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칼리아 (3)
레스토랑 말레나.
이곳은 칼리아가 자주 애용하는 장소로, 그녀가 예약한 날은 건물을 통째로 빌려서 이용하고 있다.
혹여 독살이나 암살을 하려 할 수도 있기에 기사들이 식당 전체를 점거하고 음식의 재료들을 전부 확인한다.
레스토랑 주인 입장으로는 너무도 번거로운 일이긴 했으나 상대는 후작가의 독녀다. 감히 불만을 제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본래의 가격보다 더 많은 대금을 지불하니, 주인은 웃으며 칼리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아와 베르덴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녀의 곁을 베스파 단장이 지켰다. 타인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베르덴은 전혀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귀족과의 식사가 익숙한 모양이군. 대부분은 긴장해서 덜덜 떠는데 말이야.”
“운이 좋아 몇 번 기회가 있었습니다.”
칼리아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라. 평민이라더니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그나저나 먹지 못하는 음식이 따로 있나?”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최근에 내가 먹기 위해 직접 짠 코스 요리가 있어서 말이야. 내 기사들이야 훌륭하다고 해 주긴 하지만 외부인의 감상도 듣고 싶어서 말이지. 간단히 부탁해도 되겠나?”
그 정도야 문제없다.
베르덴도 음식을 먹는 것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칼리아가 손짓했다.
기사들이 직접 요리들을 서빙했다.
전채로는 에스카르고, 달팽이 요리가 나왔다.
잘 구워진 빵과 맑은 국물의, 콩소메 수프가 곁들여졌다. 후에 오븐에 노릇노릇 익힌 바다 생선이 차려졌다.
그다음은 에피타이저로 입안을 청결하게 하고 메인 요리의 차례였다.
돼지 목살 스테이크 다음에 레어(Rare)로 익혀진 안심 스테이크. 옆에는 신선한 샐러드가 함게했다.
마지막 디저트로는 최고급 초코 케이크와 커피가 나왔다.
베르덴과 칼리아.
서로는 식사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많이 식사 예절이 자유로워졌지만, 이것이 정통적인 귀족의 식사법이었다.
베르덴은 섣불리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식사에 대해 평해 달라고 했으니 거기에 집중했다. 그런 작은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는다면 베르덴과 대화를 제대로 할 리가 만무했으니까.
디저트를 즐길 때쯤에야 대화가 다시금 이어졌다.
“어떤가? 표정을 보니 나쁘지 않은 듯한데.”
“훌륭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기도 하고, 특히 달팽이가 거부감 없이 잘 넘어가더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아쉬웠습니다.”
첫 번째는 생선 요리였다.
적당히 기름지고 맛 또한 상당했지만, 코스 전체로 보면 식감이 많이 부족했다. 오븐 구이보다는 생선 튀김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칼리아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금 생각해 보니 튀김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뭐지?”
“이건 아쉽기보다는 의문입니다. 어째서 육류에 돼지와 소를 같이 넣으신 겁니까?”
코스에 두 가지 종류의 메인 요리는 과하다.
당연한 의문에 칼리아가 팔짱을 끼며 답했다.
“그건 내 취향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취향은 존중해야 하니까. 애초에 이건 칼리아가 자신을 위해 짠 코스였으니, 그걸 가지고 타인이 왈가왈부할 건 아니었다.
그러자 칼리아가 작게 웃었다.
“장난삼아 요청한 건데 진지하게 받아 줄 줄이야. 그런데 식사 예절을 봐도 어지간한 귀족 자제는 상대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평민이라, 참 재미있는 사내로군. 대화를 할수록 궁금증이 더 깊어져만 가. 그러니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지.”
칼리아의 눈동자가 베르덴을 향했다.
“애셔,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 * *
칼리아와 기사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멈췄다.
그 적막 속에서 베르덴이 페르네가 준 서류들을 꺼냈다. 단장이 종이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 칼리아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플리쉬르 백작이 가진 불법 자금원에 대한 정보입니다.”
“……!”
칼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곧바로 서류들을 넘기며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 마약, 밀수품 심지어 불법 노예만이 아니라 조합과 3왕자에 대한 연관성까지 상세히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걸 손에 넣은 거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위험한 정보들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
그러나 칼리아에겐 유례없는 기회였다.
이걸 잘 이용한다면 칼리아 일생에 전무후무한 공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맹독이 가득한 벌집을 건드는 것만큼이나 큰 파장이 일겠으나, 벌집을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 더 큰 위험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가훈은 정도(正道).
설령 이번 일로 왕국에 큰 혼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특히나 노예 제도를 혐오하는 그녀의 아버지라면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칼리아를 도울 것이 분명했다. 그건 다른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칼리아가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내가 이걸 어떻게 믿지?”
정보 규합성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위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건 칼리아의 신중함을 떠나, 보다 확실하지 않으면 후작가가 정치적 피해를 입을 만큼 엄중한 사안이었으니.
“별장을 이용하는 고객 중 한 명의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고객? 그게 누구지?”
“그건 제 용건을 들어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르릉!
말이 끝나자마자 베스파 단장이 검을 뽑았다. 은색의 칼날이 베르덴의 목을 향했다.
“마법사 나부랭이가 겁도 없이 칼리아 님에게 거래를 운운하다니. 감히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우롱하는가?”
그에게서 거센 기운이 흘러나왔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
그런 무언의 압박감이 베르덴을 억눌렀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칼날을 앞에 두고도 태연히 칼리아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칼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참으로 대범하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아주 신선해. 요람 속에서 자란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돈만 밝히는 용병들과는 그야말로 인종이 달라.”
칼리아가 등받이에 몸을 누이자 베스파 단장이 검을 회수했다.
“좋아. 얘기는 들어 주지.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거래를 요구했다간 베스파 단장이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모르니,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도록.”
이미 무엇을 거래할지는 정해졌다.
베르덴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조합과 적대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간략하게 설명했다. 흑마법사에 대한 건 일단 제외했다.
명확한 정황 증거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섣불리 그녀를 납득시키려고 했다간 역효과일 게 분명했다.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정보로 조합과 놈들이 등에 업은 귀족들을 상대해 달라는 뜻이군. 그사이에 너희 정보상은 조합에 대항할 세력을 키우고…… 내가 얻는 건 에스퍼렌사 후작의 일원으로서 얻을 막대한 공훈이로군. 나로선 나쁘지 않은 거래야.”
하지만.
“전제되는 조건이 부족해. 만약 그 고객이라는 자에게서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물거품이나 다름없지.”
칼리아도 왕국의 어둠은 잘 알고 있었다. 조합의 뒤가 구리다는 것 또한.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모든 걸 척결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나라를 송두리째 들어내지 않는 한.
단순히 의심이 간다고 해서 다른 귀족이나 왕가의 뒤를 캐내려고 했다간 칼리아뿐만 아니라 최악으로 에스퍼렌사 후작가 전체가 매장당할 수도 있다.
고위 계급에 위치한 범죄자들을 처벌하려면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는 또 분명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명분을 위한 또 다른 명분이 필요하고.
돌고 도는 모순적인 현실.
그게 귀족들의 싸움이고 곧 정치적인 전쟁이다.
칼리아가 생각하다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최근 내 밑에 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그와 함께 그 고객을 ‘살려서’ 나에게 데려오도록. 음, 굳이 말하자면 의뢰를 하는 거라고 볼 수 있겠군.”
함부로 기사단을 움직였다간 세간의 주목을 받을 터.
그렇기에 그 역할을 의뢰 형식으로 넘기는 것이다. 베르덴이 공국 그레이에서 해 왔던 의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만약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따로 보수를 챙겨 주도록 하지. 그리고 고객에게서,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정황이 확인되면 얼마든지 조력자가 되어 줄 생각이고. 이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귀족이 이름을 걸었다.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물론 의뢰는 완벽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 혹여 도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나는 가차 없이 너희를 버릴 것이다. 그래도 수락하겠나?”
당연히.
“수락하겠습니다.”
“좋아. 그래서 그 고객이 대체 누구지?”
베르덴이 말했다.
“흑랑 토렐드라고 합니다.”
* * *
마일드륀에서 마석 보급을 담당했던 흑마법사 체드.
그는 다른 두 흑마법사와 함께 실종되었다.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마일드륀에서 떠나는 걸 봤다는 증언 외에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뭐, 마석쯤이야 다른 곳에서 구하면 된다.
당연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약간 심기에 거슬리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난 노인, 그가 분노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사령의 보주’를 훔쳐 간 ‘배신자’가 어디에 있다고?”
“죄, 죄송합니다, 노사(老士). 저희가 행적을 파악했을 즈음에 수배령 전단지를 본 암흑가의 인간이 그 마법사를…….”
그 순간, 노사가 마력을 번뜩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흑마법사를 구속했다.
“그 도둑놈을 찾기 위해, 3왕자에게 말해 왕국 전역에 비행 금지령을 내린 데다가 조합의 금전과 인력까지 지원해 줬다. 그런데 그걸 외부인에게 빼앗겼다? 죽고 싶다고 돌려 말하는 건가, 지금?”
“끄으윽…… 아아아아악……!”
꾸드드드득.
노사가 손을 움켜쥐자 흑마법사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관절의 역방향으로 천천히 꺾이며 인대와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 채로 팔꿈치 하나를 접어 버리고 나서야 노사가 흑마법을 풀었다.
털썩 주저앉은 흑마법사가 곧장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사죄의 의미였다. 피가 흘렀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묻지. 배신자를 데리고 있는 자가 누구지?”
“토, 토렐드라고, 플리쉬르 백작의 고객 중 하나인데, 수배된 마법사를 데리고 있으니 거래를 하고 싶다고 백작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사령의 보주는?”
흑마법사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는 건 배신자가 사령의 보주를 어딘가에 감췄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로군.”
노사가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쓸었다.
“백작에겐 내가 이야기할 테니 네가 직접 놈과 거래해라. 그리고 배신자에게서 사령의 보주에 대한 행적을 반드시 얻어 내라.”
희멀건한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만약 실패했다간 30일에 걸쳐 네놈의 육신을 손끝부터 천천히 짓이겨 줄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노사.”
허리를 숙인 흑마법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사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핏대를 가라앉혔다. 그 옆,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성이 다리를 흔들며 히죽였다.
“왜 그렇게 열을 내?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시끄럽다. 애초에 네가 보주를 부주의하게 도둑질당하지만 않았으면…….”
“나라고 배신자가 나올 줄 알았나? 잃어버릴까 봐 보주에 저주 마법진까지 새겨 놨는데 그대로 도망칠 줄은. 아, 대체 어떻게 했나 몰라? 내 저주로 흑마법도 봉인당하고 서서히 몸도 썩어 가고 있을 텐데. 몰래 희귀한 마법 물품이라도 숨기고 있었나? 실력을 감추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여성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야, 그냥 안전하게 다시 만드는 건 어때? 조합하고 귀족들, 돈이든 뭐든 쥐어짜 내면 보주 하나쯤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기존의 보주로 의식이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있지 않나? 이제 와서 새로운 보주를 완성하고, 그 마력에 맞춰 조율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노사가 한 차례 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이 모든 건 3왕자와의 거래를 위한 거다. 그럴진대 3왕자가 자신의 세력을 깎는 일을 허락할 것 같나? 잘못하면 왕국에 할애한 2년이 성과 없이 끝날 수도 있다. 그건 절대로 피해야 될 일이지.”
“눈치 보는 거야? 그 병신 같은 3왕자 따위에게?”
“시끄럽다. 그리고 따로 배신자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노사의 말에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로? 아, 어쩐지 그 못생긴 쿤엘 녀석이 네 곁에 없다 싶더라니. 그럼 배신자 찾으러 보낸 건 뭐야?”
“그 쉬운 일도 실패한 자다. 믿지 않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배신자는 사령의 보주를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거다. 네 저주를 무력화했더라도, 보주가 가진 죽음의 기운은 같잖은 흑마법사 따위가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니.”
노사가 눈을 빛냈다.
“그러니 보주의 행방이 밝혀지면 네가 직접 회수하도록.”
여성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내가? 음…… 기왕 찾는 김에 쿤엘보고 가져오라고 하면 안 되나?”
“미리 준비하고 있으면 걱정이 줄어드는 법이다. 그리고 마일드륀에서 한 차례 방해를 받았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배신자가 발설한 내용이 아닌 건 분명하니…….”
그러자 여성이 코웃음 쳤다.
“왜. 우리들을 쫓고 있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을 하려고? 생각이 너무 지나친 것 같은데? 그냥 우연이니까 신경 꺼. 애초에 그런 놈들이 있었으면 마일드륀 따위가 아니라 다른 곳을 쳤겠지. 안 그래?”
“우연은 곧 필연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하나 충고하마.”
노사의 검은 눈동자가 여자에게 향했다.
“그렇게 안일하게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다, 비올라. 그게 세상이니.”
여성, 비올라가 같잖다는 듯 입가를 비틀었다.
“나보다 고작 3년 더 살았으면서 뭐래? 알겠으니까 새해부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보주의 위치가 파악되면 연락해. 네 말대로 내가 직접 찾으러 갈 테니까.”
비올라가 소파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사는 그녀가 사라진 장소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어둠과 동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