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암상인 (2)
아세른의 시장이자 영주인 도호네크 백작.
세간에 그는 거만한 귀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누구에게나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가 두툼하게 올라온 볼살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 이보게, 클란드.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잘못하면 내 목도 날아갈 수가 있단 말이네.”
“죄송하지만 저 또한 사정이 있는 터라…….”
중절모를 쓰고 턱 하관에 화상 흉터가 있는 사내, 클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백작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럼에도 백작은 뭐라 윽박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클란드였으니까.
“저도 마음 같아서는 백작 각하를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현재 칼리아로 인해 이 바닥이 얼마나 어지러워졌는지. 어설프게 손을 거들었다간 저도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도호네크 백작은 조합의 뒤를 봐주던 귀족은 아니었다. 3왕자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 또한 에스티리아 왕국의 귀족이다. 평균적으로 적당히 썩어 빠진.
불법 노예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해도, 탈세는 기본으로 제 배를 채우기 위한 각종 범법 행위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그런 와중에 백강 칼리아가 일을 터뜨렸다.
갑자기 플리쉬르 백작 별장을 급습하면서 불법 노예를 확인한 것이다. 밀수도 마약도 마찬가지.
다른 건 몰라도 국민을 납치해 불법 노예로 만든 것은, 그 올곧은 에스퍼렌사 후작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제 발로 조합을 탈탈 터는 데 일조했고, 3왕자와 경쟁 관계인 2왕자와 1왕자마저 보란 듯이 그들을 물어뜯고 있다.
거기다 루아스교까지 격분해 돕고 있는 상황.
‘재수 없으면 나도 쓸려 나간다.’
흔적을 지우고,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죽여야 한다.
그렇기에 클란드가 필요하다. 도호네크 백작의 불안감을 씻어 줄 수 있는 건 눈앞의 암상인밖에 없었다.
백작이 자신의 무릎을 꽉 잡았다.
차마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습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자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워낙 위험한 터라…… 흐음. 본래라면 거절해야 하는데 백작 각하와 알고 지낸 시간이 있어 단호히 말씀드리기가 영 어렵군요.”
“그렇다면…….”
백작의 얼굴이 화색이 피었다.
저건 결코 거절의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그때, 클란드가 네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단가의 네 배. 그 정도는 받아야 수지 타산이 맞을 것 같습니다.”
“네, 네 배?”
터무니없는 액수다.
저걸 지불하려면 백작 또한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그건 싫었다.
어떻게든 금액을 줄이기 위해 백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단 한 푼도 깎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목숨을 걸고 제안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의견이 맞지 않으니…….”
클란드가 운을 띄웠다.
조건을 받지 않는다면 당장 자리를 떠나겠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를 보는 건 백작뿐이었으니.
“……아, 알겠네.”
결국 도호네크 백작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현금을 지불했다.
돈을 챙기고 유유히 백작의 자택을 빠져나가는 클란드. 그의 얼굴에는 조소가 머물러 있었다.
‘백작이라는 자가 저리도 강단이 없어서야.’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책잡힐 일은 하지 않으면 되었을 텐데.
소시민이 귀족 위를 세습받는다면 저렇게 되는 거겠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세른의 가도를 거닐던 클란드가 낡은 상점에 들어갔다.
이곳은 각 도시마다 있는 클란드의 거래소. 중절모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자, 상점의 주인이 다가왔다.
“클란드 씨, 손님이 왔습니다.”
클란드는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클란드를 찾아왔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자거나 또는 이미 약속을 잡은 사람뿐.
그런 그에게는 최근 약속을 잡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페르네.
클란드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 놓인 고급 카스테라와 따뜻한 블랙커피. 그 앞에는 벽안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를 본 클란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유명인이 찾아오셨군.”
* * *
왼쪽 턱과 목에 걸친 화상 흉터.
회색 머리카락이 사이사이 자리 잡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중년의 사내, 암상인 클란드.
페르네가 귀띔해 주었던 외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유명인?”
“그래, 유명인.”
클란드가 베르덴 앞에 마주 앉았다.
“조합과 척을 지고 몰락하기 직전이었던 정보상 페르네의 구세주. 그리고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독녀, 백강 칼리아를 이 바닥에 끌어들여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 중 하나.”
아직 끝이 아니다.
“그 외에도 고위 속성을 다루는 4위계 마법사 등등. 이렇게 눈길을 끌 만한 소문이 많은데 이게 유명인이 아니고 뭐겠나? 아, 고맙네.”
상점 주인이 다과를 가져왔다.
클란드가 밀크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거기다 외모까지 좋다고 들었지. 이거야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니 그러려니 했는데…… 확실히 그런 소문이 돌 정도긴 하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나?”
“말해야 합니까?”
“아니. 이 바닥만큼 나이가 상관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그냥 초면이니 분위기를 풀어 볼 겸 물어본 걸세.”
클란드의 말투는 유창했다.
순식간에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 나가는 것만 봐도 노련한 사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클란드가 포크로 카스텔라를 자르곤 콕 찍었다.
“그럼 적당히 어색한 것도 풀린 거 같으니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 볼까? 안 그래도 누가 흙탕물이었던 이 바닥을 아예 구정물 수준으로 어지럽혀 준 덕분에 내가 많이 바빠져서 말이야.”
“그러시죠.”
“좋네. 그럼 경매장 건부터 시작하지.”
그가 카스텔라를 쏙 입에 넣었다.
적당히 단맛을 즐기고 목 뒤로 넘겼다.
“사실 페르네에게 암흑가 경매장 목록을 거래하자고 연락을 받았을 땐 정신이 나가 버린 건 줄 알았네. 나보고 죽고 싶냐고 물어본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거래로 제시했더군. 아주 페르네다웠어. 내가 비밀리에 찾고 있던 걸 아무렇지 않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먼저 정보를 손에 넣다니……. 솔직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클란드가 포크를 내려놓고, 베르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실물을 접하기 전까지는 믿을 순 없지. 그러니 먼저 봐도 되겠나?”
“경매장 목록은…….”
“내가 찾는 정보가 맞다면 주도록 하겠네, 반드시.”
이 거래의 행방은 클란드의 의향에 달려 있다. 어차피 보여 줄 생각이었으니 괜히 힘을 뺄 이유는 없다.
베르덴이 봉인된 서류 봉투를 건넸다.
클란드가 곧장 입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종이 뭉치.
클란드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마치 슬픈 듯 기쁜 듯.
“그래…… 그랬군. 머리가 반쯤 태워진 채 빈민가에 버려졌었나. 그래서 내가 그토록 애를 써도 찾지 못했던 거야. 애초에 내가 기억하는 외모와 전혀 다를 테니까……. 잘도, 잘도 살아 있었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껄껄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확실히 진짜로군. 역시 페르네야. 아니, 거의 죽다 살아나더니 더 대단해진 모양이군. 그래, 이거라면 충분히 거래가 가능하지.”
클란드가 서류를 품속에 보관했다. 아주 소중하게.
“며칠 뒤에 경매장 목록을 준비해 두겠네. 작성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말이야. 그때까지는 아세른에 머물 생각이니까, 먹고 도망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접어 둬도 좋을 걸세. 뭐, 어차피 도주해 봤자 페르네의 정보망에 걸릴 테지만 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이제 의뢰만 남았군. 마침 애셔, 자네에게 어울릴 만한 고액의 의뢰가 있네.”
베르덴이 물었다.
“보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내용 말고 보수부터 물어보는 건가? 대단한 자신감이군.”
클란드가 네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수는 4억 엘크. 의뢰 내용은 물건 세 개를 가져오는 것인데 자네하고도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지. 조합과 관련된 거거든.”
첫 번째, [광석 탐지기(강철)].
이름 그대로 광석을 탐지하는 마법 물품 시리즈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강철 광석만을 탐지하는 희귀한 물건이다.
일정 길이 이상의 갱도에 하루 동안 넣어 두면 주변 지형을 자동으로 분석해 강철 광석의 전체적인 분포도를 보여 준다.
즉, 갱도의 가치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플리쉬르 백작 별장에서 조합의 운영자 중 하나이자, 땅거미 상회의 주인인 베켄이 검거되었다는 건 들었겠지? 그로 인해 상회가 풍비박산이 났지. 상회의 간부들도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다니고 있고. 광석 탐지기는 바로 그 간부 중 하나가 가지고 있네.”
그리고 두 번째, [블루 다이아몬드 네클리스].
단순한 장식품이지만 최근 블루 다이아몬드에 대한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지금 상황에 구매자만 잘 찾는다면 평소의 배 이상은 받을 수 있을 터.
“이건 나폴드 남작의 가보로, 수십 년간 플리쉬르 백작의 봉신 가문으로 있으면서 받은 보석 목걸인데, 이번 사태로 인해 플리쉬르 백작과 관련된 귀족이 싸그리 박살이 나고 있네. 워낙 더러운 귀족들이라 수사망을 벗어날 껀덕지도 없지.”
귀족과 상회의 몰락.
베르덴은 칼리아가 가진 영향력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손을 씀으로써, 정확히는 베르덴과 페르네가 그녀를 끌어들이면서 왕국이 밑바닥부터 뒤집히고 있는 셈이었지 않은가.
‘마치 순식간에 커져 나가는 눈덩이를 보는 것 같군.’
뭐, 환영할 만한 일이다.
눈덩이가 얼마나 커지든 얻어맞는 건 베르덴이 아니라, 그에게 방해가 될 자들이었으니까.
“그 목걸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남작 휘하에 있던 기사 하나가 가지고 튀었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물건인데, 방금 말했던 기사의 검을 가져오는 걸세.”
“검? 마법 물품입니까?”
“다마스 강철이 2할 정도 첨가된 검이네. 다른 두 개에 비해 귀한 건 절대 아니지. 사실 내가 그놈에게 빚진 게 있거든.”
빚이라.
“지금이야 기사로 있지만, 놈은 몇 년 전까지 암흑가에서 놀던 쓰레기일세. 나에게서 물건을 도둑질하려고 수를 쓴 놈들 중의 하나지. 물론 실패했지만.”
클란드가 코웃음을 쳤다.
“딱히 죽일 필요는 없네. 그놈이 애지중지하는 검 하나면 충분해. 목걸이를 회수할 겸 가져와 줬으면 좋겠군.”
물건 세 개를 가져오는 데 4억 엘크.
두 사람만 찾으면 끝나는 간단한 의뢰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란 건 자명하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주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클란드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마침 한자리에 모였으니.”
“……?”
“밀매상 패드렐드라고, 그자를 거쳐 간 불법 이민자의 숫자만 네 자릿수에 달하는데, 마침 위에 언급한 두 사람이 패드렐드를 통해 왕국을 벗어나려 한다는군.”
정보의 출처는 바로 패드렐드 본인.
뒷돈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끈 떨어진 연 신세인 상회의 간부와 남작의 기사에 대한 정보는 더더욱.
“그럼 여기서 자네는 의문을 갖겠지. 위치도 알고 있는데 왜 4억 엘크나 되는 보수가 붙었나? 간단한 이유일세. 패드렐드가 정보를 판 건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거든.”
조합의 가세가 기울며 사방에 피와 살점을 뚝뚝 흘리니 당연히 물어뜯으려는 짐승이 몰리는 법.
조합에 원한을 가진 자들은 한둘이 아닌 데다가, 놈들은 온갖 귀중품을 가지고 도주할 테니 그야말로 맛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그럼 저는 밀수꾼들과 그 짐승들을 뚫고 물건을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그렇네. 숫자만 따지면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자네가 소문대로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비교적 쉬운 의뢰가 될 수도 있을 걸세.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이 이 바닥의 생리이니까.”
클란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때, 받을 건가? 자네가 돌아올 때쯤엔, 나도 보수와 경매장 목록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 서로 교환을 하면 깔끔할 것 같은데.”
고민할 것도 없었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스리티아 왕국의 국경 근처.
말을 타고 절벽 위에 올라서 있던 베르덴이 저 멀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룬의 반지, 엑시드로 강화되어 있는 시야에, 산맥 사이에 가려져 있는 협곡이 보였다.
두꺼운 가죽 털옷을 입은 자들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저자들이 패드렐드의 밀수꾼들인가.’
잠시 후, 여러 대의 마차가 접근하더니 안에서 무장을 한 인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밀수꾼들과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협곡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분명 클란드가 말한 짐승들일 터.
‘여유를 부렸다간 늦을지도 모르겠군.’
베르덴이 말에서 내렸다.
지형을 조작해 만든 돌기둥에 고삐를 단단히 묶었다.
<투명화>
희미해지는 기척과 모습.
이내 하늘로 날아오른 베르덴이 밀수꾼의 협곡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