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10화 (110/366)
  • 110화 조합의 정보상 (2)

    고요한 긴장이 감돌았다.

    바르톨이 허공 위에 떠오른 식기들과 단검을 봤다.

    머리, 목, 심장, 팔, 복부 등 스무 개 가까이 되는 숫자임에도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곳을 노리고 있었다.

    저게 일제히 날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 하나라도 허튼 수작을 부렸다간 당장 이 방 안이 피로 물들 것이다. 그게 누구의 것일지는 자명했다.

    ‘올디면 몰라도 나는 죽는다.’

    바르톨은 범인(凡人)이었다.

    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마력도 깨우치지 못했으며, 신성력을 허락받은 독실한 성직자 또한 아니었다.

    그가 아세른의 권력자가 된 것은 힘이 아니라 독기 덕분이었다.

    주어진 기회를 잡아 악착같이 올라온 것이다. 물론 올디와 같이 나름 실력이 있는 부하는 있지만, 지금 당장 바르톨의 몸을 지켜 주기는 어려워 보였다.

    운 좋게 마법사를 죽인다 해도 적어도 바르톨은 치명상 혹은 사망. 그는 저녁을 먹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바르톨이 올디에게 턱짓했다.

    “잠깐 나가 있어.”

    “……예.”

    올디는 순순히 명령을 따랐다.

    그도 상황이 그대로 흘러갔다간 바르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올디가 나가고 베르덴, 바르톨, 페르네만이 방에 남았다.

    바르톨이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기운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쉰 그가 페르네를 째려봤다.

    “대체 목적이 뭐지? 정말로 조합하고 맞붙을 생각은 아닐 테고.”

    “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르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르톨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건가?’

    일개 정보상이 조합을 뭘 어쩐다고?

    하지만 바르톨이 아는 페르네는 어처구니없는 허언을 남발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보상인 만큼 계산적이다.

    그렇다는 건 숨겨 둔 수가 있다는 뜻.

    바르톨이 베르덴을 힐끗 쳐다봤다.

    ‘저 마법사가 그렇게나 강하다고?’

    바제스의 용병단을 몰살했다고 듣긴 했는데…… 그것과 별개로 확실히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 바닥엔 바르톨보다 위험한 자가 즐비하다. 하물며 조합이다.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뒷배로 있는 상회와 정보상의 집단.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혼자 어찌할 방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페르네?”

    “솔직히 말하면 저희도 손잡을 귀족을 구하려고요.”

    “누구?”

    “에스퍼렌사 후작가요.”

    바르톨이 턱을 쓸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 대귀족이면 상대는 되겠지만…… 어떻게 손을 잡으려고? 그럴 만한 정보라도 있는 거냐?”

    “그걸 구하려고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조합은 합법적인 일만 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들과 관련이 깊은 귀족들이 결코 깨끗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깊이 파 보면 후작가의 흥미를 당길 만한 정황이 나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조합 밑에서 일하고 있는 정보상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제 힘으론 찾기 어려워요. 그래서 조합의 꼬리를 잡아야 하죠.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나보고 너에게 붙으라는 거였나.”

    바르톨은 조합과 거래를 맺었다.

    페르네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그 채무 권리를 조합에게 팔아넘기기로. 그렇기에 조합의 연락책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

    페르네는 그걸 알고 있었다.

    바르톨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였다면 듣자마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합이 그의 뒤통수를 치려 했던 정황이 포착됐다.

    그의 선택지는 총 3가지.

    아무에게도 붙지 않고 관망만 하다가 나가리 되거나.

    조합에게 걸었다가 뒤통수 맞고 그대로 뒈지거나.

    페르네가 내민 손을 잡아 승률이 낮은 도박을 하는 것.

    고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베팅을 해야겠군.’

    상황도 그렇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다.

    페르네가 저렇게 대담하게 나온 건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근간이 저 잿빛 머리의 마법사임이 분명하다고.

    이내 바르톨이 생각을 끝냈다.

    “조건은?”

    페르네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베르덴이 푸른 구름 상단에서 가져온 무기명 채권들, 그 절반이었다.

    “이 정도면 남은 빚을 갚고도 계약금 명목으로는 충분하겠죠?”

    바르톨이 입가를 씰룩였다.

    “진작에 이것부터 꺼냈어야지.”

    그가 손을 뻗자 페르네가 채권을 당겼다.

    거기서 3분의 1을 떼어 바르톨에게 건넸다.

    “나머지는 일이 끝난 뒤에 드릴게요.”

    “날 못 믿는 건가?”

    “이 바닥에서 돈만 받고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군.”

    바르톨이 채권을 받았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배신할 이유가 없으니 상관없다. 페르네가 제시한 채권의 액수는 최소 수억 엘크를 거뜬히 넘을 터.

    정산 과정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긴 하지만 웃으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한배를 탄 셈이군. 조합의 연락책은 어떻게 갖다 줄까? 납치해서 주점 안에 던져 주면 되는 건가?”

    “그건 내가 직접 하지.”

    베르덴이 말했다.

    조합의 연락책을 심문해 정보를 뜯어내는 것이 곧 시작점이다. 그런 중요한 일을 남에게 맡길 순 없었다.

    페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들으셨죠?”

    “뭐, 좋아. 그럼 4일 뒤에 자리를 만들 테니 준비하고 있어. 기회는 확실히 만들어 주지.”

    으저적.

    바르톨이 이어서 소갈비를 뜯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

    * * *

    바르톨이 준비를 하는 동안, 베르덴은 평소처럼 훈련에 집중했다.

    타인에게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을 2시간 동안 통째로 빌리고 체력 및 봉술을 단련했다.

    후에 남은 시간에는 마력과 마법 수련에 몰두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오직 자신의 성장에만 집중하는 정신력.

    베르덴은 날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더 정교해지며 강해지고 있었다. 훗날 5위계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는 전보다도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진척이 없어.’

    사실 당연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 온 이후로 이렇다 할 자극을 전혀 받지 못했으니까.

    악명 높은 용병, 바제스.

    의뢰로 인해 맞닥뜨린 현상 수배범.

    조합의 흑마법사.

    나름의 실력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 베르덴을 위협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솔직히 글러트니의 이식자들이 더 강했다. 놈들은 인간을 벗어난 능력으로 예상을 깬 일격을 가하기도 했으니.

    ‘루펠만큼의 격전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긴장할 만한 상대가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갈증.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 일렀다. 공국보다 훨씬 거대한 이 왕국에는 아직 강자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건 베르덴이 소극적으로 움직였다는 뜻. 그렇기에 앞으로 더욱 과감하게 움직여야 된다.

    목숨의 경중 따위 상관없다.

    세상에 군림하는 숱한 강자들. 생사의 경계에 선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 모든 것이 베르덴에게 있어 경험치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했고, 그래야만 오를 수 있다.

    벽을 넘고 인간을 벗어난 초월자의 격.

    그곳에 베르덴의 목적이 있었으니까.

    상념에 잠길수록 베르덴의 훈련이 거세졌다.

    빛이 번쩍이며 폭음이 터져 나왔고, 거센 진동에 연무장 일부가 무너졌다. 물론 훈련을 끝낸 후에는 <지형조작>으로 원상태로 되돌리고 있으니 길드가 손해를 입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길드장이 이마를 감쌌다.

    연무장의 방진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

    그 옆에 있는 길드 건물이 흔들릴 때마다 직원들이 길드장을 쏘아봤다. 시끄러우니 어떻게 좀 해 달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침에 연무장을 잠깐 빌려주는 것으로 돈을 준다니. 공돈이나 다름없는데 어느 길드장이 고개를 저을 수 있을까.

    거기다 연무장도 말끔히 청소해 주기까지 하니……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르고.’

    느껴지는 충격으로 봤을 때 최소 4위계 중위 이상이다. 길드로 치면 최소 백금 등급 이상.

    자칫 마법사의 심사가 뒤틀려 날뛴다면 감당하기 어렵다. 의외로 인격자일 수도 있지만 길드장은 여러 괴팍한 마법사를 겪어 온 사람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자는 수도 없이 봐 왔다.

    ‘본인이 제 발로 나가는 걸 기다릴 수밖에.’

    그게 최선이었다.

    그때, 마침 훈련을 끝낸 베르덴이 길드장과 마주쳤다.

    베르덴이 작게 목례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오지 마…….’

    길드장은 겨우 말을 삼켰다.

    * * *

    어느덧 4일이 지났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바르톨이 바깥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와 화창한 날씨.

    아세른의 거리를 넘어 구석진, 허름한 건물에 도착했다.

    계단 위로 올라가 벌컥 문을 열었다.

    케케묵은 먼지 냄새. 그 창가에서 조합의 연락책이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르톨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락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네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모른 척하기는. 이미 조합에서도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닌가? 페르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쯤은 말이야.”

    “그야 물론이죠.”

    연락책이 바르톨에게 고개를 향했다.

    “애셔, 망나니 같은 바제스 용병단을 단신으로 몰살한 4위계 전격 마법사. 그리고 널리고 널린 현상 수배범들을 하루 만에 찾아 잡기도 하고, 미스릴 모험가 파티인 만하와 토벌을 함께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세른은 조합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는 게 많구만.”

    “입소문은 도시 안팎을 가리지 않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 마법사 때문에 조합의 상회주들께서 매우 심기가 편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조만간 직접적으로 처리할 예정입니다. 이미 그레이에서 적임자들을 찾고 있죠.”

    바르톨이 미간을 찌푸렸다.

    “처리한다고? 평소처럼 회유는 안 하는 건가?”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죠. 고위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는 무척이나 귀하니까요. 조합의 일원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라면 다 죽어 가는 페르네에게 붙지 않았겠죠. 어떤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됐든 대화부터 시작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칫 전격 마법에 당하면 피해가 무척이나 클 테니까요.”

    “그러다 다 뒈지는 것 아닌가?”

    연란책이 웃었다.

    “독이든 기습이든 방법은 많습니다. 방심한 마법사를 무력화하는 것 따위, 그레이의 실력자들을 고용하면 아주 간단한 일이죠.”

    “아하, 그러니까 일단 잡아 놓은 다음에 권유를 받으면 살려 주고, 거절하면 죽이겠다? 아주 조합다운 일 처리군.”

    쯧. 바르톨이 혀를 찼다.

    연락책이 손목에 찬 시계를 두들겼다.

    “그럼 슬슬 용건을 말씀해 주시죠. 이렇게 오래 만나는 건 별로 좋지 않으니까요.”

    “내가 할 말은 하나다. 그 일에 나도 동참하고 싶군. 필요하다면 그 애셔란 놈이 어디서 뭘 먹고, 언제 자며 뭘 하는지 알려 주도록 하지. 그렇게 하면 일 처리가 더 수월하지 않겠나?”

    “그 말은…… 저희 조합과 완전히 손을 잡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왜, 나도 대세를 따르겠다는데. 안 되나?”

    연락책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죠. 상회주들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대부업자 바르톨이 아세른에 끼치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아부는 됐고. 거래의 답을 알려 주면 곧바로 마법사의 위치를 알려 주지.”

    “호오,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 정도도 못 할 거라고 보이나? 이쪽은 내 구역이라고. 못 믿겠으면 그놈이 어디 있는지 당장 알려 줄까?”

    바르톨이 손가락으로 연락책을 가리켰다.

    “네 뒤에.”

    “……네?”

    터엉!

    휘둘러진 스태프가 연락책의 머리를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충격. 이어 벽에 머리가 부딪혔다.

    뇌가 크게 흔들렸는지 연락책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고, 이내 부들거리다 고개가 축 늘어졌다.

    투명화가 해제된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절한 연락책의 뒷덜미를 잡았다.

    “수레는?”

    “밑에 준비해 뒀다.”

    베르덴이 연락책을 끌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런 일에 익숙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성격이 담담한 건지 일체의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다.

    바르톨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스태프로 대가리를 갈기는 마법사라니.

    ‘X나 무섭군.’

    만약 페르네의 제안을 거절했으면 자신도 저렇게 됐을까.

    바르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