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105화 (105/366)
  • 105화 정령 (4)

    정령석의 마력과 베르덴의 마력이 뒤엉켰다.

    서로가 동일한 마력이 아니었기에 약간의 반발력이 있긴 했으나 잠시뿐, 이내 정령석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소모한 마력만큼 정령석이 채워지는군.’

    대충 가늠하자면 정령석을 가득 채우려면 생각보다 많은 마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베르덴이 마법사로서 가진 강점 중 하나가 위계를 아득히 벗어난 마력량이니까.

    파아아아앗!

    베르덴은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하고는 더욱더 마력을 강하게 주입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어느새 충전량은 절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베르덴의 마력은 넘쳐흘렀다.

    ‘이대로면 금방…….’

    그 순간.

    정령석의 마력이 역행하며 베르덴에게 흘러들어 왔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곧바로 마력 주입을 중단했다.

    어차피 정령석에 있던 마력의 성질은 베르덴의 것이기에 일절 문제는 없었지만, 순간 눈앞에 햇빛이 내리쬐는, 울창한 숲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건 베르덴이 모르는 기억이었다.

    “기억전이?”

    그래, 하르칸의 기억전이와 같은 감각이다.

    알 수 없는 현상에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떠한 책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터. 아니, 정령석에 마법사의 마력을 불어 넣는 데 성공한 것부터가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정령의 기억이라…….’

    잠시 고민하던 베르덴이 이내 마력 주입을 재개했다.

    어차피 기억전이 마법으로는 베르덴에게 어떠한 피해도 줄 수 없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호기심이 앞섰다.

    대부분 수명이 존재하지 않는 이형종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니.

    마법사라면 그리고 연구원이라면 누구도 참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베르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시금 마력이 발광했다.

    정령석이 채워지며 그와 동시에 마력이 역행해 흘러들어 왔다. 서서히 흘러들어 오는 생소한 기억.

    베르덴은 저항하지 않고 그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치 연극을 보듯이.

    베르덴의 시야가 숲의 정령의 것으로 바뀌었다.

    * * *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그 울창한 숲.

    그곳에는 낯선 존재가 서 있었다. 화사한 금발, 깨끗한 피부와 미려한 외모 그리고 긴 귀. 본 적 없는 형태의 경장 갑옷을 입은 사내는, 누가 봐도 엘프였다.

    엘프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숲을 종횡했다.

    간간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무언가 말을 하는 걸 보아, 숲의 정령과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맞을 터.

    다만 어떤 애기를 하는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상황은 전처럼 평화롭지 않았다.

    표정을 찌푸린 채 곡도를 들고 있는 엘프. 그의 앞에는 보랏빛 로브를 두른 인간들이 서 있었다.

    그중 회색 수염을 가슴 언저리까지 기른 중년의 사내가 엘프에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대화가 엘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건 분명했다.

    엘프와 숲의 정령.

    둘은 인간들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며 달려들었고, 중년 사내는 비웃음과 함께 마력을 일으켰다.

    여기서 기억은 다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숲.

    거기에는 엘프도 인간도 없었다. 남은 건 지면에 말라붙은 피와 숲의 정령의 비틀거리는 시야뿐.

    기억을 통해 정령이 느끼고 있는 당혹감이 전해졌다.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어떤 엘프도, 어떤 정령도 납치당한 엘프에 대해 찾지 못했다.

    그렇게 정령은 엘프를 찾아 정처 없이 홀로 세상을 떠돌았다.

    풍경이 온통 숲이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그때, 정령은 마침내 마주했다.

    엘프를 납치한 중년의 마법사를.

    하지만 무턱대고 습격하지 않았다.

    정령은 학습한 것이다. 자신 혼자서는 이기지 못한다고. 그리고 저들을 쫓아가야만 엘프를 찾을 수 있다고.

    정령은 끈질기게 그들의 흔적을 따라갔고 이윽고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는 슬론의 깊은 숲에 닿았다.

    그런데 거기서 흔적이 끊겼다. 정령은 다시 하염없이 숲을 맴돌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령은 인간들 무리를 보았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베르덴을.

    엘프를 데려간 중년의 사내가 아니었지만…… 정령은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쌓여 온, 인간들에 대한 분노. 지칠 대로 지친 정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령은 베르덴과 모험가들의 앞에 나타났고 분노를 드러냈다. 그리고 베르덴의 마법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베르덴.

    잠시 마력 주입을 멈춘 그가 생각을 정리했다.

    ‘엘프와 정령이 친구였다니.’

    아무래도 책의 저자가 쓴 의견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식으로서의 가치로는 인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어 베르덴이 중년 사내의 마력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인지 정령의 기억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엘프와 숲의 정령을 제압한 걸 보면 5위계 이상의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법사가 엘프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당장 알 수는 없었다. 주어진 정보가 부족했다.

    엘프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이 세상에 퍼지지 않는 걸 보면, 중년의 마법사가 모종의 수단으로 엘프의 위치를 숨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멀어서 엘프들이 동족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언제 일어난 일인지 알 수가 없군.’

    시간의 흐름을 판단하기엔 기억이 너무 한정적이었다.

    어쩌면 엘프가 납치를 당한 건 수십, 수백 년 전에 있던 일일지도 모른다. 정령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엘프가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았다.

    이내 베르덴은 흥미를 잃었다.

    엘프가 납치되든 말든 베르덴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얼굴도 모르는,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엘프에게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은 사고를 전환했다.

    다시 정령으로.

    ‘그나저나 정령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아직 정령석을 가득 채우려면 마력이 더 필요하다.

    이대로 마력을 주입해 부활시킬 수 있지만 딱히 정령의 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령에 대한 궁금증은 기억전이로 거의 해소된 상태였기에 더욱.

    베르덴이 곰곰이 생각을 더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래, 그거면 되겠군.”

    마법진 실험과 정령의 용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방법이 떠올랐다.

    정령석을 챙긴 베르덴이 바깥으로 향했다.

    * * *

    슬론 숲에 온 베르덴은 지하에 공동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마법진을 바닥에 그렸다. 평범한 마법진이 아니기에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였다.

    흙 한 톨이라도 어긋난다면 실패하고 말 테니까. 이건 베르덴조차 성공을 반밖에 장담하지 못할 최상위 마법진.

    별다른 재료는 필요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확해야 한다. 마탑에서 벗어날 때 사용했던 공간 이동 마법진의 정교함처럼.

    “후우, 이 정도면 됐나.”

    베르덴이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그의 발 앞엔 거의 빈자리가 없는,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작은 마법진 하나에 쏟은 시간은 무려 17시간.

    아마 바깥은 오전을 넘어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겠지.

    베르덴이 정령석을 쥔 손을 마법진 위에 올렸다.

    멈추었던 마력 주입을 다시금 시작했다. 푸른빛이 공동 전체를 밝혔다.

    이윽고 용량이 가득 찬 정령석에 금이 가더니 그 안에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조각은 마력으로 산화했는데, 정령의 색깔이 이상했다.

    ‘녹색이 아닌 푸른색?’

    ……뭐, 색깔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령의 부활을 확인한 지금, 베르덴은 정령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마법진을 기동했다.

    강제 마법진 콜젼(Coercion) 활성화.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가 베르덴의 자유를 빼앗았던, 증오스러운 마법진.

    마탑의 보물고를 뚫은 베르덴도 끝내 이 마법진을 직접 파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는 이 마법진의 편린조차 이해하지 못할 터.

    ‘내 실력으로는 마탑주만큼의 효과를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령의 행동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지성이 있는 이형종이라고 한들, 인간이 가진 자율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마법진의 마력이 정령을 옭아맸다.

    그리고 한때 베르덴의 몸에 새겨졌던 것과 같은 문양이 정령 위에 떠오르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고요해진 공동.

    그 중심에서는 푸른 정령이 미약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베르덴이 명령했다.

    “이리 와.”

    [……?!]

    정령이 움직였다.

    한순간 저항하려다 콜젼에 의해 곧바로 제압당했다. 정령의 마력을 통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마법진 발동은 성공한 것 같군.’

    보물고에 있는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 마탑주의 마법진을 수년간 연구했다.

    그러나 이처럼 최상위 마법진 가동에 성공한 건 공간 이동 마법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베르덴은 마법사로서의 성취감과 고양감을 만끽했다.

    그럼 다음이다.

    숲의 정령은 베르덴의 마력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성질이 달라지며, 숲의 정령으로서의 능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어떨까.

    베르덴이 정령에게 물었다.

    “넌 뭘 할 수 있지?”

    부활하자마자 마주한, 자신을 소멸시켰던 마법사.

    정령이 다시 힘껏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억압이었다. 정령은 정령생 처음으로 공포란 걸 느꼈다.

    결국 정령이 완전히 체념했는지 미약한 불빛을 반짝거리며 명령을 따랐다.

    화염.

    물.

    얼음.

    번개.

    땅.

    정령은 자연을 조종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속성의 원소 마법을 선보였다. 베르덴의 마력이라 그런지 그와 같은 위계의 원소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모양.

    숲의 정령으로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사용이 가능한 건 원소 마법뿐이고 한계는 4위계 하위까지. 합성 마법이나 집중이 필요한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어.”

    생각했던 용도로 충분히 쓸 만할 것 같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에 베르덴이 미소 지었다.

    * * *

    페르네에게 연락을 받은 베르덴이 그녀의 주점에 찾아갔다.

    “푸른 구름 상단의 위치를 찾았어요.”

    퀭한 눈을 한 페르네가 말했다.

    미완성된 정보망으로 정보를 수집하느라 바빴는지, 며칠 밤을 새운 듯한 몰골이었다.

    “위치는 광산 마을 ‘마일드륀’. 아직 그쪽까지 제 정보망이 닿지 않아 최근 정보는 모르겠지만, 상단과 관련된 거래 일지를 찾아보니 그곳에서 광석과 마석을 대량으로 구입해 대규모로 운반할 계획인 모양이에요.”

    “언제까지?”

    “물량을 보니 거래 규모가 상당하던데요. 그래서 평소보다 체류 기간이 길 거예요. 말을 갈아타면서 움직이면 여유롭게 마일드륀에서 만날 수 있겠죠.”

    페르네가 말을 이었다.

    “애셔 님이 푸른 구름 상단의 메딘에게 무슨 볼일이신지는 묻지 않겠어요. 저는 정보상이니까요. 하지만 명심하실 게 하나 있어요.”

    “뭐지?”

    “최근 정보에 의하면 ‘조합’이 푸른 구름 상단과 접촉하고 있다고 해요. 단순히 상단 의뢰를 맡기려는 건지, 조합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조합과 마찰이 생기는 일은 피해야 해요. 놈들의 뒷배로는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있으니까요. 제 힘으로는 놈들을 상대하긴커녕 버티기조차 어려워요.”

    자칫하면 페르네의 정보망이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랬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베르덴이 없었다면 페르네는 진즉에 끝장났을 것이다. 언젠가 조합에게 복수를 하긴 할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페르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부디요!”

    베르덴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푸른 구름 상단의 메딘에게 가는 것은 초청장을 구하기 위함이다. 굳이 조합과 마찰을 빚을 이유도, 생각도 없다.

    그렇게 베르덴의 다음 행선지는 마일드륀으로 정해졌다.

    “아, 그리고 하나 줄 게 있는데.”

    “……네? 저한테요?”

    설마 돈인가?

    하지만 나타난 건 그 이상의 것이었다.

    베르덴의 품에서 나온 푸른 정령이 페르네에게 다가갔다.

    “정령이다. 꽤나 쓸 만하니 어이없게 암살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

    페르네가 말했다.

    조합에게 목숨을 위협받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베르덴은 정령을 붙여 주기로 결정했다.

    워낙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편하니까. 그리고 베르덴의 마력을 흡수한 정령은 생각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데리고 다녀도 되지만 딱히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걸리적거릴 가능성이 높다.

    베르덴의 마법 특성상 혼자일 때가 가장 자유롭게 싸울 수 있었으니. 주변을 신경 쓰며 힘 조절을 하는 건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페르네가 입을 뻐끔거렸다.

    “……정령? 제가 알고 있는 그 정령이 맞나요? 이형종?”

    “널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마라. 그럼 다녀오지.”

    페르네가 입을 우물거리며 혼란해하는 사이, 베르덴은 훌쩍 주점을 벗어났다.

    주점에 남은 페르네와 정령.

    둘은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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