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뜻밖의 (1)
흑랑 토렐드.
한때 암흑가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잔인하게 사냥함으로써 흉악한 악명을 날렸던 자다…… 라고 페르네에게 들었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나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터라 최근에는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그리 가볍게 상대할 만한 자는 아닌 모양이다.
그 이름을 들은 칼리아가 흥미를 내비치며 즉시 2억 엘크의 보수를 내걸었으니.
‘바제스와 8천만 엘크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금액과 강함이 비례하지는 않겠지.’
어디까지나 바제스는 여러 피해자가 재산을 모아 의뢰를 한 것이니까.
흑랑이란 이름만 들어 봤을 뿐, 놈에게 일절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칼리아가 그 정도의 보수를 제시했다는 건, 바제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걸 뜻했다.
‘올랜드의 여관에 있던 놈들보다 강했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의 감흥은 그게 전부였다.
새벽에 라인즈를 떠난 베르덴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숲 안쪽에 있는 길목에서 만나, 저쪽에서 준비한 말을 타고 토렐드가 있는 버려진 옛 성터로 향할 계획이었다.
누가 오는지는 듣지 못했다. 들어 봤자 알 리도 없었고.
그래도 단순한 들러리는 아닐 것이다. 칼리아는 베르덴의 실력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베르덴이 아니더라도 혼자 토렐드를 잡을 수 있는 실력자를 보냈을 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나무에 묶인,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말 두 필이 투레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위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인영이 떨어졌다.
“시간 맞춰 왔군. 만나서 반갑다.”
얼굴 절반을 가린 마스크.
갈색 머리칼을 가린 녹색 사냥꾼 모자.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바로 올랜드의 여관 안에서.
“얼굴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올빼미.
그가 베르덴 앞에 나타났다.
* * *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 푸른 전류가 번쩍였다.
“조합의 끄나풀이 아니었나?”
올빼미가 단호히 손을 들었다.
“나는 올랜드가 말하기 전에 어떤 의뢰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단지 큰 의뢰라고 소문이 돌았기에 궁금해서 들렀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련 없이 여관을 떠나지 않았을 거다.”
“그럼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오해지. 혹시 기억 안 나나? 내가 여관을 떠났을 때를 말이야.”
베르덴은 여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올랜드가 불러들인 그레이의 용병들 중에서 유일하게 베르덴과 적대하지 않고 훌훌 여관을 떠났던 사내, 올빼미.
‘그러고 보니 따로 모시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게 칼리아였나?
베르덴의 물음에 올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공교로운 우연이군.”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지.”
올빼미가 은화를 꺼내 건넸다.
베르덴이 오래된 동전을 유심히 살펴봤다. 옛 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걸 보아 지폐가 생기기 이전의 고대 화폐.
그것은 칼리아가 보낸 사람임을 증명했다.
확인을 마치고서야 마력을 가라앉혔다.
베르덴이 다시 은화를 올빼미에게 넘겼다.
“진품이군.”
“물론이지. 그나저나 그 여관에서 운명을 달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토록 멀쩡하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 칼리아 님에게 네 이름을 들었을 땐 꽤나 놀라웠지.”
올빼미는 당시 올랜드의 여관을 뒤로하고 지역을 떠났다.
아예 관여할 생각이 없었기에 멀리서 지켜보지도 않았고, 그 이후로도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관에서 말했듯 정말로 귀족, 칼리아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니까.
“당시에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문보다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군. 설마 그 거리에서 놈들을 단신으로 처리했을 줄이야.”
그날 올랜드의 여관에 모인 자들은 나름대로 강단이 있는 놈들이었다.
어두운 숲에서 기습한다면 올빼미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긴 하지만, 정면으로는 승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그걸 마법사 혼자 해냈으니…….
‘여관에 남아 있지 않길 잘했군.’
올빼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쁘군. 그럼 시간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니,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일단 출발하는 게 어떤가?”
이의는 없다.
뭐가 됐든 그는 칼리아가 보낸 사람이 확실했으니.
곧장 말에 올라탄 올빼미.
이어 베르덴도 남은 말에 승마했다.
* * *
하얗게 내린 눈밭.
베르덴과 올빼미는 그 위를 나란히 질주했다.
“혹시 흑랑에 대해 알고 있나?”
“대충은. 암흑가에서 유명한 노예 사냥꾼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정확히 알고 있군.”
올빼미가 과거를 떠올렸다.
“거의 8년. 아니, 해가 넘어갔으니 9년 전 얘긴가. 나는 그놈을 로아프라에서 한 번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꽤 첫인상이 강했었지. 피로 물든, 각종 매직 아이템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니까.”
매직 아이템.
현대에서 쓰는 마법 물품의 명칭이다.
“어떤 마법 물품이지?”
“마법 물품?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옛날 단어를 쓰는군. 음, 너무 많아서 딱히 뭐라고 특정할 수가 없지만, 전부 자신의 사냥감에게서 얻은 전리품이었지.”
토렐드는 언제나 빼앗는 걸 선호한다.
음식이 필요할 땐 칼을 들이밀고, 돈이 없을 땐 그럴듯한 먹잇감을 찾아 죽여서 빼앗는다.
갖고 싶은 마법 물품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다.
“놈은 고블린을 의인화한 것처럼 약탈에 목을 맨다. 그리고 마치 늑대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한 사족 보행으로 적을 사냥하는데, 그 때문에 흑랑이라는 이명이 붙었지. 그 암흑가에서 오랜 세월 살아남은 걸 보면 실력이 좋은 것뿐만이 아니라 눈치도 빠르다는 뜻이고.”
쉽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다.
만약 자취를 감추고 있던 시간 동안 몰래 귀족과 거래하며 살아왔다면 그때보다도 강력한 마법 물품들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생포하려면 가능한 한 기습으로 단번에 제압해야 한다.
날뛰기 시작하면 사로잡기는커녕 되레 당할지도 모른다. 올빼미는 자신이 봤던 토렐드에 대해 말하며 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베르덴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놈이 가지고 있는 마법 물품이나 재산에 대한 분배는 어떻게 하지?”
“……?”
올빼미가 베르덴을 쳐다봤다.
“지금 궁금한 게 그거라고?”
그야 당연하다.
어차피 흑랑이든 뭐든 제압되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이건 오만이 아니라, 베르덴이 지난 1년 가까이 쌓아 올린 자신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올빼미가 입을 열었다.
“칼리아 님이 흑랑 생포 외에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으니…… 으음, 좀 어렵군. 어떤 게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애매하긴 하다.
각자 필요한 걸 챙긴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가치가 천지차이니까.
베르덴이 말했다.
“그럼 일단 재산은 5 대 5로 나누고 나머지는 그때 가서 정하도록 하지. 어차피 서로 뒤통수칠 것도 아니고.”
“그야 당연하지. 만약 내가 그런 짓을 했다간 칼리아 님에게 목이 베일 테니까. 그래, 그 안이 가장 합리적인 것 같군.”
서로 합의는 끝났다.
이제 흑랑 토렐드를 잡는 일만이 남았다.
베르덴과 올빼미가 발을 박차며 말을 재촉했다.
* * *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가득한 옛 터전.
곳곳에서 빛나는 마석등. 그리고 여러 마법 물품들로 보호되고 있는, 버려진 성에는 삼엄한 경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두 사람이 흙탕물 같은 차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흑랑 토렐드.
그가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거 플리쉬르 백작에게 연락했는데 아리따운 메이드가 아니라, 웬 기분이 더럽게 나빠 보이는 친구가 왔군. 표정도 안 좋고. 내가 준 차가 그렇게 맛이 없었나?”
“마법사는 어디에 있지?”
흑마법사의 싸늘한 시선이 토렐드를 직시했다.
“거, 성격 급하기는. 그렇게 진득하게 쳐다보기 전에 이것부터 보여줘야지?”
토렐드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흑마법사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거액의 현금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냉큼 지폐 뭉치를 집어 든 토렐드가 눈대중으로 살펴봤다.
대충 봐도 수배서에 적혀 있던 포상금보다도 훨씬 많아 보였다.
토렐드가 히죽였다.
“크히히, 보기와는 달리 아주 말이 제대로 통하는 사람이었군. 초면에 기분이 나빴다면 내 사과하지. 차 한잔 더 내줄까?”
“마법사는?”
토렐드가 발로 지면을 툭툭 찼다.
“이 아래에 있는 지하 감옥에 잘 모셔 놨지. 아, 근데 좀 하자가 있어.”
“하자?”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도 이 악물고 도망다녀서 말이야. 날파리 같은 게 너무 거슬리더라고? 그러다 보니 왼쪽 무릎하고 오른쪽 어깨를 좀 깊게 베었는데…… 아, 하필이면 내가 리자드 소드(Lizard Sword)를 들어서 참…….”
리자드 소드.
이 무기에 베이면 상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포션의 효능도 떨어지고, 상처를 완전히 소독하지 않는 이상 높은 확률로 감염 증상이 일어난다.
흑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숨은 붙어 있나?”
“붙어 있긴 하지. 백작령으로 옮기는 도중에 뒈지긴 할 테지만 어쨌든. 사실 이게 치료하려면 수고가 많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돈을 좀 더 얹어 주면 우리가…….”
“살아 있다면 상관없다.”
“어?”
흑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곧 죽는다니까? 설마…… 백작령으로 데려가지 않을 셈인가?”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툭.
흑마법사가 돈뭉치 하나를 토렐드에게 던졌다.
“지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접근하지 마라. 알겠나?”
그 말을 남기고 흑마법사가 방에서 나갔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고 있던 토렐드가 돈뭉치를 어루만지며 낄낄거렸다.
“암, 손님이 그러신다면 얼마든지. 어이. 저 친구한테 지하 감옥 안내나 해 줘라.”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서서히 발소리가 멀어지자, 토렐드가 다른 부하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성의 지하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감시하라는 뜻이었다.
아까 했던 말과 다르지만…… 뭐 어쩌라고?
‘약속이란 건 어기라고 있는 건데.’
토렐드가 소파에 등을 뉘었다.
고작 사람 하나 잡고 이만한 돈을 벌게 되다니. 마치 옛날 노예를 사냥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주 좋아.”
그 향취에 몸을 맡긴 토렐드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직전에 들른 마을에서 말을 팔고 온 베르덴과 올빼미는 눈길을 헤치고 산을 올랐다. 날씨가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일정 고도를 넘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보라가 그쳤다.
“도착했군.”
산 중턱에 가려져 있는, 폐허가 된 성터.
예전에 왕국과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처참하게 짓밟혔던 요새 중 하나였다.
올빼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의 흐름을 유심히 살핀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정확히 우리를 향해 불고 있군. 여긴 잔잔하지만 요새에 가까이 갈수록 세기가 강해지고 있어. 냄새를 숨기기엔 적합해 보인다.”
즉, 잠입하기엔 좋은 환경.
올빼미가 마수의 뼈로 만든 듯한 활을 꺼내 들었고, 베르덴도 오큘러스를 손에 쥐었다.
“부여 마법이 필요한가?”
“아니, 나는 됐다. 활시위를 당기기에는 더 수월해지긴 할 테지만, 감각이 달라지면 정확도가 떨어지니.”
궁수에게는 정교함이 생명이다.
익숙하지 않은 신체 강화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자신에게 부여 마법을 사용했다. 전신에 충만한 힘이 감돌았다.
준비를 갖춘 둘이 은밀하게 성에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