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유물 탐사단 (1)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은 이십 년이 넘게 운영되어 왔다.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한차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공급이 어려워진 만큼 불법 노예에 대한 수요가 폭등했으니까.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인당 수백만에서 수천만 엘크의 가치로 바뀌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당연하게도 그런 플리쉬르 백작 별장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평범한 병사로 위장한 용병들이 철저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때때로 조합 소속 상회들의 마차들이 오갔다.
이곳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건 백작의 보좌관, 멜베스 자작.
그는 조합의 운영자, 땅거미 상회의 베켄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애셔라는 놈을 처리하지 못했다고?”
베켄이 침을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올랜드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올랜드는 이미 페르네에게 붙었다.
그 사실을 조합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정보 교란의 무서움이었다.
“하아…….”
자작이 미간을 문질렀다.
“지금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 알고는 있겠지? 안 그래도 3왕자께서 자금을 마련하라고 하셔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사소한 일로 왜 계속 내 신경을 긁는 거지?”
“빠른 시일 내에 조치를…….”
“뭐?”
자작이 책상 밑으로 베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빠른 시일? 지금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당장 코앞에 암흑가와의 거래가 예정되어 있어서 바빠 죽겠는데 나보고 또 신경을 쓰라고? 요즘 들어 배가 부르더니 행동이 굼떠졌군, 베켄.”
베켄이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조합의 운영자라고 하지만 귀족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한바탕 화를 토해 낸 자작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흘. 어떻게 해서든 나흘 안에 처리해라. 죽이든 회유하든.”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페르네란 정보상도 근시일 내에 조합에 편입시켜라. 잡아서 굶주린 노예들에게 던져 주거나 고문을 해서라도 말이야. 알겠나?”
베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자작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만 나가서 판매할 노예들이나 정리하도록.”
베켄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작이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다가섰다.
‘그간의 정을 봐서 조합의 운영자로 앉혀 놨더니 일 처리를 그따위로…….’
쯧, 아무래도 조만간 운영자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최근 몇 상회가 이런저런 선물들을 보내 줬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되겠지.
자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그때, 별장의 정문에 인파가 몰려 있는 걸 목격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유심히 살펴봤다.
‘기사? 아니, 저 문양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생각이 날 듯 말 듯.
그러다 이내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병사들이 미처 보고하기도 전에, 자작이 먼저 저택 밖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정문에 도착하자 검붉은 머리칼의 여기사가 자작을 말 위에서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멜베스 자작.”
백강 칼리아.
현 시점에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인물이 찾아왔다.
‘이런 X발……!’
자작이 목젖까지 치솟은 욕을 겨우 삼키며 표정을 관리했다.
“아, 아니,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영애께서 여긴 어쩐 일로…….”
“실례했습니다. 이곳 플리쉬르 백작령에 도적단이 출몰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도적단?
자작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칼리아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상당히 악랄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어찌나 각종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자작께서도 알다시피 수년 전에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무리는 겁도 없이 불법 노예를 매매한다더군요.”
자작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반응에 칼리아가 미소를 지었고, 그와 동시에 별장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래, 그것이 신호였다.
칼리아가 검을 뽑자 그녀에 뒤에 있던 백결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멜베스 자작을 겨냥한 새하얀 도신의 검 끝. 이내 서늘한 목소리가 자작의 숨통을 옥죄었다.
“할 말은 있는가, 멜베스 자작?”
백강 칼리아.
그녀에게는 회유도 뭣도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토록 적의를 드러내며 칼을 겨냥한다는 건 이미 확신을 하고 있다는 뜻.
그렇다고 죽여서 입을 닫을 수도 없다. 백결 기사단과 칼리아의 실력은 별장에 있는 자들로는 감당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퇴로가 없다.
자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백강 칼리아,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에서 불법 노예 등 다수의 중범죄 정황 확인]
[인권이 유린된 잔혹한 현장. 라인즈 교회의 데헤른 말다니아 주교, 플리쉬르 백작 규탄.]
[보좌관 멜베른 및 조합의 땅거미 상회주 신변 확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합의 상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과의 연관성이────]
오늘 아침, 아세른에 발간된 신문 내용에 페르네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백강이란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네요.”
“그렇군.”
별장에 들이닥친 다음 날, 근처 도시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아세른까지 닿기까지. 이건 움직임과 동시에 신문사에 손을 썼다는 뜻으로, 조합뿐만 아니라 그에 관련된 귀족들에게 직격타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마침 조합의 운영자 중 한 명까지 별장에 있었을 줄은…… 너무 운이 좋은데?’
페르네? 애셔?
조합은 더 이상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쯤 상황을 수습할 길을 모색하고 있겠지. 꼬리를 어디까지 자를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합의 세력이 일부 와해될 터.
계획한 것 이상의 결과.
페르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설마 이렇게 보기 좋게 상황이 역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전적으로 베르덴 덕분이었다.
의뢰부터 시작해 칼리아의 설득까지. 그는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페르네도 성과를 보여 줄 때.
얼마 전 얻어 낸 정보들을 추려서, 보기 좋게 만든 서류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저번에 말씀드렸던 유물 탐사단에 대한 정보예요. 타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 조금 어렵긴 했지만 겨우 구할 수 있었죠.”
베르덴이 즉시 서류를 펼쳤다.
페르네가 찾은 유물 탐사단의 이름은 ‘탐색자들’.
그들의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보던 베르덴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구성원이 화려하군.”
“그렇죠? 라이반 크루소라는 사람이 리더인데 10개의 마탑 중 하나인 헬리온 마탑, 인챈트리 학파의 부여 마법을 전공한 5위계 마법사라고 해요. 2인자로는 한스 데이켈이라는 4위계 마법사가 있고요. 탐사단 전체적으로 마법사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요.”
3위계와 4위계는 그렇게까지 드문 편은 아니다.
왜냐하면 범위가 워낙 넓으니까. 숱한 마법사가 3위계 내지 4위계 하위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통계학적인 근거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5위계는 다르다.
그들은 벽을 넘어선 존재들로, 베르덴도 마탑을 나선 이후로 공국의 마도사, 페르드라 불리는 주석 궁정 마법사 외에는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때, 페르네가 말을 이었다.
“서류에 적힌 내력을 보면 아시겠지만 다른 나라에서 귀족은 물론이고 황족이나 왕족 그리고 마탑에서도 의뢰를 받아 성공적으로 완수한 탐사단이에요. 당연히 이쪽 업계에서는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만큼 신뢰성이 높다는 뜻이니 뒤통수를 칠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만약 의뢰자를 배신하고 유물을 갖고 도망쳤다간 탐사단은 그대로 끝장이다. 5위계든 뭐든 한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그러니 페르네 말대로 뒤통수를 맞을 걱정은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유물이었다면 말이다.
‘마도왕,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마법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최초이자 최후의 9위계 초월자다. 그런 존재인 만큼 세상에는 마도왕과 관련된 유물들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고대 아티팩트가 포함되어 있다.
보헤미른 마탑주의 다서 번째 컬렉션 [두 번째 회로].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만든 인공적으로 만든 아티팩트로, 지금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성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그 위상 정도는 되어야 일반적인 고대 아티팩트와 견줄 정도다.
베르덴도 아티팩트 [삼원색의 중심]과 인공 아티팩트인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소유하고 있지만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도왕의 유물은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
고대 아티팩트 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성능을 지녔다.
베르덴은 옛날, 마탑에서 마도왕의 지팡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마도의 징표]
마도왕의 고유 마법이 각인된 것으로, 기동하는 순간 대도시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직접 본 적도 없고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지만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지.
‘마법사에게 마도왕이란 그런 존재니까.’
베르덴은 마도왕을 딱히 숭배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마법의 역사는 인정한다. 세상의 어느 누가 그러지 않겠냐만.
어쨌든 그런 존재의 무덤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마도왕의 유물을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고대 아티팩트일 가능성을 배제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세상에 나타난 적 없는 마도왕의 유산.
과연 유물의 정체를 알고도 유물 탐사단이 순순히 의뢰를 진행할까? 천만에.
베르덴은 마법사라는 족속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탑 출신이라면 말이다.
그들은 이득이 손해를 앞서는 순간, 보란 듯이 손바닥을 뒤집을 자들이었다.
‘유명세 따윈 알 바 아니다.’
페르네가 말하길, 그들은 베르덴이 가진 유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
그게 마도왕과 관련되었다는 걸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됐든 경계를 늦출 생각은 없었다.
빼앗으려 하면 죽인다.
속으로 살벌한 원칙을 세운 베르덴이 페르네에 물었다.
“언제 온다고 하지?”
“내일 모레요.”
그렇게 날짜가 바뀌며 유물 탐사단이 아세른에 찾아왔다.
* * *
유물 탐사단.
세계 각지에 잠들어 있는 유적을 발굴하는 집단. 이름만 들으면 단순한 역사학자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는 다르다.
그들은 차라리 도굴꾼에 가깝다.
옛 유적을 파헤쳐 유물들을 발견해 파는 것이 주 수입이다. 특히 희귀한 마법 물품이나 아티팩트, 심지어 고대 아티팩트까지 발굴하기도 하니.
그리고 직업 특성상 위험한 험지를 다니는 건 물론이고, 유물들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기에 구성원은 마탑 출신 마법사, 고위 등급 모험가, 명성 높은 용병 등 각 분야의 엘리트로 이루어져 있다.
탐색자들의 리더 라이반은 한스 데이켈과 함께 아세른에 입성했다.
주위를 둘러본 한스가 표정을 찡그렸다.
“역시 에스티리아 왕국 아니랄까 봐, 도시가 상당히 저급하군요.”
도시 바깥 마을의 건축 형태는 국제법에 맞지 않으며, 도시 내부 또한 난잡하기 그지없다. 크기만 크면 뭐 하나. 이렇게나 시민들의 경제나 의식 수준이 낮은데.
특히나 골목 주변에서 껄렁대고 다니는 불량배 같은 몰골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스는 선민의식이 강한,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한스, 전부터 그랬지만 너의 행동을 억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속으로 하도록. 그보다는 우릴 찾은 고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바람직하겠군.”
“아, 그 유물에 대해서 말이군요.”
“정말로 본 적이 있는 물건인 건 확실하겠지?”
한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확실합니다. 몇 년 전에 다른 유물 탐사단에 있던 지인이 그 유물과 거의 똑같은 그림을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유물에 관련된 유적을 찾는 그 한 건에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자랑하고 다녔으니까. 그때는 배가 아파서 무시했는데, 훗날 지인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몸담고 있던 탐사단이 실종되었다고. 그것도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말이다.
“왕국의 치안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탐사단이 전부 살해당했을 리도 없으니 분명 유적을 찾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유적에 엄청난 것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로군.”
대부분, 아니 모든 경우에 그러했다.
위험하고 험한 지형에 있는 유적일수록, 함정이 많은 곳일수록 대단한 것이 잠들어 있다. 중요한 것일수록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철저히 지키는 것이 상식이니까.
라이반과 한스는 기대감을 품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운영되고 있지 않은 페르네의 주점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그들을 알아본 보랏빛 머리칼의 여성, 페르네가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탐색자들의 리더 라이반 크루소 님. 그리고 한스 데이켈 님.”
“음, 그대가 페르네인가? 알아봐 주니 고맙군.”
“당연히 그래야죠. 저를 따라오세요. 바로 의뢰자에게 안내해 드릴게요.”
둘은 페르네를 따라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베르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