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의뢰 달성
올빼미가 이끄는 마차가 에스티리아 왕국을 질주했다.
말이 지친 기색이 보이면 곧장 마을이나 도시에서 말을 교체했고, 끼니 또한 육포와 같은 간단한 보존 식품으로 마차 위에서 때웠다.
베르덴이야 익숙했지만 난데없이 올빼미에게 납치당한 성직자가 견디기에는 힘든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성직자는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그는 참혹한 상태의 마법사를 보더니 곧장 치료에 들어갔다. 감염과 염증 증상을 일부 완화하고 저주로 인해 육신이 썩어 가는 속도를 줄이는 등. 다 끊겨 가는 생명을 약간이나마 연장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지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대단한 성직자군.’
마차의 흔들림에 힘들어하면서도 꿋꿋하게 치료를 이어 나가고 있다. 마법사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기라도 한 듯.
신성력의 강함과 별개로 이 성직자는 타인의 존경을 받기에 마땅했다.
“으음…….”
그때, 토렐드가 신음했다.
얼굴이 씰룩거리는 게 곧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일어나면 시끄러워지겠지.’
퍼억!
베르덴이 오큘러스로 토렐드의 머리를 가격했다.
꿈틀거리던 토렐드가 다시금 잠잠해졌다. 확실히 이렇게 기절해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성직자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을 테고.
그 이후로 토렐드가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베르덴이 가볍게 제압했다. 머리에 멍이 들고 약간 코피가 흐르긴 했으나 그 외엔 상처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타인이 보기엔 영 아니었다.
마법사를 치료하고 있는 성직자.
치유의 기적을 유지하느라 뭐라 반응을 할 틈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리는 들리고 곁눈질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기절한 사람을 구타하는 베르덴의 모습을 말이다. 물론 이유가 있었지만 상황을 모르는 성직자에겐 마냥 그렇게만 보였다.
‘오…… 루아스시여.’
성직자는 속으로 덜덜 떨었다.
그는 난데없이 자신을 납치한 올빼미보단 베르덴이 더 무서웠다. 언제 저 스태프가 자신의 머리를 가격할지 몰랐으니까.
살 떨리는 여로(旅路).
그런 성직자의 오해가 풀리는 건 라인즈에 도착한 이후에서였다.
* * *
무사히 라인즈에 도착한 올빼미와 베르덴은 교회로 향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루아스교가 그리 크게 자리를 잡지 못한 나라이긴 했으나 라인즈와 같은 대도시에는 주교급 인사가 머물고 있으니.
마법사의 상태를 본 주교는 당장 치료에 들어갔고, 진이 다 빠져 있던 성직자는 그대로 졸도해 같이 교회에 이송되었다.
“다행히 늦지 않은 모양이군.”
비행 금지령의 마법사는 아마 살 것이다.
언제 정신을 차릴지는 미지수지만 최선은 다했다.
이제 토렐드를 칼리아에게 인계할 차례.
며칠 동안 이어진 강행군에 마차의 바퀴가 너덜거렸으나 다행히 도중에 폭삭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기사에게 토렐드를 넘기고 칼리아의 호출을 기다리는 동안, 베르덴과 올빼미는 잠시 미루었던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바로 토렐드의 마법 물품을 분배하는 것.
이미 오는 도중에 감정을 끝마쳤다.
토렐드가 가지고 있던 건 대부분 신체 능력을 강화해 주는 물건들이었는데, 부여 마법으로 인한 강화와 중복되지 않아 베르덴에겐 거추장스러울 뿐, 딱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수요는 충분히 있다.’
대체로 가치는 비슷하니 절반씩 가져가면 간단하다.
중요한 건 그 예외에 속하는 것들이다.
칼날에 베인 상처에 감염을 일으키는 [리자드 소드].
착용자에게 비행 마법을 부여하는 날개 목걸이, [윙 네클리스].
근육에 마비를 일으키는 독을 품은 [포이즌 클로].
일시적으로 착용자의 무게를 증감하는 [중량화 부츠].
마지막으로 하루에 한 번, 일정 이하의 마력을 흩어 버리는 [마력 무효화의 팔찌]까지.
위 다섯 가지의 장비가 분배의 쟁점이었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올빼미가 흔쾌히 선택권을 양보했다.
“내가 놈의 기동성을 빼앗았지만, 결론적으로 흑랑을 제압하는 데 네 마법진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나는 이런 희귀한 팔찌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
자칫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올빼미보단 베르덴의 비중이 더 높았다. 그러니 약속대로 장비를 분배하는 수밖에.
“사양하진 않겠다.”
선택할 수 있는 건 최대 두 가지.
베르덴은 먼저 [중량화 부츠]를 선택했다. 가치가 그리 높은 건 아니었으나 그나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부츠를 착용하고 효과를 확인했다.
‘적절하게 쓰면 쓸 만하겠군.’
무게의 변화는 곧 변칙이기도 하니까.
더군다나 내구성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포레스트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부츠보다도 뛰어났다.
‘그럼 다음은…….’
베르덴은 이어 팔찌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용도를 떠나 여기서 가장 비쌌으니까. 약 두 달 뒤 열릴 암흑가의 경매장에 대비해 돈을 최대한 모아 둘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올빼미의 순서였다.
그는 날개 목걸이 하나를 골랐다.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곧장 목에 차고는 간단하게 시험을 마쳤다.
“비행 조작이 조금 어렵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었을 것 같군. 나는 이거면 됐으니 나머지는 다른 장비들과 함께 처분하도록 하지. 대신 나는 하나만 선택한 만큼 정산 비율을 7 대 3으로.”
“처분은 네가 맡을 건가?”
“그래. 이후에 정산서를 주도록 하지. 깔끔하게.”
베르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율이 적다 해도, 팔찌 하나만으로 베르덴이 조금 더 이득이었으니까.
그렇게 분배가 끝난 직후에 칼리아의 기사가 찾아왔다.
“마법사 애셔, 칼리아 님께서 부르신다.”
* * *
올빼미는 칼리아의 수하다.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는 결이 다르기에, 굳이 의뢰 보수를 정산하는 자리에 같이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베르덴 혼자 칼리아와 마주했다.
“의뢰 내용대로 토렐드를 사지 멀쩡히 데려왔더군. 수고했다, 애셔.”
칼리아가 베르덴을 치하했다.
물론 말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특이한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건 지폐 자체에 내 이름이 기입되어 있는 개인 백지수표다. 어지간한 귀족이라고 해도 신용이 확실하지 않으면 발급 자체가 불가능한 귀한 거지.”
칼리아가 빈칸에 2억 엘크를 적어 베르덴에게 직접 건넸다.
“다이나 은행에 가면 곧바로 현금으로 바꿔 줄 거다. 뭐, 따로 현금이나 계좌 입금으로도 줄 수 있지만 나는 이 편을 선호하니 불만 없이 받아 줬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그럼 보수도 줬으니 다음 얘기로 넘어가지.”
칼리아가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라인즈에 들어오자마자 교회로 향했다고 들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부상은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것 같은데…….”
칼리아가 설명을 요구했다.
베르덴은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했다.
성 지하에 잡혀 있던, 비행 금지령의 마법사와 그를 고문하고 있던 흑마법사.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사령의 보주와 배신자라는 대화 내용까지.
물론 마일드륀에서 흑마법사와 조우했다는 사족은 곁들이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증거도 없고.’
정확히 의뢰 과정에서 보고 겪었던 것만 얘기했다.
그 편이 칼리아가 이해하기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호오.”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는 흑마법사의 등장에 칼리아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흑마법사라. 왕국 귀족 중에 흑마법사를 직접 휘하에 둔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비공식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군.”
흑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에스티리아 왕국이 세워진 서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건 맞지만 찾아보면 없지는 않으니까. 실제로 에스티리아 왕국 국립묘지를 관리하는 것이 흑마법사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거다.
베르덴의 보고는 세간에 알려진 비행 금지령의 내용과는 상이하다는 것.
“어떤 마법사가 플리쉬르 백작의 자제를 살해하려다가 중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고 도주했다는 이유로, 3왕자의 입김을 거쳐 이 말도 안 되는 금지령이 내려졌었지. 그런데 그 마법사는 정체 모를 흑마법사 집단의 배신자였고, 다른 흑마법사에게 고문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흑마법사는 사령의 보주라는 불길한 이름의 물건을 찾고 있었고?”
수상하다.
어떤 내막이 있는 게 분명하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긴 칼리아.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베르덴을 직시했다.
“일단 알겠다. 기사들을 보내 마법사를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하지. 혹여 정보가 새어 나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입단속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토렐드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를 뽑아내는 대로 나도 움직이도록 하지. 놈이 가진 정보가 없다면 약속은 당연히 물거품이 되겠지만…… 뭐,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칼리아도 짐작하고 있다.
토렐드의 속을 뒤집어 까면 그녀가 원하는 게 나올 거라고. 그녀의 직감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리아의 반응에 베르덴이 내심 웃었다.
‘최선의 결과군.’
칼리아가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조합과 귀족을 포함해 알아서 놈들을 견제해 줄 터. 이걸로 상정했던 목적은 전부 달성한 셈이었다.
베르덴은 가벼운 마음으로 칼리아의 저택을 떠났다.
* * *
유리창 너머로 베르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아가 말했다.
“저 애셔란 사내는 어땠지?”
올빼미가 답했다.
“저번에 보고드렸다시피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판이합니다. 원거리뿐 아니라 근거리 전투에도 익숙한 듯 보였으며 즉석에서 마법진을 만들어 흑랑 토렐드를 제압하기까지 했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아직도 숨겨진 수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마법진이라…… 그 어려운 걸 잘도 실전에서 써먹을 정도라니. 머리가 비상한 자로군.”
칼리아가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베스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기사단장 베스파.
그는 베르덴이 올빼미와 토렐드를 잡으러 간 사이 베르덴의 행적을 조사했다. 딱히 깊게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왕국의 그레이에서 이미 그 이름이 퍼지고 있었으니까.
“4위계 전격 마법사. 그 외의 원소 마법도 다룰 줄 안다고 하는 걸 보아,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미스릴 등급 파티인 만하와 토벌을 함께했을 정도면, 모험가 등급을 기준으로 백금 등급 중상위에 비견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건 최소 기준입니다. 그의 전력을 본 적이 없으니 확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만, 어쩌면 단신으로 미스릴 등급에 준할지도 모릅니다.”
“미스릴이라…….”
칼리아는 베르덴을 유심히 살폈다.
눈길을 끄는 잿빛 머리와 마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벽안. 어느 모로 보나 2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많아 봤자 30살을 갓 넘어선 정도일 터.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지?’
특히나 마법사다.
나이가 들수록 강해지는 게 기본적인 상식.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으며, 그런 자들은 수재, 영재 그리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어 보다 전문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20대와 30대 일생을 안전하게 길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실력이든 담대함이든 또래와는 비견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아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지켜볼 가치가 있겠어.’
천재 마법사.
칼리아는 베르덴을 그렇게 기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
“토렐드가 가진 정보를 전부 확인했습니다, 칼리아 님.”
“결과는?”
기사단장 베스파가 자료를 넘겼다.
쭈욱 훑어본 칼리아가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대박이로군.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큼지막한 월척이야.”
칼리아는 자료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무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가보, ‘진실의 천칭’을 사용했으니. 사용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1년에 많아야 두 번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 천칭 앞에는 거짓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사용하려면 후작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칼리아는 보란 듯이 생략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자고로 허락보다는 용서받는 게 더 쉬운 법이니.’
칼리아는 곧바로 기사단을 소집했다.
아버지인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지휘 권한을 받은 백결 기사단. 언제나 칼리아와 함께 범죄자들을 쓸어버리는 이들은 칼리아의 두 번째 검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상에 선 칼리아가 말했다.
“제군.”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플리쉬르 백작의 부정이 확인됐다. 마약, 밀수품은 물론이고 선량한 국민들을 잡아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군. 노예제가 폐지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노예 타령이라니. 어떻게 생각하나, 베스파?”
“그야말로 왕국을 더럽히는 주범입니다.”
백결 기사단의 단장, 베스파가 답했다.
“그렇지. 정확히 에스퍼렌사의 가훈에 반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처벌해 왔던 범죄자들과는 규모가 다르다. 플리쉬르 백작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까지 줄줄이 엮여 있다. 자칫하면 왕국에 큰 소란이 일겠지.”
칼리아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썩은 상처는 도려내는 게 마땅한 법이지.”
기사단에게 칼리아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후광 때문이 아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수십 번이나 칼리아와 함께 악을 척결한 칼리아의 기사들이었다.
칼리아가 시선을 뒤로 향했다.
“베니엔, 로하스, 카드록스.”
“부르셨습니까, 칼리아 님.”
“너희들은 우리보다 먼저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에 잠입해라. 그리고 증거를 확보하면 신호를 보내도록.”
셋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칼리아의 명을 받았다.
“그럼 범죄자들의 토벌을 시작한다.”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은 마차에 식량과 같은 필요한 물자들을 싣고 곧장 라인즈를 떠났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어둠이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토렐드가 라인즈에 잡혀 온 지 고작 5시간 만에 기사단이 움직였다.
백강 칼리아.
확신을 가진 그녀에겐 주저함이라곤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