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경매장 목록
베르덴이 패드렐드를 따라 그의 창고로 향했다.
도중에 수십 명의 밀수꾼을 지나쳤으나 함정이나 습격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는 느껴졌지만 밀매상이 같이 있는 걸 보더니 전부 제 갈 길을 갔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이윽고 반원 형태의 문 앞에 도착했다.
“찾으시는 물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패드렐드가 네 개의 열쇠를 꺼내더니, 순서대로 열쇠 구멍에 꽂아 넣었다.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하는 잠금 장치. 별다른 마법적 보호를 받는 건 아닌 모양이나,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에다가 두께가 상당한 게 물리적으론 파괴하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대규모로 지형 조작이 가능한 베르덴에겐 아니었지만.
패드렐드를 따라 창고로 들어섰다.
주위에 산적한 잡동사니들. 그 중심에 먼지가 거의 쌓여 있지 않은 마차가 있었다.
“이게 홀로든의 마차인가?”
“그렇습니다. 대충 확인만 하고 내용물은 아직 옮기지 않았죠. 그리고 광석 탐지기는 마차 뒤에 있는 궤짝에 들어 있습니다.”
패드렐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밀매상답게 눈치가 빨랐다.
마력감지를 펼쳐서 확인해 보니 마차 주변에 별다른 함정은 없었다.
“메랄드의 검은 어디에 있지?”
“검이요? 그거야 저기 안쪽에 던져 놨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베르덴은 패드렐드의 손님. 당연히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잠시 기다리시죠.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밀매상이 창고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동안 베르덴은 궤짝을 확인했다.
입방체 형태의 광석 탐지기.
‘나름 유명한 마법 물품이라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가볍게 버튼을 누르자 입방체에서 미세한 마력의 광선이 주변을 조사(照射)했다.
이런 식으로 주변 지형을 분석해 광석의 분포도를 확인하는 모양.
‘그나저나, 공간가방에 들어갈 크기는 아니군.’
말에 실을 무게도 아니다.
지형을 띄워 옮길 수는 있지만…… 상당히 번거롭겠지.
쉽게 가려면 마차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침 홀로든의 마차가 눈앞에 있었다. 그 안에는 밀봉된 나무 상자가 가득했는데, 끝자락에 있는 상자가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밀수꾼이 확인한 건가?’
슬쩍 확인해 보자, 새하얀 가루가 담긴 봉지들이 보였다.
“이건…….”
“여기 가져왔습니다.”
패드렐드가 메랄드의 검을 가져왔다. 베르덴이 상자에서 시선을 떼었다.
검을 받고 날을 확인했다. 사실 눈으로 봐선 이게 다마스 강철이 2할가량 들어간, 메랄드의 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피 냄새는 남아 있다.
메랄드를 제압하는 도중에 패드렐드의 부하가 죽거나 다쳤다고 했으니 그때 묻은 거겠지.
더군다나 가짜 검을 내줄 이유도 없으니 진짜일 터.
베르덴이 검을 공간가방에 수납했다.
“이제 용건은 다…….”
“저 상자 안에 있는 것, 혹시 마약인가?”
“아, 예. 맞습니다. 홀로든이 가져온 건데, 몸을 나른하게 해 주는 효과로, 주로 진통제로 쓰이는 겁니다.”
망명하는데 굳이 마약을 챙긴다고?
그렇게 묻자 패드렐드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현재 미들로스 자치령에 아인종이 들끓고 있어서, 교회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상자가 많다더군요. 그래서 요즘 자치령에서 저 마약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당연히 값도 올라갔다.
“홀로든은 자치령에서 마약 장사를 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도망가는 도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상회 출신답긴 하군요. 뭐, 지금은 죽었지만.”
패드렐드가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용건이 없으시다면 바깥으로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이 마차, 내가 가져가도 되나?”
마약은 필요 없다.
베르덴은 도적이 아닌 데다가 마약상도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런 잡범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차만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부하들을 불러 짐을 내려 드리죠.”
“그건 내가 하지.”
<염동력>
베르덴이 손짓하자 마약이 담긴 상자들이 바깥으로 차곡차곡 옮겨졌다.
순식간에 마차 안이 텅 비어 버렸다.
이제 아세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패드렐드는 베르덴이 떠난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
“그리고 말 한 필도 줬으면 좋겠는데.”
마차가 꽤 커서 최소 두 마리는 필요해 보이니까.
베르덴의 요구에 패드렐드가 미소 지었다. 등 뒤로 숨긴 주먹을 꽉 쥐면서.
“바로 준비해 드리죠.”
손놈, 아니 손님.
* * *
베르덴이 무사히 의뢰 품목들을 전달했다.
클란드는 그 자리에서 목걸이와 탐지기가 진품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메랄드의 검은 슬쩍 보고는 구석에 던졌고.
이내 클란드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네, 애셔. 아주 제대로 가져왔군.”
“보수는 어디 있습니까?”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다 준비해 두었네.”
클란드가 보수를 건넸다.
하나는 4억 엘크 상당의 현금 다발이 담긴 가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봉투 안에 담긴 경매장의 목록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 줄 테니 경매장의 목록은 여기서 확인해 주게. 혹여 다른 자들의 귀에 들어가면 매우 매우 곤란해지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좋아. 다 보고 나면 문을 두들겨 주게.”
클란드가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베르덴이 봉투를 집었다.
‘암흑가 경매장에는 어떤 물건들이 나올까.’
내심 기대감을 품으며 천천히 봉투의 봉인을 뜯어 냈다.
* * *
암흑가 경매장에 올라오는 상품들의 가치는 평균 억 단위.
운 좋게 초청권을 구한다 해도 원하는 물건을 구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돈이 많다고 해도 다른 참가자들과 경쟁을 해서 이겨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잘못하면 본래 기댓값보다도 훨씬 비싸게 물건을 사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클란드가 준 목록에는 각종 상품들과 그 내력 그리고 상품의 시작가와 기댓값에 대해 적혀 있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군.’
마탑의 마법사라 해도 눈독을 들일 정도로 희귀한 마법 물품이 다수 존재한다.
당연히 일반적인 것들과는 자릿수가 다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아티팩트 [마녀의 가시 왕관].
오로지 여성만 착용이 가능하며, 착용 시 마력이 변질되어 일시적으로 특수한 마력 형질을 갖게 된다.
효과는 마법사별로 천차만별.
다만 부작용도 존재한다.
장시간 착용 시 서서히 이지(理智)를 상실하며 변질된 마력회로가 뒤틀려 끝내 폭주해 사망한다. 남자가 착용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라고 적혀 있다.
‘상당히 위험한 아티팩트군.’
어쨌든 아티팩트는 아티팩트다.
시작가는 무려 45억 엘크, 기댓값은 78억 엘크로 경매장 내 최고가.
최고위 귀족이거나 왕족 수준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다.
‘내가 살 건 아니니 알 바는 아니지만.’
다시 목록을 읽어 내려갔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베르덴에게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
유혹을 견뎌 내고 추리고 추렸다.
“……이 정도면 되겠군.”
고민 끝에 선택한 건 총 세 가지.
첫째, [메이벨의 귀걸이].
효과는 원소 마법 범위 향상(중상) 그리고 일체화로, 총 두 가지다.
한마디로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마법 물품이라는 뜻이다.
‘심플한 효과지만 그렇기에 강력하다.’
중상급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등급이다.
더군다나 범위가 확장된다는 건 광범위한 마법에 특화, 즉 베르덴의 장점을 더 강화할 수 있다는 뜻.
마력 소비량이 더 늘긴 하겠으나 신경 쓸 거리도 되지 못했다.
시작가는 5억 엘크, 기댓값은 8억 엘크.
그리고 두 번째, [뇌익의 아뮬렛].
전격 계열 마법을 전반적으로 강화하는 부적. 다른 액세서리에 장착하는 것으로 활성화된다.
당연히 마법서 수준만큼은 아니나 고위 속성과 연관된 마법 물품이기에 가치가 상당하다.
시작가는 8억 엘크, 기댓값은 12억 엘크.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중력 마법 서적 세트].
상권과 하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자에는 이론, 후자에는 실질적인 위계 마법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전격 계열이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고위 속성이라면, 중력 계열은 물리력에 특화된 고위 속성.
원소 마법이 주류인 보헤미른 마탑과 별로 연관이 있는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그 범용성은 전격 계열 마법 이상이니까.’
다만 문제는 이거다.
중력 계열 마법을 깨우칠 수 있을지, 없을지.
고위 속성에 적합한 마력회로를 가진 자도 드문데, 고위 속성 두 가지를 다룬다는 건 당연하게도 그 이상이다.
그러나 베르덴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상식적인 한계는 어디까지나 다른 마법사에게나 통용될 뿐.
역천을 이룬 베르덴에게 한계란 없었다.
베르덴이 [중력 마법 서적 세트]의 가격을 봤다.
시작가는 12억 엘크, 기댓값은 18억 엘크.
생각보다 가격이 높지는 않은데 이건 이유가 있었다.
고위 속성이라고 해도 배울 수 있는 자가 소수니 쓸데가 별로 없는 게 이유.
기껏해야 수집품이나 관상용으로 끝나겠지. 그래서 천문학적으로 가격이 높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세상에 중력 마법 서적이 저것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위 세 가지 물건을 손에 넣으려면 최소 25억 엘크.’
기댓값으로 치면 38억 엘크는 있어야 한다.
아주 안전하게 입찰을 하려면 45억 엘크 정도는 필요하겠지.
그런데 돈이 부족하다.
유물 탐사단에게 줄 보수를 제외한다면, 당장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은 약 8억 엘크. 최대한 끌어모은다 해도 역부족이다.
‘다른 건 몰라도 중력 마법 서적은 손에 넣어야 하는데.’
경매장까지 남은 기간은 약 50일 정도.
그 안에 최대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적어도 18억…… 아니, 20억 엘크는.
똑똑.
베르덴이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클란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 예상보다 일찍 불렀군. 고민하느라 날밤을 샐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뭘 노릴지 정한 모양이군.”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클란드에게 경매장 목록을 건넸다.
“이 자리에서 태워 주게.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 말이야.”
“그러죠.”
화르륵.
손끝에서 흘러나온 불꽃이 목록을 완전히 태워 버렸다. 어차피 목록 안에 있는 건 전부 외웠으니 상관없었다.
“그럼 잘 가게. 부디 원하는 걸 얻었으면 좋겠군.”
클란드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베르덴은 어두워진 밤거리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여유만 있다면 언젠간 필요한 돈을 전부 마련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쉬운 일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어렵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손 놓을 생각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곧 목표로 나아가는 길이니까.
결심한 베르덴.
그의 눈빛에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 * *
베르덴은 악착같이 움직였다.
지난 시간 동안 처리한 의뢰만 십수 개. 벌어들인 수익도 시간 대비 압도적이었다. 그가 이룬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피곤이 몰려옴에도 훈련을 게을리하긴커녕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다.
성장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발걸음.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언젠가 중요한 한 걸음이 되는 법이다.
베르덴은 그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 감각은…….’
마력회로를 관조했다.
마탑의 동력원 앞에서 잠시나마 경험한 5위계의 격.
지금 그때의 감각이 어렴풋이 느껴지고 있었다. 완전하지 않으나 흐릿하게 보이던 벽이 분명하게 보였다.
이제 고작 한 걸음.
지금까지처럼 훈련을 지속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두 달 이내에 다다를 수 있다. 아니면 그에 필적하는 어떠한 계기가 있거나.
뭐가 됐든 머지않아 4위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베르덴은 확신했다.
너무도 순조롭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페르네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의, 의뢰가 없는데요……?”
……의뢰가 부족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잘한 의뢰는 충분히 있지만 베르덴의 구미가 당길 정도인, 고액의 의뢰는 거의 씨가 말랐다.
베르덴의 의뢰 수행 능력에 공급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페르네도 최선을 다하긴 했으나 그의 상황에 딱 알맞은 의뢰를 몇 번이나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거 곤란한데.’
경매의 시작까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돈이 부족하다.
이래서야 암흑가 경매장에서 허탕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결말을 베르덴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희소식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어? 애셔 님, 칼리아 님이 서둘러 라인즈로 와 달라고 하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