지?”
워렌스가 작게 신음했다.
“저도 약 2년간 그들 사이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말단으로서 지냈을 뿐이라 수뇌부조차 아주 멀찍이서 본 게 전부입니다.”
“수뇌부?”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인과 노인이라.
“이름이나 생김새는 모르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터라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왕국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마 사령의 보주와 관계가 있겠지?”
칼리아의 말에 워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의 보주.
그것은 사기(死氣)와 마력의 덩어리며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방을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아주 위험한 물건이다.
거기다 그 위에는 강력한 저주까지 덧씌워져 있었다. 3위계 흑마법사가 손을 댔다간 그대로 즉사할 정도.
다만 워렌스는 마탑의 마법 물품으로 저주를 해제했으며 사령의 보주가 가진 기운을 일부 무력화할 수 있었기에 살 수 있었다.
그래도 죽을 뻔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들이 사령의 보주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강력한 언데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죠.”
“어떤 언데드를 말하는 거지?”
“모릅니다. 다만 저 따위가 감히 가늠할 게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시킨 언데드의 지휘권을 3왕자에게 넘길 거라고 합니다.”
바로 왕위 계승을 위해서.
칼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권력을 위해서 언데드를 왕국에 들이려 하다니. 그것도 왕가에 속한 작자가.
그녀는 표정으로 3왕자에 대한 혐오를 보란 듯이 드러냈다.
“……그 사령의 보주는 어디에 있지?”
“본래 마탑으로 가져갈 생각이었으나 비행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에 끈질긴 추적까지 붙은 탓에…….”
워렌스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쟈이언 숲 중심부에 있는,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던져 버렸습니다.”
“뭐?”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왕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장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령의 보주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땅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는 건 왕국에 언데드가…….”
“무책임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일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쿨럭, 쿨럭!
피를 토해 낸 워렌스가 침대에 쓰러졌다. 시간이 된 것이다.
서서히 감기기 시작하는 눈. 그가 의식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
“만약, 만약 사령의 보주가 사용되면 왕국에 먹구름이 드리울 겁니다……!”
그게 워렌스가 마탑이 아닌 칼리아에게 주저 없이 정보를 준 이유였다.
그는 칼리아를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유명했으니까. 특히나 왕국에 만연한 악인들을 처단하는 올곧은 귀족으로서.
그렇기에 숨기지 않았다.
사악한 흑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 물건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니. 워렌스는 지푸라기도 잡는 듯한 심정이었다.
사령의 보주.
주검의 영광이 다시 손에 넣기 전에 반드시 정화해야 한다.
반드시.
그가 거친 숨을 헐떡였다.
“반드시…… 막아야…….”
워렌스는 그 말을 남기고 정신을 잃었다.
* * *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칼리아는 기절한 워렌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있던 기사단장 베스파가 단호히 말했다.
“칼리아 님, 안 됩니다.”
“……뭐가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향하시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 위험성에 대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도 알고 있다, 베스파. 그리고 애초에 나는 라인즈를 벗어나지 못해. 아버지에게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건 너도 알지 않나.”
칼리아의 행동은 옳았다.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을 급슴함으로써 그들의 부정을 밝혔고, 노예로 팔릴 사람들을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독단적이기도 했다.
칼리아는 멋대로 후작가의 가보를 훔쳐 사용했으니까. 그로 인해 두 달 정도 근신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던 터라 칼리아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와중에 베르덴이 물었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 뭡니까?”
“응? 그 유명한 장소를 모르나? 아, 하긴. 타국에서 왔다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군.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은 에스티리아 왕국의 2대 금지 중 하나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A Cave Without Light).
동부 늪지대와 같은 반열에 있는 금지(禁地)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동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동굴들이겠지.
“수백 개의 동굴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 기이한 장소다. 통로도 무수하고 규모가 엄청난 만큼…… 깊게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지.”
동굴 속에 서식하는 괴이한 이형종들.
빛 한 점 닿지 않는 지하는 그야말로 공포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특이한 소재를 좋아하는 모험가들조차 극도로 기피하는 장소일 정도.
“이거 참, 어렵게 됐군.”
칼리아가 턱을 짚었다.
“그 동굴의 입구들은 대부분 경사가 져서 보주 같은 건 어딘가로 굴러 떨어졌을 거다. 위험을 각오하고 기사단을 투입해 수색을 해봤자 별 성과는 없겠지.”
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칼리아는 기사들을 끔찍이 아낀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기사단만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만약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언데드가 들끓게 된다면.
그 수많은 통로에서 사체들이 터져 나온다면 걷잡을 수 없다.
적어도 그 주변에 있는 도시나 마을은 끝장일 테니.
‘어떻게 한다.’
칼리아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적합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단순히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칼리아의 명령이라도 다짜고짜 사지로 들어가서, 손대는 것조차 위험한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면 누가 가겠는가.
기사단 외,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칼리아에게 충성하는 자는 없었다.
그때였다.
“사령의 보주는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난데없이 베르덴이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